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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는 사람 Mar 17. 2021

사는 게 숨차요

몸보다 마음이 더 커진 소년 <거인>

5년 전 이 영화를 본 며칠 뒤, 40대 가장이 일가족 살해 후 자신은 같이 죽지 못한 채 잡힌 기사가 나왔다. 뉴스를 같이 던 엄마는 담배 끊은 지 3시간 됐는데 다시 피우고 싶다고 했다. 나는 나약한 금연을 뉴스 핑계 대지 마라며 출근했지만, 뉴스와 이 영화가 겹쳐 아침부터 마음이 울적했다.

'40대 가장, 일가족 살해 후 자살 실패'의 첫 뉴스를 들은 그날은 1월의 겨울 추위가 무색하게 마치 가을날 같이 푸근해서 소란스러웠던 세속의 기온과는 참 이질적이었다. 세찬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며 제 자리를 잡지 못하는 머리카락이 어지러운 현실 같았다.     

나는 이 영화를 '성장영화'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그렇게 간단하게 부르기엔 17살 영재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 영재의 고통은 성장통이 아니라 생존적 고통이다. 영재의 삶은 포스터 속 그림처럼, 물에 잠긴 좁은 욕조에서 코만 겨우 내놓고 간신히 숨만 연명하는 상태나 다름없다. 십 대 소년의 아픔을 다뤘다고 성장영화라 단순화시킨다면 그건 마치 12월엔 수능 보는 고 3만 얘기하는 언론 같고, 수능 보는 고3 외의 청소년은 없는 세상의 단면 같다.     


나는 '사는 게 숨차다'

(영화의 주인공인 영재를 이제부터 '나' 또는 '영재'로 번갈아 쓴다.)

내게 집은 물속에 잠긴 수중 감옥 같고, 거기서 익사하지 않으려면 숨 한번 맘대로 쉬면 안 된다. 쌍으로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부모,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동생은 내 숨통을 막는 간수들이다. 나는 살기 위해서 집을 나왔고 내 발로 보호시설 '이삭의 집'으로 들어왔다.

여기서도 여전히 사는 건 만만치 않고, 가슴 한번 제대로 펴 보지 못하지만 그래도 이곳은 내게 주어진 최소한의 숨길이다. 나는 이 최소한의 숨길마저 끊길까 봐 항상 전전긍긍 속을 숨기며 위선과 눈치 속에서 산다. ‘진심'을 말하면 '살기 힘들다'라는 것을 너무 일찍 깨달아서 덜 자란 몸에 마음만 '거인' 같이 자랐다.     


내가 성당을 열심히 나가는 것은 원장 부부가 가톨릭 신자이고, 이 시설이 성당의 후원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차후 신부가 되기 위한 처의 방편이다. 나는 곧 17살이 되고 그것은 시설을 떠나야 되는 '절망적 나이'다. 미래를 생각할 수 없는 당장의 내 간절한 희망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그다음 희망은 공짜 숙식 제공에 대접까지 받는 '신부'가 되는 신학교에 가는 것이다. 신학교에만 가면 보호시설을 벗어나면서도 집에 안 갈 수 있고, 신부는 영재가 '사람으로 살 수 있는' 만사 오케이 구제책이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 치사하게 눈 한번 제대로 치켜뜨지 못하고 까치발 심정으로 기웃거려도 현실은 늘 막혀있는 벽, 열리지 않는 문이다. '영재'는 '요한'이란 이름으로 살 수 있기를 바라고 크고 작은 거짓과 위선에 배신까지 일삼으며 이중적 생활을 한다. 이런 영재에게 아버진 동생 부양까지 떠맡기려 하고 어머니도 내심 동조한다. 영재가 부모란 이들한테 받은 것이라곤 무책임한 생산, 무능과 가난, 치사함밖에 없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영재에게 장남의 책임과 의무를 말하고 죄책감을 조장한다.


"낳아놓고 왜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건데?"

"내가 동생까지 맡으면 엄마 아버지는 헤어질 거잖아? 그러면 우리는 나중에 어디로 돌아가는데? 돌아갈 집이 없어지는 거잖아?"

영재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실은 그 집이 언젠가는 돌아갈 수 있는 곳으로 간신히, 억지로라도 남기를 바랐던 것이다.

원망할 대상조차 변변히 없는 영재는 기도한다.

“… 무능한 아버지를 죽여주시고, 못난 어머니를 벌해주시고, 이런 나를 품어주세요”   

  

영화 후미에 최소한의 숨길마저 잃어버린 영재에게 "모든 것은 하느님이 알아서 해 줄 거야"라는 신부의 말은 무척이나 공허하고 무성의한 농담 같았다. 마치 '아프니까 청춘이다' 라거나, '어릴 때는 일한 임금 못 받아 본 것도 젊을 때의 경험이다.'라고 말했던 한 정치인의 헛소리처럼 들렸다. 오히려 한 번도 동정 어린 눈길이나 맘을 품지 않은 원장 아빠의 냉정한 말들이 더 가까이 와 닿는다.

"실업계 학생도 신학교에 갈 수 있다더냐?"

“네가 가장 불쌍한 사람이란 생각만 버리면 돼”     

원래 하늘의 말은 멀지만 땅의 말은 더 가까운 법이다.


그랬다. 여기 시설만 해도 영재처럼 불쌍하고, 영재처럼 희망 없는 아이들이 늘렸으니까. 영재는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정 투쟁에 더욱더 매달렸다. 영재의 영악함과 불쌍한 욕망을 일찌감치 꿰뚫어 본 원장은 시종일관 냉소적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아버지는 하나같이 죄다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만들어 놓고 책임은 안 지고 '내 보내기'만 하려는 무책임한 공통점의 인물들은 훼방꾼 아니면 방관자, 냉혈한이다. 땅 위의 생물학적 아버지도 영재를 내쳤고, 시설의 원장 아빠도 영재를 내보내려 하고, 높은 데서 항상 구경질만 하는 하느님 아버지도 그를 품어주진 않는다.

온통 부정(否)의 부정(父情)을 그린 영화를 보노라니 최승자의 『이 시대의 사랑』에 나온 시도  구절이 생각났다.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주지 않았다 -13쪽「 일찍이 나는」

조용히 나는 묻고 싶었다
인생이 똥이냐 말뚝 뿌리 아버지 인생이 똥이냐 네가 그렇게 그르쳐 좋으냐 낯도 모르는 낯도 모르고 싶은 어느 개뼈다귀가 내 아버지인가 아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살아계신 아버지도 하나님 아버지도 아니다 아니다네 인생의 꽁무니를 붙잡고 뒤에서 신나게 흔들어대는 모든 아버지들아 내가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강아지 새끼인 줄 아느냐-21쪽「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감독은 어느 한 곳 기댈 곳 없는 영재의 환경을 영화 내내 보여주면서도, 환경을 빌미로 영재의 영악과 위선을 변명하거나 포장하지 않으며 자기 연민을 합리화하지도 않는다. 영화는 끝까지 아주 작은 희망도 보여주지 않는다. 대책 없는 희망만큼 무책임한 게 없고, 무책임한 희망은 별무 소용이라는 것을 감독 자신의 경험이 알려준 것일 게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땅의 말로 가장 따뜻한 희망의 말은, 자원봉사 성당 선생님이 영재의 절박하고 조급한 부탁에 안타까움을 담아 한 말이다.     

" 네가 네 말에 속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말하는 데로 살아가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     


영재는 아버지의 훼방으로 결국 다른 시설로 옮기게 되고 자신의 부모를 벌하고 자신을 품어 달라고 기도하던 성당에서 자신이 살기 위해 배신했던 룸메이트를 만난다. 그리고 시설을 떠나기 전 그렇게 내치고자 했던 '혹' 같은 동생을 만나 그동안 받은 구호품을 건네준다. 친구와 동생 둘 다 자기가 참회를 하거나 품어야 할 대상들로 결국 용서나 구원은 하늘이나 다른 누가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해야 하는 것임을 말하는 같다.     

영재가 나중에라도 '돌아갈' 집은 과연 있을까!

성경에서처럼 영재가 언젠가는 이 세상이든, 저 하늘이든 그 '아버지'의 사랑과 축복을 좀 받았으면 좋겠다. 영재시설에서 시설로 떠도는 불안정한 삶이 '야곱의 집' 이 마지막이길 간절히 바랬지만, 영화는 어떤 전망도 내놓지 않은 채 현재 진행형으로 끝난다.


영재의 세례명 '요한'의 성경적 삶을 찾아보았다.

사도 요한(John the Apostle) - 예수님의 핵심적인 세 제자 가운데 한 사람. 세베대와 살로메의 아들이며 야고보의 형제(마 4:21; 27:56; 막 15:40; 행 12:1-2).


그는 어부요 시몬 베드로의 동업자로서 갈릴리 바다를 주무대로 생활했다(막 1:19-20; 눅 5:10; 요 1:44). 세례 요한을 통해 예수님의 제자(요 1:35)요 사도로 부름을 받고서 그리스도를 위해 가족과 직업을 버렸다(마 4:21-22; 막 1:19-20; 눅 5:10). 베드로,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의 최측근 제자로서 예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막 5:37; 눅 8:51), 영화롭게 변형되실 때(마 17:1; 막 9:2; 눅 9:28),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마 26:37; 막 14:33) 함께했었다.


그는 학문이 없었으나(행 4:13) 판단이 빨랐고(막 9:38), 마음이 좋았으나(막 9:38) 야심이 있었다(막 10:35-37). 특히, 예수님을 거절한 사마리아에 불을 내려 멸망시킬 것을 예수께 요청할 정도로 성격이 불 같았다(눅 9:54). 그 일로 ‘보아너게’(우레의 아들)라는 별명을 얻었다(막 3:17).     

예수님의 마지막 유월절을 준비하는 베드로를 도왔고(눅 22:8),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였다(요 13:25). 예수님이 대적에게 붙잡혔을 때 심문당하는 장소까지 뒤쫓았고(요 18:15-16), 예수님이 못 박히실 때 십자가 아래서 그것을 목격했다(요 19:26-27). 예수님의 임종 시 주의 모친 마리아를 부탁받았다(요 19:26-27). 예수님 부활 후 그 빈 무덤을 목격했고(요 20:2-10) 갈릴리 바다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으며(요 21:1-7), 예수님의 승천을 다른 제자들과 함께 목격했다(행 1:9-13). 오순절 성령 강림 후 시작된 초대교회에서 베드로와 함께 활동했다(행 3:1; 4:22; 8:14-17).


그는 요한복음과 요한 1·2·3서를 기록했고, 또 밧모 섬으로 유배되었을 때 요한계시록을 썼다(계 1:1, 9). 전승에 따르면 밧모 섬에서 나와 에베소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는 간접적으로 자신을 ‘예수의 사랑하는 자’로 묘사했는데(요 13:23; 21:20), 그 같은 주님의 사랑으로 인해 인격과 성품이 변화되어 ‘사랑의 사도’라 일컬어질 정도로 사랑의 메신저로 교회를 섬겼다(요일 2:9-10; 3:14-18; 4:7-8, 20). → ‘12 사도의 행적’을 보라.     

[네이버 지식백과] 요한 [John] (라이프 성경사전, 2006.08.15, 생명의 말씀사)          

영재가 '예수의 사랑하는 자'가 되길 바라는 감독의 축원 같다.감독은 (성)폭력, 왕따, 자살 같은 자극적 소재를 다루지 않은 성장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는 데 성공한 거 같다.

이 영화 속에는 영재의 시설 룸메이트의 (역시나 무책임한!) 아버지로 '양준익'이 나온다. 그 역시 자신의 자전적 체험을 영화로 한 '똥파리'를 만들었었다. 영화로만 보자면 김태용의 아버지는 양준익의 아버지처럼 무능하고 무책임하지만, 양준익의 아버지처럼 폭력적이진 않았다. 그래서인지 비슷한 상처를 가진 김태용의 영화가 상처 받은 어린양이 우는 영화에 가깝다면 양준익의 영화는 상처 받은 짐승이 울부짖는 영화 같았다. 김태용은 이제 자신이든 가족이든 용서를 하고 싶은 같고, 양준익은 아직 용서를 하지 못한 같다.

이 영화를 본 뒤 두 감독이 자신을 사랑하고 용서하기를 바랐던 기억이 난다.  

   

<거인>의 여운이 깊고 진해 영화를 본 후 감독을 검색해 보니 입봉작이었다. 그 이름을 기억해 놓은 후 <여사>가 나왔을 때 일부러 찾아봤다. 같은 감독의 작품이 맞나? 싶을 정도로 실망했다. 캐릭터나 시대상의 표현뿐 아니라 질투에 대한 감정 묘사와 서사의 개연성이 너무 작위적, 도식적이고 진부했다. 또, 여성 캐릭터는 남성 감독이 다루는 여성의 묘사에서 자주 느끼는 답답함, 한계가 여실히 느껴졌다. <거인>은 감독의 직접 체험이 바탕이 됐고 주요 등장인물이 거의 남자라 서사나 캐릭터, 감정선이 자연스러웠는데 <여교사>는 경험과 성별이 다른 이야기를 다룰 때 그것을 만드는 감독, 작가가 얼마나 많은 고민과 공부를 해야 하는지를 다시 생각 들게 하는 영화였다.

최우식이란 배우를 눈여겨 보고 그 이름을 기억하게 된 영화 <거인>이었다.


이 영화를 보고 난 며칠 뒤, 생활고 때문에 일가족을 살해하고 자신은 살아남은 아버지의 뉴스가 나왔다.
 극빈에 의한 일가족 자살 계획 후 실패가 아닌, '강남생활'을 포기하지 못한 아버지의 선택이었다. 사는 동네, 타고 다니는 자동차가 자신의 '자존심'이었던 그는 남아있는 돈이 다 떨어졌을때 가족들이 그 전과 같은 생활을 못해 '무시' 받을게 싫어서 그랬단다.
버린 영재(들)의  아버지와 죽인 (강남) 아버지 중 누가 더 비정하고 무책임한지를 따져야 하는 세상, 사람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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