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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는 사람 Jul 02. 2022

<나의 해방 일지>에서 본 도스토옙스키

끝의 장소  당미역(堂尾驛)에서 만난  구원, 해방, 환대



박해영 드라마에서 본 도스토옙스키

     

<나의 해방 일지>에 대한 리뷰가 많이 나왔을 건데 나는 이 드라마, '박해영 작가의 글에서 본 도스토옙스키적 세계'란 측면에서 리뷰해 보려고 한다.

서구 유럽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한일 양국의 소설가나 영화감독들에겐 톨스토이보다 도스토옙스키가 인기가 더 많은 것 같고 소설과 영화 속에서도 그런 영향, 분위기를 자주 느낀다. 인간의 올바름과 선함을 지향하며 영적, 도적적, 교훈적인 분위기, 안정된 엘리트가 이끌고 나가는 인물 구성, 지적이고 완성적인 문체가 톨스토이의 세계, 작법이라면 인간의 약함과 악함, 불행과 고통, 자아 분열, 콤플렉스 많은 중하층 계급, 소외되고 학대받는 사람에 대한 연민, 서사의 완전성보다는 특정 요소의 부각이 도스토옙스키의 세계, 작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읽고 본 것에 한해 나열해 보면 일본의 나쓰메 소세키, 다자이 오사무, 한국의 이상, 봉준호, 나홍진, 김기덕 등의 작품 세계도 그렇다.   


박해영 작가의 전작인 <나의 아저씨>에서도 도스토옙스키적인 세계관, 분위기를 살짝 느꼈는데 최근작인 <나의 해방 일지>에선 더 그랬다. 전작에선 이지안, 최근작에선 구 씨가 콤플렉스 많은 도스토옙스키적인 주인공들이다. 영민하고 재능 있으나 환경과 성격적 요인으로 마이너 한 삶을 살며 자기혐오가 심한 인물들.

이지안이 사채빚에 시달리다 사채업자를 죽이는 설정은 <죄와 벌>의 로쟈를 연상시키고 구 씨와 염미정의 관계는 로쟈가 소냐로 인해 갱생하는 구도, <가난한 사람들>에서 바르바라와 마까르의 관계를 연상시켰다. <가난한 사람들>에게선 박해영의 표현대로라면 마까르가 바르바라를 먼저 추앙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죄와 벌>은 워낙 유명해 안 읽은 사람도 그 대략의 내용은 알고 있겠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덜 유명해서 모르는 이도 많을 것 같아 내용을 간단 소개해본다.     


줄거리를 한 줄로 소개하면 19세기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크의 빈민가 다세대 주택에 사는 가난한 말단 공무원과 병약한 여성의 불발된 연애 이야기다. 요즘의 삼포, N포 세대보다 더 가난한 이 연인들은 데이트 비용도 없어 한집에서 주야장천 편지만 주고받다 변변한 밥, 차 한 번 못 나누다 헤어진다. 공통된 가난, 남자의 비사교적인 성격과 주취, 여자의 병으로 이 둘은 만나는 사람도 별로 없고 어느 누구를 봐도 둘 만큼 통하는 대화자는 없다. 특히 남자는 오로지 여자와 얘기할 때만 대화의 의욕, 기쁨을 느낀다.     

세상, 타인과 절연한 그들에게 편지는 사람과의 유일한 교류, 대화 창구다. 그들이 나눈 편지는 일반적인 연애편지와는 좀 다르다. 보고 싶다, 만나자는 사랑의 고백보다는 ‘대화의 갈증’이 더 크게 느껴진다. 마치 독방의 감옥에서 막힌 벽만 대하던 수인(囚人)이 면회 온 사람 붙들고 이 시간이 다 가기 전에 쌓였던 얘기를 막 쏟아내는 그런 분위기다. 유일하게 세상과 소통하는 시간, 사람이니까 한마디라도 더 하고 싶은 그런 상태다.

유일한 소통 창구였던 바르바라가 가난에 승복해 인색한 부호와의 결혼을 선택하고 떠났을 때 마까르가 가장 슬퍼한 것은 그녀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보다 '대화의 단절'이었다.


<나의 해방 일지>의 구 씨도 산포, 염미정을 떠난 후 다시 입을 닫지 않던가. 구씨는 자신이 저지른 죄악과 업보로 자기혐오와 죄책감에 빠져  다가오는 사람도 현재의 행복도 순전히 즐기지 못하는 인물이다.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이 다가올 불행의 반어적 예고편, 가중 처벌 전 불길한 짧은 행복 같은 것으로 받아들인다.

도스토옙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에서 마까르가 바르바라에게 보낸 편지 속에도 이 비슷한 말이 나온다.     

불확실한 내일과 보장 없는 미래, 그리고 앞으로 제게 어떤 일어날지 짐작도 할 수 없는 현실만 생각하면 전 괴롭기만 합니다. 과거는 돌이켜 보는 것조차 무서워요, 잠깐만 회상을 해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으니까요.     


외부, 타인과 절연한 채 골방에 갇혀 자폐적 생활로 하루하루 연명하는 그런 마까르에게 바르바라는 말한다.

“당신은 남의 집 구석방이나 차지하고 앉아서, 고독하고 궁핍하게, 아무 기쁨도 없이,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넬 사람도 없이 평생을 그렇게 사셨을까요!”     


대중 가사의 노랫말처럼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요(구 씨라지만 그게 또 가명인 줄 어찌 알겠는가).’의 옆집 남자에게 느닷없이 찾아가서 "왜 맨날 술만 마셔요? 내가 할 일 줘요? 날 추앙해요!"라는 뜬금포를 내지르는 장면에서 나는 소설 속 저 두 대화가 생각났다.


도스토옙스키의 주인공들 중 정신이나 육체가 온전히 건강한 사람은 별로 없다. 내가 읽은 그의 책 중에선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속 알로샤 정도만 생각난다. 주인공과 주요 주변인 대부분은 알코올, 도박 중독자이거나 섬망증, 정신분열, 히스테리 환자들이다. 박해영이 만든 구씨 또한 환청, 환시에 시달리는 알콜 중독자이다.     


캐릭토님-당미역(堂尾驛), 염창희


러시아 소설가들이 즐겨 쓰는 기법 중에 '캐릭토님'이란 것이 있다. 작품 제목이나 작중 인물의 이름에 그 성격이나 작품 주제를 드러내는 것이다. 소설 속 이름들이 러시아인들이 실지로 꼭 많이 쓰는 것은 아니지만, 글의 주제나 흥미를 극대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기법이라고 한다. 그런 이유로 러시아 작가들은 자기 자식의 이름을 짓는 만큼 작중 인물들 이름 짓기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도스토옙키도 책의 제목이나 글 속 인물들 이름을 통해 작품의 주제와 인물들 성격을 많이 드러내곤 했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raskolinikov)라는 이름 속엔 분열, 초인사상, 원칙주의자, 고집쟁이, 분리파교도, 저주.... 같은 뜻이 있다고 한다. 더 자세하게는 라스콜(raskol)은 쪼개기, 분열, 분리, 도끼살인, 절대적, 맹목적의 뜻이라는데 이름 자체에 '도끼 살인'이라는 주인공의 중요 행위, 편집증적 성격과 정신 분열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영민하고 자존심 강하지만 희생적인 여동생 두냐는 선행, 우아하고 친절하다는 뜻이, 두냐의 현실을 악용하려는 두 남자는 스비드리가일로프(쓰레기,돼지)와 루진(썩은 물, 물 웅덩이)이다. 등장인물들의 이름만 자세히 곱씹어 봐도 각 인물의 캐릭터, 이 소설의 주제가 대충 그려질 지경이다.     

박해영도 도스토옙스키만큼은 아니지만 작품 주제나 분위기를 드러내기 위해 지명이나 주인공 이름에 신경 쓰는 것 같다. 우선 박 해영이 드라마 속에 쓴 이름, 지명들을 살펴보자.

<나의 아저씨> 때에는 아이유가 맡았던 주인공 이름이 '편안함에 이른다.'라는 뜻의 '지안(至安)'이다. 사채업자의 폭력으로부터 할머니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우발적 살인으로 살인 전과가 생긴 소녀 가장 지안의 삶은 이름과 달리 극 전개 내내 불안으로 점철된 삶  속에 내팽개쳐져 있다. 

<나의 아저씨>에선 '지안'이나 '후계동'이 작중 인물과 배경을 설명하는 주요 키워드로 캐릭토님처럼 쓰였다면 <나의 해방>에선 산포, 당미역, 염창희란 이름 아닐까 싶다.

<나의 해방>의 핵심 키워드는 '해방, 구원, 환대'인데 그 세 단어의 출발점이 '당미역(堂尾驛)'다.


당미역(堂尾驛): 끝의 시작과 환대의 장소

정확한 해석인지는 모르겠지만  '끝에 있는 장소, 끝에 있는 역' 쯤으로 해석하면 크게 무리 없지 싶다. 계란 노른자 서울의 외곽, 계란 흰 자 끄트머리 경기도 어디쯤에서 시작되는 추앙, 해방, 환대.

끝의 장소라는 한자어를 쓰는 당미역이 있는 산포는 서울에서 먼 경기도 외곽으로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해야 하는 '삼포 세대'의 그 삼포와 비슷한 어감인데 염 씨 삼 남매의 현실이다.

구 씨와 염미정은 계절의 끝인 겨울에 만나 겨울에 헤어지고 겨울에 재회해서 끝난다. 겨울은 계절의 끝이지만 추운 겨울에서 해방되기 직전  봄을 환대하는 계절이고 끝의 시작이기도 하다.


堂(당)의 한자적 뜻을 찾아보았는데 몇 가지가 이 드라마와 부합되는 게 있었다. 첫 번째는  '집, 사랑채, 마루, 대청'의 의미다. 당은 보통 어떤 고정된 장소에 많이 쓰이는데 '집, 사랑채, 마루, 대청'같이 사람들이 '방'보다 쉽게 사람들이 둘러앉아 먹고 마시며 놀 수 있는 개방적 장소이다. 주인이 외부의 손님을 맞이해서 마주 앉는 '환대의 장소'다.  산포와 당미역은 인간에게 염증만 느낀 구 씨가 처음으로 계산 없는 환대를 받은 곳이다.


두 번째 꼽은 뜻에는 '근친(近親), 친족(親族)'이 있었다. 염 씨네 가족은 외지, 외부 사람인 구 씨를 주인인 자신들의 마당 평상에, 거실(마루)에 계속 부르고 앉힌다. '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의 뜻이 있는 '식구' 대하듯 계속 밥상머리에 앉힌다. 대체로 <나의 아저씨>보다 현실적이었지만 가장 비현실적이었던 게 염씨네 가족 중 염미정과 구 씨의 교제, 연애에 대해 반대를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설정이었다. 어디서 뭐하다 온지도 모르고 '여기 오기 전에 뭐 했냐고 묻는 순간 떠날 것 같다' 만 겨우 아는 알콜 중독자와 딸, 동생이 사귄다는데 아무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고 심지어 지원한다. 언니 기정이 잠깐 반대 의사를 보이지만 반대라기보다는 근거리 연애에 대한 유치한 샘에 가깝다.


구 씨 드라마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염 씨네 '방'에 한 번도 들어가지 않는다. 염씨네 가족에겐 밖에서 서서 그냥 보낼 사이는 아니지만 아직 방에 들일만큼 편안하고 완전한 가족은 아닌 관계다. 밥은 계속, 자주 먹지만 방에는 한 번도 들어가지 않는다. 염미정과 염창희도 구 씨 집에 자주 가지만 자신의 방에는 안 들인다. 구 씨는 거실에서 자고 거실에서 술 마시는 장면만 계속 나오는 거로 짐작해 술병 보관 장소 외에 방을 사용하지도 않는 것 같다. 물론 구 씨가 산포 염씨네서 일하고 밥 먹는 계절이 거의 여름이라 방에 들어갈 계절이 아니기도 했다. 그러나 구 씨가 구자경이 된 서울의 집도 방이 별도로 없는 오피스텔이다. 서울에 온 그는 같이 살며 밥을 같이 먹고 싶은 사람이 없다. 방은 '속'인데 구 씨는 자기 속을 안 보이는 인물이다. 타인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아직 방에 편안히 못 들이는 인물이다라는 설정으로 읽혔다.

방에 못 들어가는 사람, 자신도 타인도 방에 못 들이는 구 씨가 생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절망적인 상태에서 우연히 도착한 곳이 당미역(堂尾驛)이다. 끝에서 만난 해방, 구원, 환대.     


이 드라마 최고의 매력적 캐릭터는 구 씨이지만 추앙도 사랑도 아닌 자기 앞에 다가오는 삶과 대상을 순리대로 맞고 보내며 극 중에서 가장 많이 성장한 인물, 현실에서 가장 친구로 두고 싶은 이는 염씨네 장남 염창희다. '염창희'란 이름은 극 전개에서 후반부 그의 마지막 직업으로 암시되는 '염장이'와 그 어감이 비슷하지 않은가.



이보다 건전할 수는 없다. 구 씨와 미정의 러브 신     


방영 초기 극 중 남녀 주인공들 나이 차이 때문에 롤리타 논란도 있었던 <나의 아저씨>는 방영 후 그런 오해는 사라졌다. 박동훈과 이지안이 드라마 끝까지 좋은 어른과 아이로 건전한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나의 아저씨>는 사심, 흑심이라곤 전혀 없는 좋은 후원자 키다리 아저씨와   가장의 설정이라 그렇겠지만 <나의 해방일지>에서도 두 주인공의 스킨십이나 성적 묘사는 거의 없다.


구 씨와 염미정은 각자 연애, 동거 경험이 있는 성인들로 추정 나이가 염미정은 20대 후반, 구 씨는 30대 중후반쯤으로 나온다. 한참 스킨십, 성욕이 왕성할 나이의 이들은 금욕적 종교인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드라마 내내 진한 스킨십, 포옹신 한번 없이 추앙이니 해방이니 연극 대사 같은 대사로 입만 털다 끝난다. 딱 한 번 갈대밭 있는 야산에서 롱 샷으로 잡아 나오는 키스 신도 눈곱을 떼 주는지 입을 맞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다. 그날 만나 키스하고 원나잇 섹스하는 게 흔한 거처럼 그려지는 요즘 드라마나 영화에선 보기 힘든 순결주의 영화다. 박해영 작가가 일반적 사랑이 아닌 특별하고 구원 같은 추앙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실지 발생했을 육체적 사랑은 생략하거나 암시적으로 표현했을 수도 있다.     

혹자가 구 씨는 알콜 중독으로 인한 성욕 감퇴, 성기능 불능이라는 우스개 한탄? 까지도 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이 부분도 도스토옙스키적인 묘사같이 느껴졌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선 남녀 간의 성애 장면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진 않는다. 내가 다른 러시아 작가들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 소설만큼은 읽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선 그랬던 거 같다. 남자 주인공들은 여자들에게 집착하고 몰입하지만 애인 관계로 발전한 뒤에도 성애적 묘사는 없다.          



도스토옙스키와 박해영의 구원자     


위대한 남자 작가들 소설 속의 남자 주인공들 대부분은 잘났거나 못났거나 대부분 여자에 의해 그들의 영혼이 구원받는다는 설정이 많다. 소냐가 로쟈 구원의 매개자, 대상이 되는 것을 비롯해 다자이 오사무 소설 속에서도 이상의 소설에서도 다른 여러 남자 작가들 소설에서도, 인텔리 루저 남자들의 말잔치 끝판왕인 홍상수 영화 속 남자들도 그렇다는 식으로 묘사되지 않는가.

어떤 문학, 예술에서도 여자 주인공 구원의 대상이 '남자'(아버지든 애인이든)인 것을 본 기억이 잘 없다. 왜 남자들은 자기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하고, 항상 여자들을 통해서만 구원되는가? 그것도 어머니, 누이, 애인, 매춘부 같이 가진 게 몸, 사랑밖에 없는 여자들이다. 사회, 가정 내의 위치는 약하지만 게만은 한없이 강하고 헌신적인 여성상. 그리고 다 '성모 마리아 같은 매춘부'로 연결되는가?      

도스토옙스키는 가장 약한 사람들(가난뱅이, 여자, 외국인 이주민 등)에게서 신성(神性)발견된다는 설득이라도 되지만 안 그런 작가, 작품이 더 많았다. 그저 고착화된 성처녀,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를 반복 재생하며 약한 여자들을 또 한 번 학대하고 소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약하고 어리석은 남자들을 구원해 준 그 여자들은 어디서 구원받을 것인가? 박해영은 <나의 해방 일지>에서 남자 작가들이 창녀적 마리아, 구원자 여성상을 만든 것의 반대를 창조해낸다. 남자 주인공을 호스트바 마담 출신으로 설정하고 여자 주인공은 그 누구에 의해서가 아닌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인물, 자가 해방으로 타인도 구원시켜 자기들 앞에 오는 사람들을 환대하는 인물로 만든다.      


전작 <나의 아저씨>에서 좋은 아저씨 박동훈과 좋은 이웃 후미동 아재들의 따뜻함을 위해 희생당한 여자들에 대한 묘사나 비판이 부족한 것이 아쉬웠는데 그런 면에서 <나의 해방 일지>는 조금 진보했다. 가족, 남자들을 위한 엄마, 누나들 같은 집안  여자 가족의 희생 묘사는 반복되지만 그게 일상의 자연스럽고 관습적인 묘사가 아니라 전작보다 좀 더 사실적이고 날카롭고 아프게 묘사된다. 농사와 싱크대 공장 투잡 하는 남편의 극한 조수로, 직장 다니는 삼 남매의 엄마로, 종신 노예 같은 극한 생활을 하는 엄마는 출연 내내 우울하고 피곤한 얼굴로 나오다 마지막에 울음과 환한 웃음 한 번 터트리고 과로 돌연사로 지긋지긋한 노동에서 돌발 해방된다. 엄마의 부재 후 아버지와 오빠는 비로소 자신들의 평안과 무노동은 엄마와 여자 형제들의 희생과 침묵으로 이어졌음을 깨달으며 가사 노동 참여와 오로지 집밥 대신 배달 밀키트를 먹게 되는 것이다.     



수다쟁이     


도스토옙키 작품 속 인물들은 다 장광설 언변가에 수다쟁이들이다. 주인공은 물론 주요 등장인물들도 다 그렇다. 한 사람 대화, 생각이 마침표 없이 몇 장씩 계속되는 경우도 많지 않은가. <나의 해방 일지> 속 공동 주연인 염 씨네 남매들 또한 다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수다쟁이들이다. 구 씨도 사람들과 직업적 소음에 시달려 입을 닫은 사람이지만 염미정과 말할 때 보면 눌변가는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말로 도저히 표현하지 못한다’며 자기가 말하고 싶은 사람 앞에서만 능변가가 되는 인물이 박동훈, 구 씨와 염미정이라면 어느 상황, 누구 앞에서도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수다쟁이'들이 박동훈과 염미정의 형제들이다.     



연극적 대사, 영화적&문학적 연출-김석윤


보는 내내 연출, 세트, 대사 면면이 상당히 영화적, 문학적이다라는 감상이 자주 들었다. '추앙, 해방, 환대' '갈망' 등 '일상용어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 문어체 단어나 대사들이 클립 영상으로만 봤을 땐 이질적 거부감이 많았는데 전편을 보니 이해나 이입이 됐다. 대사는 직설적이지만 대화 속 침묵과 여백도 많고 느린 전개와 서사, 대조적인 공간이나 사물을 통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상징적,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들개와 새, 트럭과 롤스로이스, 투박하지만 달이 보이고 바람이 느껴지는 고요한 산포와 화려하지만 소음으로 가득한 서울의 나이트, 5억과 500원....     


이창동의 <버닝>을 연상시키는 면도 있었는데 문학적 코드나 정서가 짙다는 공통점이 있다. 드라마 제목이자 주제이기도 한 '해방' 역시 그 결이 조금 다르지만 <버닝>에서 해미가 말하던 '헝거'의 정서와 연결된다. 미는 노을, 새의 이미지와 함께 이 지겹고 힘든 세상에서 사라졌지만 염미정은 한 발 한 발 소몰이하듯 버텨낸다.

"하루에 5분, 5분만 숨통 트여도 살만 하잖아. 편의점에 갔을 때 내가 문을 열어주면 '고맙습니다' 하는 학생 때문에 7초 설레고, 아침에 눈 떴을 때 '아 오늘 토요일이지. 10초 설레고. 그렇게 하루 5분만 채워요.

'하루 몇 분의 기쁨과 감사'로 그래도 '단정히' 살아가 볼 힘을 얻는다.      

<버닝>과 <나의 해방  일지> 속 청춘들이 세속의 욕망, 자신의 한계와 현실의 난관 속에서 지루하고 불안한 건 같지만, <버닝>의 인물들이 자기 연민이나 과잉 자아에 좀 더 과몰입됐다면 <나의 해방 일지> 속 청춘들은 결국 타자,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연민을 조금씩 뚫고 나오는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덜 비관적이며 건강한 인물들이다. 그래서 해방 '일기'가 아닌 '일지'였나 싶다. <버닝>이 일기에 가깝다면 <해방>은 일지다. 현실에서 그 정도 삶은 흔할 것 같은 염미정이 구 씨라는 극한의 인물을 만나 자기 해방을 성취한다는 해방론은 설득력, 개연성이 좀 떨어지기도 하는데, 흔하고 쉬운 사랑 대신 낯설고 어려운 추앙을 선택해 '좋아하니 변하라'라는 충고와 간섭 대신 당신이 앞으로 어떻게 변하고 살지 모르지만 이유 없이 너를 '응원'하고 '지지'한다라는 더 큰 개념에 대한 장치로 이해했다.     


<나의 해방 일지>의 대사가 일상생활에서 잘 쓰이지 않는 단어, 대화, 독백 같은 내레이션으로 연극 대사 같다는 느낌이 많았다면 영상이나 연출은 영화적 코드가 많았다. 클로즈업과 줌인 아웃 근접 촬영, 히치콕 영화 같은 공포 영화에서 보던 신체의 특정 부위나 대상 일부분만 확대한 초밀착 촬영 같은 것도 인물의 심리, 감정, 사고를 독백이나 대화 속에 담아 작가가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도스토옙스키적인 표현법과 상통한다.

잦은 클로즈업이 작가의 생각을 너무 직접적으로 주입시키는 피로함이나 강요로 다가올 수 있는데 그런 단점을 잊을 수 있게 만든 게 풍경의 롱 샷, 롱테이크 아닌가 싶다. 직접적 대사에 인물은 근접 촬영 위주로 풍경은 원경, 시적으로 잡는 대조적 촬영과 연출이 이 드라마에 흡입하게 할 수 있는 좋은 점 중 하나였다. 무거운 주제 속 코믹한 대사, 시적이고 상징적인 영상 속에 소주병 샷과 로봇 등장 신 같은 병맛 코드 등 진지함과 코믹한 요소를 의도적으로 적절히 잘 배분한 것도 좋았다.     



판타지와 현실-추앙에서 해방, 해방에서 구원까지


<나의 아저씨>가  부인, 엄마의 희생으로 '이보다 온정적이기 힘든' '나의 어른 남자들'로 비로소 지안이 '편안함에 이른', 현실에선 성취하기 힘든 후계동 판타지였다면 <나의 해방 일지>는 열린 결말로 훨씬 현실성을 얻는다. 전작에서 이지안의 편안함, 해방이 타인에 의한 영향이 결정적이었다면 <나의 해방 일지>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긴 하지만 스스로 해방되면서 편안함에 이르는 인물상을 그린다. 이는 구 씨와 염미정뿐 아니라 나머지 주인공들의 성장 또한 마찬가지다.     


삶의 의미를 잃은 자가 도피하다 우연히 가게 된 끝의 장소 당미역으로 가는 길엔 <해방 교회>가 있다. 그 벽엔 이런 문구가 있다.

"오늘 당신에게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꾸역꾸역 소몰이하듯 오늘 하루도 버텨내고 있는 나와 당신들에게 저 말이 설렘으로 다가와 살아내는 일상 말고 '살아나는' 생을 드디어 맞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게 이성적 사랑이든 우정의 관계든 이런 추앙의 대상 하나 있기를 바란다. 당신들도 나도.

ㅡ한 번 만들어 보려고요. 그런 사람. 상대방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거에 나도 덩달아 이랬다 저랬다 하지 않고, 그냥 쭉 좋아해 보려고요. 방향 없이 사람을 상대하는 것보단 훨씬 낫지 않을까. 이젠 다르게 살아보고 싶어요.     

ㅡ누구랑 있으면 좀 나아 보일까. 누구랑 짝이 되면... 그렇게 고르고 골라놓고도 그 사람을 전적으로 응원하지는 않아. 나보단 잘나야 되는데 아주 잘나진 말아야 돼. 전적으로 준 적도 없고, 전적으로 받은 적도 없고. 다신 그런 짓 안 해. 잘 돼서 날아갈 것 같으면 기쁘게 날려 보내 줄 거야. 바닥을 긴다고 해도 쪽팔려하지 않을 거야. 세상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해도 인간 대 인간으로 응원만 할 거야. 부모한테도 그런 응원 못 받고 컸어, 우리.”



생각나는 영화, 글


영화-니콜라스 케이지의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소설- 권여선의 <<주정뱅이>> 중 <봄밤>   

  

드라마 회차마다 좋은 대사가 워낙 많았지만 그중에 특히 계속 곱씹게 되던 대사 몇 옮기며 긴 글 마친다.     


-어느 지점을 넘어가면 말로 끼를 부리기 시작해. 말로 사람 시선 모으는 데 재미 붙이기 시작하면 막차 탄 거야. 내가 하는 말 중에 쓸데 있는 말이 하나라도 있는 줄 알아? 없어, 하나도. 그러니까 넌 절대 그 지점을 안 넘었으면 좋겠다. 정도를 걸을 자신이 없어서 샛길로 빠졌다는 느낌이야. 너무 멀리 샛길로 빠져서 이제 돌아갈 엄두도 안 나. 나는 네가 말로 사람을 홀리겠다는 의지가 안 보여서 좋아. 그래서 네가 하는 말은 한마디 한 마디가 다 귀해.

ㅡ모든 관계가 노동이에요. 눈 뜨고 있는 모든 시간이 노동이에요.      

-내성적인 사람은 그냥 내성적일 수 있게 편하게 내버려 두면 안 되나

-배우는 건 그만하고 싶어. 수영을 배우는 데, 자유형이 안 됐어. 근데 여럿이 하는 거니까 배영으로 넘어가고, 평영으로 넘어가고, 학교 수업이랑 같아. 난 구구단을 떼지 못했는데, 분수로 넘어가고. 그 뒤로 난 그냥 앉아 있는 거야. 동호회에서도 똑같은 짓 반복하기 그렇잖아. 그리고 나는 뭐 재밌는 게 없어.

-제가 너무 힘들어서. 밤만 되면 이 팔다리랑 목을 다 분해해서 깨끗하게 기름칠하고 아침에 다시 끼우고 싶다니까요.

-이상하게 마주 보고 앉는 게 불편하더라고. 사람을 정면으로 대하는 게 뭔가 전투적인 느낌이야. 공백 없이 말해야 된다는 것도 그렇고. 어딜 가나 속 터지는 인간들은 있을 거고, 그 인간들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거고, 그럼 내가 바뀌어야 되는데 나의 이 분노를 놓고 싶지 않아. 나의 분노는 너무 정당해. 이 분노를 매번 꾹 눌러야 되는 게 고역이야.

-생각해보니까 그런 사람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내가 좋아하는 것 같은 사람들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다 불편한 구석이 있어요. 실망스러웠던 것도 있고, 미운 것도 있고, 질투하는 것도 있고, 조금씩 다 앙금이 있어요. 사람들하고 수더분하게 잘 지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진짜로 좋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혹시 그게 내가 점점 조용히 지쳐가는 이유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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