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는 사람 Jun 20. 2023

이런 아저씨 없습니다.

<나의 아저씨>


어쩌다 보니 박해영 작가의 드라마 리뷰를 두 편 쓰게 됐다. <나의 해방일지>와 <나의 아저씨>.

오늘 글은 몇 년 전 쓴 글인데 어떤 책을 소개하는 글 중 이 드라마에 대한 언급이 있어 찾아봤다. 종영 2회 차 남기고 몰아보며 쓴 글이고 시간이 지난 지금은 그때와 다른 생각, 감상이 생겼지만 다시 읽고 수정하기엔 긴 글이라 그대로 올린다.


오랜만에 엄마와 같이  드라마였다. 뉴스를 빼고는 엄마와 tv 코드가 맞는 부분이 거의 없어 같이 앉아서 tv를 볼 일이 거의 없다. 기껏해야 <나는 자연인이다> 정도인데 이제 진짜 자연인들은 더 깊은 숲으로 숨었거나 웬만한 자연인들은 방송을 다 탔는지 어쩌다 봐도 옛날 같지 않아 보지 않은지 한참 됐다.


그 연배에서는 꽤나 진보적인 노친네도 드라마 취향은 대게의 아줌마들이 욕하면서 본다는 '근친 애정, 핏줄 복수극'의 고정 시청자다. 그러니 핏줄에도 애정에도 냉소적인 메마른 나와 나란히 앉아 같은 드라마를 볼 일은 거의 없는 것이다. 그런 모녀가 별 이견 없이 비슷한 정서로 본 드라마가  <디어 마이 프랜(노희경)>, <유나의 거리(김운경)>다. 그리고 한참 만에 <나의 아저씨>를 나란히 앉아서 봤다.


'난 다큐나 뉴스 말고는 안 봐'라며 드라마 보는 사람을 무뇌아나 시간 낭비자로 무시하는 사람이 그다지 고매해 보이지는 않는다. 때로 드라마 속 짧은 대사는 어떤 뉴스나 정치 가십보다 현실의 내 외면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며 어떤 휴면 다큐보다 깊은 감동과 울림을 주기도 한다. 뭘 보느냐보다는 자기가 본 것에서 뭘 발견하고 느끼냐가 중요한 것 아닐까.


<서울의 달> <파랑새는 없다> <유나의 거리>를 쓴 김운경 작가의 드라마를 좋아했는데 <나의 아저씨>는 좀 젊어진 김운경 작가가 요즘의 도시 노동자, 빈민을 그렸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은 드라마였다. 낮은 자들에 대한 애정, 비극 속에서 뽑아내는 희극, 짧게 나오는 단역 하나하나도 그 쓰임과 가치를 허투루 하지 않고 선명한 캐릭터를 부여하는 것 등이 그랬다.


대사가 인상적인 것들이 많아 메모해 두기도 하고 극 중 어떤 상황들은 최근 사회면 기사의 비극적 내용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도 있어 연계해서 생각하기도 했지만 포스팅하겠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다. 오랜만에 보는 재밌는 드라마의 시청자 역할만 충실히 했는데 SNS 친구 한 분이 드라마 매 회마다 그 감상과 극 중 대사를 올리는 게 인상적이었다. 나도 불현듯 종영 2회를 앞둔 이 드라마에 대해 한 번 쓰고 싶어졌다.



웬만한 스님보다 많은 사리가 나올 도덕주의자


여, 남주인공 둘의 나이 차이가 20 살이 넘는다는 이유로 '롤리타' 공방도 많았는데 단지 딸 같은 나이 차, 인간적 호감을 가진 대상이 이성이라는 외형적 이유만으로 롤리타 운운하는 건 좀 편협해 보인다. 예전에 안판석이 만든 '밀회'에서 유아인과 김희애의 사랑을 '원조교제'라고 간단히 비난하는 것이 불공평한 것처럼 말이다.


사람 감정, 세상 이치가 잘 드는 칼로 자른 무 양쪽 같지도 않을 것이고 젠더나 ism(이념)만으로 인간의 다면을 다 정의할 수도 없을 것이다. 냉혹한 세상과 인간들 속에서 한 삶을 살아온 손녀 가장이 처음으로 자신을 같은 사람으로 대해주고 이해해 준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게 하필 나이 많은 남자였다면 고마움 속에 사랑이 스며들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랑해서 매일 보는 사람도 있지만 매일 보다가 사랑하게 되는 사람도 있는 것처럼.


드라마나 영화 속 남자 주인공들 대부분은 매력과 능력을 겸비했지만 불우한 가정사로 출세지향적이고 삐뚤어진 나쁜 남자 유형이거나 보호본능 일으키는 우유부단한 베르테르다. 그런데 박해영의 박동훈은 완벽하다. 따뜻하고 성실하고 겸손하며 도덕적인데 소신도 있고 능력까지 갖췄으니 감독이 도덕 강박, 완벽한 인간 콤플렉스가 있나? 싶을 정도다.


이 세상에 있지 않을 것 같은 진짜 어른 박동훈은 능력이 있지만 자기 능력을 욕심내지 않는다. 동생 표현으로는 "야망(욕망)은 있지만 항상 야망과 양심 사이에서 양심 쪽으로 만 가는 불쌍한 놈"이다. 본인은 자기가 특별히 양심적인 인간이라 그런 게 아니라 유혹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것일 뿐이라 자조하지만 드라마를 보면 산골 절의 스님도 유혹에 이보다 강하긴 힘들지 싶다.


누구를 내려치고 올라가는 게 싫어서 승진에도 관심 없는 유약한 인간인 줄 알았더니 회사 영업 이익을 위해 재건축 대상 허가를 적당히 심사하라는 상사에게 "건축 구조기사는 경제, 정치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건물 역학 구조적으로만 판단한다"는 강단과 소신도 있다. 절로 들어간 스님 친구가 속세의 연인이었던 여자와의 해후로 흔들린 마음을 진정 지키느라 면벽 수행할 때 유혹으로 가득한 도시 속에서도 박동훈은 한결같다. 피 끓는 20대 청년 시절 남녀 단둘이 몇십 날을 지방 여관을 떠돌며 동숙해도 손 하나 잡지 않던 인간이라 칭송받고 딸 같은 어린 여자가 동정심과 동병상련의 동질감으로 들이대도 "미친년"이라며 꿈쩍 않는, 사리가 몇 가마니나 나올만한 도덕주의자다. 오죽하면 못 망가뜨려 안달이 난 적군이자 마누라의 불륜남까지 "박동훈은 그럴 인간이 아니다"라고 할까.


만민 연민주의로 대단한 절제력과 도덕성을 보이는 박동훈의 감정에 일말의 이성적 감정, 흔들림도 없는 것인가? 에 대한 보이지 않는 부분의 해석까지 물고 늘어져 롤리타 어쩌고 저쩌고 하는 건 좀 강박이거나 치사스럽다. 서경덕이라도 보고 싶은 겐가.


우리가 남이가? 가족 공동체, 동네 공동체? 알고 보면 가정파탄범!


절박한 순간에 위급한 목숨을 빨리 발견하고 살리는 것은 먼 법이나  기보다 가까운 이웃일 거다. 그러나 <다니엘 블레이크>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의 어린 남매들, 송파 3 모녀 자살, 고독사 같은 사건들은 그들에게 따뜻한 이웃의 부재보다는 현실적인 제도가 없어서였다. 개인의 온정주의가 비극적 개인을 구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제대로 된 시스템과 제도 안에서 온정 주의가 만날 때 절박한 개인을 구제할 수 있는 것이다.


안판석과 김원석은 똑같이 인간의 선의를 긍정하지만 그 선의의 해석이나 세계관이 갈리는 게 이런 지점이다. 안판석이 부조리와 위선을 물고 늘어지며 진정한 성찰이나 발전은 자기모순을 인정하고 까발려진 다음이라고 말할 때 김원석은 가족주의, 동창, 동네 공동체 같은 소 공동체의 온정주의로 간다.

김원석의 온정주의는 '지질한 인간은 있어도 악한 인간은 없다'는 식으로 표현된다. 지질한 것들끼리 모여 지질함을 어깨동무하며 강강술래 하는 온정주의다. 이 드라마에서 온정주의의 감동과 교훈에 동참하는 것은 '남자' 동기, '남자' 형제들이다. 남자들이 혈연의 끈끈함을 나누고 친구들과 의리와 우정을 확인하는 감동을 만들 때 여자들은 친구도 가족도 없이 음식을 만들거나 나르며 터지는 가슴을 칠 뿐이다.


후계동이라는 후미진 골목에서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모여 동창과 동네 주민과 직장 말단 사원까지 걱정하며 마시고 부어라 하며 모두들 동네 공동체, 가족 만사주의에 뻑 갈 때 그들의 자식과 마누라는 매일 과부나 한부모 가정 아이처럼 지내지는 않을까?

남편과 아버지를 찾지 않고 '아낌없이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하면서도 백만 송이 장미를 피워낼 수 있는' 사람은 엄마 고두심, 퇴근할 집과 기다리는 가족이 없는 술집 마담 정희만 가능한 일이다. 그리하여 그들과 어울려 '마더 테레사'처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아낌없이 퍼 줄 수 있다. 그런데 후미진 동네의 따뜻한 남자들, 그들의 가정도 그렇게 따뜻할까? 따뜻하기 그지없는 그들은 다른 면에선 가정파탄범이다. 집 밖의 모두를 사랑하고 포용해서 따뜻함 대회에 나가서 1등 못하면 억울할 박동훈의 아내가 시댁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헌신하고도 외롭고 서러워서 바람나게 한 '가정파탄범'들인 것이다.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가족, 동네, 동료애로 칭해지는 핏줄과 지연으로 맺어진 감정, 감상적 소공동체가 인생 고난의 만사형통제처럼 표현되는 게 불편하면서도 '묻지 마 내 가족' 식의 제 혈연만이 아닌 '이웃'에 대한 관심에 환호하는 게 현실에선 부재하는 것들에 대한 보상 심리, 대리만족 같기도 하다. 고두심이 제 핏줄이 아닌 정희를 보살피고 보듬을 때, 처음 본 동훈의 친구들인 동네 어른들이 어두운 밤길의 지안을 혼자 가게 하지 않고 집 앞까지 데려다주며 허술한 집 보안을 걱정할 때는 박해영이 말하고 싶은 인간 온정주의를 긍정하고 싶어 진다. 이런 형제들, 이런 친구들, 이런 주민들이 또 없다. 세상엔 개저씨 천지라는데 이 드라마엔 '나의 아저씨'들이 넘친다.

주인공의 지난한 삶과 급박한 현실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쓰인 약물 사용과 납치, 도청이 애청과 애정으로 발전하는 설정은 현실적 대사와 공감을 차감시키는 불편한 요소였지만 드라마적 도구로 이해할 수 있었다. 스토킹과 폭력을 일삼던 사채업자가 사실은 우정과 애정, 혹은 애증 사이에서 나온 자학성 가해 폭력이었다는 '누구나 알고 보면 다 불쌍해' 같은 부연이 스토킹, 사채 폭력의 미화로 보여 오히려 불편했다.

이런저런 불편함과 지적거리에도 이 드라마를 챙겨 보게 된 이유는 울림이 있는 대사, 문학적인 연출, A급 출연료를 받는 대스타 하나 없지만 작은 단역들도 다 제 몫을 충실히 해내는 고른 연기, 그런 연기를 존재하게 해 준 극본과 캐릭터의 힘 때문일 것이다.

또 여자 주조연의 캐릭터가 각자의 상처를 안고 있지만 그 상처에만 매몰돼 있지 않고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과 주변을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간 가난한 여자 주인공은 키다리 아저씨 같은 남자의 도움으로 짜잔~하고 구원되거나 이리저리 휘둘리는 답답한 캔디였다면 이지안은 키다리 아가씨, 킬러 같은 모습으로 제 삶과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지키려고 애쓴다.

그간 드라마 대사 중 기억에 남아 메모해 뒀던 것을 옮기며 마친다.


ㅡ경직된 인간들은 불쌍하다. 상처받은 아이들은 너무 일찍 커버린다. 그래서 불쌍하다. 지난날을 알기가 겁난다.
ㅡ어떻게 하면 월 5~6백을 벌어도 저렇게 지겨워 보일 수 있을까. 성실한 무기징역수처럼 꾸역꾸역.
ㅡ누가 욕하는 거 들으면 그 사람한테 전달하지 마. 어른들 사이에선 모른 척하는 게 의리다. 내가 상처받은 걸 아는 사람 불편해. 보기 싫어.
ㅡ인생도 내력과 외력의 싸움인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있으면 버티는 거야, 나라고 생각했던 것들에 금이 가면 못 견디고 무너지고, 나라고 생각했던 것들, 나를 지탱하는 기둥인 줄 알았던 것들이 사실은 내 진정한 내력이 아닌 것 같고.
ㅡ어리다고 세상이 안 힘들지는 않았어.
ㅡ기타노 다케시가 한 말이 있어. 아무도 안 볼 때 쓰레기통에 쳐 박아 버리고 싶은 게 가족이라고.

"잘 사는 사람들은 좋은 사람 되기 쉬워."

이 말이 나오는 아래 영상은 개인적으로 이 드라마에서 대사와 영상미의 조합이 좋은 '베스트 샷'으로 꼽는 장면 중 하나다.

https://naver.me/5OmwMrqv


사족 1) 드라마 속 사회 복지의 맹점


이 드라마에는 현행 사회복지의 맹점이 나온다. 손녀가장 이지안은 직업과 수입이 불안정하며 월세를 사는 도시 극빈자다. 복지법을 잘 몰라도 드라마 속 환경만으로도 주거 지원과 할머니의 의료 지원을 받아야 하는 기초 수급 대상자다. 그런데 현행 복지법상 미혼의 성인 여성이 부모와 같이 살면 드라마 속 이지안 같이 열악한 환경인데도 사회 복지의 지원을 받을 수 없다. 주택 지원을 받을 수 없어 월세 이사를 자주 다녀야 하고 의료비 지원을 받을 수 없어 밀린 요양비를 내지 못해 병원에서 야반도주한다.

지안은 식당 설거지 등의 일당직을 전전하다 운 좋게 박동훈이란 인사 담당자를 만나 저학력과  전과 기록의 신상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선 불가능한 대기업 인턴사원이 된다. 직장 내 차별은 있지만 이전 직장과 달리 최소 최저 임금 이상의 고정 수입이 생겼을 거다.

지안 본인의 처지만으로도 기초 수급이 돼야 하지만 이 최저임금 발생으로 인한 '부양의무자 기준' 때문에 병원비가 밀려 야반도주해야 하는 상황인 거다.

이런 현실을 나는 '출가 내인 차별법', '출가 외인 우대법'이라 부른다. 지안과 같은 환경에서 지안이 결혼한 기혼의 가장이었다면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많이 완화된다. 언젠가 장관 청문회 때 장관 후보의 엄마가 기초 수급자가 될 수 있었던 게 화제가 됐는데, 이런 출가 내/외인 차별법 때문이다.


지안 같은 처지의 계급에 속한 사람들은 저런 정보에 취약하고, 실지로 현행 복지법의 기준이나 적용이 까다롭고 지역과 복지 담당 공무원에 따라 이얼령비얼령인데다 복지법 열람도 폐쇄적이라 정보 접근도 어렵다.

드라마에서 박동훈이 할머니와의 '주소지 분리로 의료 수급을 받을 수 있다'는 정보를 알려 주면서

 "이런 거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냐?"라고 하는 대사가 나온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 바쁜 사람들에게 그런 '고급 정보'를 알려 줄 만한 인맥은 없다. 이런 게 '정보의 선점'이다. 실지로 저런 수혜를 누릴 필요가 없는 사람들은 알 수 는 걸 정작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은 그런 게 있다는 거 조차 모르고, 알고 난 뒤에도 너무 복잡한 조건과 서류 준비에 드는 시간으로 일당을 며칠 날려야 겨우 구할 수 있는 거, 그러고도 '가난증명'을 분기마다 해야 하고 수시로 범죄좌처럼 금융조회 당해야 한다.

이 드라마가 판타지 같은 박동훈과 그의 가족, 동네 주민들에 의한 이지안의 갱생이 아니라 이런 시스템을 좀 더 건드렸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https://naver.me/FGS2afND


사족 2);

제주도 전원생활 판타지인 <효리네 민박>을 유튜브 클립 영상으로 종종 봤었다. 게스트로 아이유가 나온 적 있는데 효리네 거실과 마당에서 책 읽는 장면이 자주 나왔다. 그런 장면 중 내 눈길을 끄는 책이 있었는데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었다.

알다시피 그 책은 가난한 과부의 장남 대학생이 지방에 계신 어머니 연금과 여동생 과외 알바로 근근하고 구차하게 생명을 보존하다 자기 물건을 저당 잡힌 악독한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기 전후의 심리를 집요하게 묘사한 책 아닌가.


이 드라마에서 아이유는 사채 업자의 폭력에 시달리다 정당방위성 우발적 살인 전과를 가지게 된 역할을 맡았다. 효리네 촬영할 때 이 드라마 계약을 한 시점이라 아이유 나름의 인물 해석을 위한 공부인지 우연한 독서인지는 모르지만 문득 생각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