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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는 사람 Jan 18. 2019

시간과 마음을 흘리는 일

나를 먹여 살려야 되는 곳에선 내가 자주 사라졌다.

  오늘 읽기 시작한 <중년 독서> 속에서 까뮈의 부조리를 읽다 보니 이창동의 영화 <버닝>이 생각났다.


...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 화, 수, 목, 금 이 행로는 대개의 경우 어렵지 않게 이어진다. 다만 어느 날 문득 '왜'라는 의문이 솟아오르고 놀라움이 동반된 권태의 느낌 속에서 모든 일이 시작된다..... 설사 시원찮은 이유들을 가지고서라도 설명할 수 있다면 그 세계는 낯익은 세계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돌연 환상과 빛을 잃은 세계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 이방인이 되었음을 느낀다. 이 낯선 세계로의 유적에는 구원이 없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잃어버린 고향의 추억도 약속된 땅의 희망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과 그의 삶, 배우와 무대 장치의 절연, 이것이 다름 아닌 부조리의 감정이다.
 
<중년 독서>. 이지상. arte. (2019). 72, 73쪽
ㅡ저자가 <시지프스의 신화>.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번역. 책세상. (2010)에서 인용한 것을 재인용함.


  <버닝>의 해미는 빛을 잃은 세계의 반복된 일상에서 그러려니 살 어느 날 문득 '왜'라는 절실함이 생겨, 낯선 이방인이 되 환상과 빛 속으로 자발적 실종자가 된 걸까? 고향의 추억도 약속된 희망의 땅도 없던 그녀는 리틀 헝거로서의 역할 대신 끝내 '낯익지 않은'  이 세상이라는 무대와 절연하고 그레이트 헝거가 되어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라진 것일까?

영화 <버닝>

 영화 <버닝>엔 주인공 해미가 '헝거(굶주린 자)'에 대해 말하는 장면이 몇 번 나온다. 위장이 허기진 사람은 '리틀 헝거' 영혼이 허기진 사람은 '그레이트 헝거' 부른다. 해미는 영혼이 허기진 자가 '진짜로 배고픈' 사람이며 그는 '삶의 의미에 굶주린'자, '삶의 의미를 캐는' 자라 한다. 해미에게 그레이트 헝거는 '지는 노을'의 이미지와 연결되는데 그것은 '사라짐'이다. 노을처럼 사라지는 것, 아예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는 것. 원래 없었던 것을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없었다는 것을 잊는 것.


  까뮈는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인생이 살 만한 것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것이 철학적 근본 질문이며 살 만한 의미를 찾지  했을 때의 유일한 답은 '자살'이라고 했단다. 이 세상에서 스스로 사라지는 것.

  <버닝>에서 이 사라짐은 태우는 것으로 표현된다.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 노을이 타면서 지는 것. 태운다는 것은 그 근원을 없애는 것이다. 다 태워서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게 하거나 사라지는 것.  해미는 삶의 의미를 캤으나 살 만한 의미를 찾지는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속 실종의 진실, 이창동의 의도가 무엇이건 내게 해미의 실종은 자살로 여겨진다. 살아나는 삶이 아니라 살아내는 삶은 죽은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라는 생각 따위가 여행자의 낭만적 감상이라면, 의미를 캐 낼 여유도 생각도 없이 반복적 일상을 열심히 지루하게 살아가는 게 생활인의 현실일 것이다.


  해미가 지는 노을과 그레이트 헝거를 얘기하며 울먹거리던 장면에선 살아내느라, 살아나는 걸 잊고 그저 살아가던 나도 가슴 저 밑에 묻어두었던 어떤 감정이 떠올라 잠시 잠깐 같이 울컥했다. 와중에도 메마른 내 감성은, *무엇을 하는진 모르나 돈은 엄청 많은 '위대한 개츠비' 류인 금수저 남자의 권태에 순응하는 해미 삶이 그녀의 절절한 그레이트 헝거론과 상반된다는 딴지를 자꾸 걸고 있었다.

(*속 문장은 영화 속 종수의 대사)


  언젠가 탤런트 윤여정도 지는 노을을 보며 '사라짐'에 대해 얘기했다. 아름답고 젊은것들이 이국의 절경 해변에서 타는 듯 지는 노을에 감탄사를 연발할 때 윤여정은 '슬프다'라고 했다.

"모든 것은 언젠가 저물게 돼. 젊을 때는 아름다운 것만 보이지만 늙으면 아름다움 속에서 슬픔이 보여"

평소 '슬픔 없는 아름다움은 가'라며 슬픈 미학을 편애하던 나는 그 노배우의 말에 깊이 공명했었다.   



  나를 먹여 살려야 되는 도시에선 내가 자주 사라졌다. 어느 순간 내가 사라진다고 느끼던 것 사라지는 것 '같다'라고 여기다가 어느 날부턴가 사라진 나도 모른 채 그저 습관적으로 살고 있는 내가 돼 있었다. 살던 곳을 떠나 살던 곳과 별로 닮지 않은 길을 걸을 때면 문득문득 그런 자발적 사라짐의 욕망이 불현듯 일기도 했다.

  '이렇게 걷다가 걷다가 문득 사라졌으면-'

그런 하루의 사진 몇 장과 메모다.


숲 안내 표지판을 읽고 있던 홀로 여행객


  이 숲에서 두 시간 반쯤 걷 돌아 나왔다. 그날 저곳에서 본 사람은 다섯 명이 전부 다였고, 부부로 보이는 한 팀 빼고는  나를 포함한 넷이 다 홀로 여행객이었다. 시끄러운 인간 숲과 세상을 피해 온 네 사람. 그들에게 왠지 모를 동지애, 동류 감이 생길 뻔했다.

  저 청년은 길 초입에서 가장 먼저 본 산책객으로 나와 그의 동선과 걸음 속도가 비슷해 앞서거니 뒤서거니 말없이 걸었다. 한 시간쯤 그렇게 걷다가 갈림길에서 청년은 왼쪽으로 빠졌다.




  한 시간 반쯤 걷다가 시간을 보니 여기서 왔던 만큼 더 걸어야 산이 나오고, 산을 넘다가 해가 질 것 같아 돌아섰다. 이곳에 세 번을 왔는데 번번이 산을 못 가고 돌아 나왔다. 한 번은 입산 금지 시기였고 한 번은 동행들이 내켜하지 않아서, 이번은 시간이 안 맞아서 돌아섰다. 다음엔 꼭 산을 넘어가리라-는 거칠고 기약 없는 다짐만 또 실없이 흘리고 나왔다.


  어릴 땐 좀 더 많은 곳, 안 가본 곳을 쫓아다녔는데 나이가 드니 구태여 새로운 곳보다는 좋았던 곳의 다른 계절이 더 궁금했다. 세월은 '새로운 것'에 대한 흥미보다 익숙한 것에 대한 편안함에 기대게 한다. 나이 들면 새로운 관계와 인맥을 쫓고 만드는 것보다 오래 좋아하고 알던 사람이나 더 잘 챙기자 싶은데 여행도 그리 되는 것일까? 사람도 그렇고 글이나 여행도 그렇고, 뭐든 새로 '뜨는 곳(것)'에 대한 흥미와 기력보다는 이미 알고 보고 느낀 것을 더 되새기고 챙기는 것이 오히려 편하고 의미 있게 다가온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계획 없이 걷는 것이 이 여행의 계획이었다. 그렇게 걷고, 타다 보니 길에서 흘린 시간도 많았다. 밥과 돈으로 연결된 도심에선 시간을 '흘린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실천하기도 힘든 일이다. 도심에서 가장 흘리기 쉬운 게 돈이라면 가장 흘리기 어려운 건 시간과 마음이다. 하여, 가끔 내가 사는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선 시간도 마음도 허술하게 방심하는 나를 안심한다.

  10분 전에 간 버스는 1시간 20분 뒤에나 온다고 했고, 나는 저기 보이는 유리 부스 정거장 의자에서 시간과 마음을 또 흘렸다. 읽다 만 책을 펼쳐 글자들을 주워 담았다.



  만추의 풍경으로 입동을 지난 시기인 18년 11월 이곳은 단풍 끝물과 헐벗기 직전의 나무 숲인데, 4년 전 9월의 이곳은 여름처럼 푸르고 무성하구나..

  4년 전 여행 메모엔 이런 게 적혀있다.

ㅡ숲 안쪽으로 이렇게 구부러진 길을 멀리서 보고 있으면, 숲이 나를 부르며 들어오라고 안쪽으로 손짓하는 같다.
'다시 저 밖으로 돌아가지 못할 이 안으로 들어와'

숲은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이 좋고, 사람은 뒷모습이 좋다. 정면은 연출되거나 표정을 감춘 무표정이라면, 뒷모습은 무표정 속의 본심 같은 게 느껴진다. 표정이 보이지 않는 뒷모습은 다 보이는 앞모습보다 연민이 내려앉기도 좋은 장소다. 정면과 바삐 가는 신발 코가 '남의 발목을 잡으러 가는' 피로라면 처진 어깨, 힘 빠진 발뒤꿈치는 ‘잡힌 발목, 내 발등 내가 찍은’ 모습 같아 안쓰럽다.


  그날 시간과 마음을 흘리며 길에 앉아 주운 글 속엔 이런 게 나온다.

한나라의 매복이 꽃나무를 심었는데
못 가운데서 꽃이 피자 이렇게 탄식하였다.
"삶은 나의 괴로움이 되고 몸은 나의 질곡이 되며, 형形은 나의 치욕이 되고 아내는 나의 누가 되는구나."
그러고는 드디어 아내를 버리고
홍 애산으로 들어가버렸다.
ㅡ『하씨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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