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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는 사람 Mar 06. 2019

앉아있는 남자들

베트남 여행 1


  박항서, 북미 회담 관련한 베트남 현지 뉴스를 자주 보다가 몇 년 전 갔던 베트남 여행 메모를 뒤적였다. 며칠 짧게 다녀온 단편적 감상으로 한 나라의 인상을 말한다는 게 조심스럽고 부적절하게 느껴진다. 어쩌다 이 글을 보게 되는 분들은 뜨내기 여행(관광) 객의 눈으로 본 얕은 시각과 생각, 개인적 기록임을 양지하고 봐 주기 바란다. 또 이미 몇 년 전에 본 것이라 일 년이 다르게 급박하게 변하는 세상에서 내가 그때 본 것들이 그동안 많이 달라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진은 모두 폴드 폰으로 날씨 흐린 날, 차 속에서 찍은 것 많아 화질이 안 좋음을 미리 양해 구한다.

 

  베트남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자동차보다 많은 오토바이 행렬도, 공산 국가 도심에 서구 유럽풍 건물, 중국과 일본식 건물, 현대 자본주의 건물이 자국 전통 건물과 혼재돼 있다는 것도 아니었고,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에 등록됐다는 빼어난 풍광도 아니었다. 물론 그런 외적인 인상도 며칠 머무는 관광(여행)객 눈에는 흥밋거리였으나 몇 년이 지난 지금 누가 내게 그곳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 하나를 꼽으라면 ‘앉아있는 남자들’이라고 말하겠다. 도심 시가지뿐 아니라 변두리 동네, 농가를 막론하고 보게 되는 광경이 바로 ‘앉아있는 남자’들이었다. 서 있거나 움직이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집 대문 앞에도, 상가 앞에도, 골목에도, 시장 좌판에도, 노상에도 앉아있었다. 

처음에는 더운 나라라 집보다 조금이라도 시원한 거리에 나와 있는 게지, 집에 냉방시설이 잘 안 돼 있어서 그런 게지... 이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앉아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남자들, 그것도 젊은 남자들이었다. 서서 뭘 하거나 바쁘게 움직이는 건 여자들이고, 심지어 시골 논밭에서 농사짓는 사람들도 여자가 많았다. 간혹 젊은 여자나 할머니도 있었지만 열에 아홉은 젊은 청, 장년층 남자들이었다.  가는 데마다 '앉아있는 남자' 들이 참 많았는데 심지어는 경찰로 보이는 사람들조차 시장이나 상가 같은 곳에서는 앉아있더라!  신기하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해서 가이드한테 물었다.


  “이 나라에는 왜 저렇게 앉아있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게다가 여자들은 안 보이고 남자들만 보이네요. 그것도 한창 일할 젊은 남자들이?"

  "베트남은 외세의 침략이 많아서 남자들이 전쟁에 많이 끌려갔습니다. 남자들이 오랜 세월 전쟁터에 가 있으니 엄마들이 생활의 가장이 되는 가정이 흔했고, 종전 후에도 측은지심과 보상적 차원에서 그간 전쟁터에서 고생한 남자들을 좀 쉬게 하자던 분위기가 지금까지 이어오게 된 것입니다."    

  전쟁 중에 남자들이 많이 죽었고 종전한 지가 몇십 년밖에 안 돼서 나이 든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전쟁 당시 전사자 대부분이 20대 중후반 젊은이라 생존했으면 7, 80대 노 세대란다. 당시 청년 대량 사망으로 현재 노인 부양 걱정이 없고 경제 원동력이 청, 장년 세대가 많 베트남의 강력한 발전 요소가 됐다니 과거의 비극이 미래적 희망이 된 슬픈 반전 역사다. 그런 분위기 속에 여자들의 '친정'에 대한 의무와 책임감이 너무 강해서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닌 여성 한 명이 온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이 흔하단다.


  얼핏 제주도 역사와 여성들의 삶이 떠올랐다. 남자들이 공물과 군역에 차출되거나 그것을 피해 육지로 달아나면서, 남은 여자들이 땅과 바다를 넘나들며 가장 역할을 하게 된 것이 제주에 여자와 해녀가 많은 배경이라고 하지 않은가.

  베트남에 오래 산 한국 남자 중 현지 여성과 결혼한 이도 종종 있지만 오래 못 살고 이혼하는 상황도 많은데 언어나 문화적 차이보다는 그런, 친정에 대한 '경제적 부담'이 갈등과 불화로 이어져서란다. 예전의 우리 딸들의 삶도 그랬다. 맏딸은 집안 밑천이라고.... 어릴 땐 동생들 다 챙기고 살림하다가 좀 크면 저는 중학교 겨우 나와서 남자 형제들 공부시키고 가발공장, 신발공장, 발 잘 못 디딘 화류계에서 몸 바쳐 번 돈을 집에 부치던 그런 시절....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 나오는 주인공 로쟈도 고향에 계신 어머니의 유족 연금과 여동생이 성추행당하면서 번 돈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받는 얘기가 나오기도 하니, 집안의 여자들이 돈 바쳐 몸 바쳐 남자들을 지원하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한 공통된 사항인가 보다.


  베트남 북부 쪽은 엄친 딸들이 많아서 고등교육에 좋은 데 취직도 많이 하지만 남부나 시골 쪽은 아직도 초, 중학교 겨우 마치고 바로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온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실질적 가장들이 많단다. 우리가 갔던 안마소 여성들도 한 달에 두어 번 고작 쉬고, 종일 사람 주물러 번 돈 전부를 집에 부친다고 했다. 우리와 좀 다른 건 여성과 남성의 경제적, 산업적 차별이 별로 없다고 했다. 모계 중심 사회에서 경제권을 여성이 쥐고 산 문화가 오래되어서 그런지 베트남은 고위직, 큰 기업체여성 진출이 많으며 임금에서도 차별이 없고 공사장 같은 데서는 여 임금이 훨씬 많기도 하단다.


  외세와 열강에 자주 시달리면서도 나라를 지켜냈고 사상적 분단으로 자국민끼리 서로 죽이고 망하게 한 역사는 우리와 많이 닮았는데, 원수에 대한 원한은 우리보다 너그러운 것 같기도 하다. 일본 어느 작가는 한국민의 반일 감정을 두고 ‘서른여섯 해 동안 일본에 쌓인 원한을 잊어주는 민족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우리가 일본의 만행에 대해서 오랜 시간 잊지 않고 사죄 요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도 베트남 민족에게 저지른 전쟁 악행에 대해 역사적 사과와 보상을 제대로 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지금 503호에서 식판 밥을 받고 계신 근혜 언니도 그렇게 열심히 봤다는 <태양의 후예>가 국내에서 30%의 시청률을 넘어서고 외국에 한류 바람의 큰 주역으로 활약할 때였다. 한국, 한국 문화에 호감을 보이던 베트남에 정작 이 드라마의 현지 상영에 대해선 찬반이 들끓었다고 한다. 종전 40년이 지났지만 전쟁 당시 한국군에 대한 기억과 트라우마가 해결되지 않은 베트남에서는 군인과 전쟁을 미화한 그 드라마를 마냥 좋은 감정으로 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희생자는 9천 여 명이라고 한다. 9천 명이라고 하니 많은 숫자지만 체감이 잘 안 되기도 하는데 제주 4.3 희생자 수가 진상 규명위원회 집계 상 1만 명 조금 넘으니 그와 비슷하다고 보면 되겠다.(제주 4.3 희생자 수는 당시 제주 인구의 10% 였다고 한다.) 우리 한국군도 참전 군인의 10%를 넘는 사상자와 고엽제 환자 등의 부상사를 냈지만 그것은 참전한 우리 쪽의 비극이고 베트남 사람들에게 한국군은 가해자였다. '평화의 소녀상'을 만든 김서경/김운성 작가는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학살당한 희생자들을 기리고 위로하는 의미로 '피에타 모녀상'을 만들었다. 두 작가를 비롯한 양국의 문화 예술인시민단에선 베트남 전쟁의 진실 규명과 학살에 대한 사과와 반성, 피해자에 대한 보상 및 지원을 촉구하는 연대 운동을 하고 있다는 뉴스를 보았다. 언제나 죄는 거대 조직이 저지르고 그 희생사죄는 개인, 민간인의 몫이 되는 역사가 되풀이되고 있다. 그나마 김대중 대통령이 국가 책임자로서는 처음으로 예의를 갖춘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면서 베트남 국민들의 감정이 다소나마 해소되었다니 작은 다행이다.  말 뿐인 사과로서는 제대로 된 용서를 구하거나 받을 수 없지만 오랜 한 속에 있은 이들에게 진심 어린 말 만의 사과로도 아주 작은 해원(解冤)이 되기도 한다. 

평화의 소녀상과 베트남 피에타, 김서경/김운성. 사진출처-한겨레

  예전에 제주에서 홀로 여행 중 다랑쉬 오름에 오른 적이 있었다. 4.3 사건 당시 경찰과 행정 당국이 민간인들을 굴 속에 넣고 질식사, 강제 화장시킨 집단 학살 현장이 오름 밑에 다. 다랑쉬 정상에서 인근 마을의 이장 할아버지를 만나게 됐다.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를 흥얼거리던 이장님은 도시 여자가 혼자 외진 오름에 있는 것에 대한 신기하고 생소한 호기심을 내비쳤다. 육지 것인 나도 제주 할방과의 대화에 흥미를 느껴 서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고 와중에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 할아버지 주위엔 4.3 희생자가 없습니까?"

  " 왜 없어.  제주는 집성촌 성격이 강해서 내 나이 되면 한 집안에 한 두 명은 다 있지.... 지금이야 방송과 인터넷도 자유롭고 비행기도 다니고 관광객도 많이 드나드니 여기 소식, 육지 소식도 서로 잘 알지만 그때 여기는 갇힌 곳이었어. 신혼여행도 안 오던 시절이었으니까. 밖으로 쉽게 나가지도 못하니 여기 사람들이 그런 일을 당한 것도 외부에 안 알려졌지."

  " 그래도 광주 사람들은 늦게나마 진상 규명이 되고 보상도 어느 정도 됐는데, 여긴 아직 완전히 규명된 것이 아니라 섭섭하고 한이 많으시겠어요."

  " 그랬지. 그래도 노무현 대통령이 사과했잖아. 그때들 마음이 많이 풀어졌어."

  2017년 봄에 제주 강정 마을에도 베트남 피에타가 들어섰다는 소식을 들었다.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다랑쉬 굴이 나온다. 오른쪽은 다랑쉬 오름의 초소 언저리

  한류, 박항서, 우리 국가와 국민에 대한 저들의 호의를 보면서 그게 국민성 특유의 낙천성인지 어제나 내일보다 '오늘, 지금'이 가장 중요하다는 현실 인식인지 궁금해진다. 사람이 내가 살기 위해 일부러 망각하거나, 사과를 받고 간신히 용서할 수는 있겠지만 잊지 않고 용서하기는 힘든 법 아닌가.

  전쟁에서 미국에 패하지 않은 유일한 나라가 베트남이고 인해 전술, 무기력에서도 절대적으로 불리한 이 나라가 중국, 프랑스, 일본의 침략과 지배에서도 다 벗어났다. 참 대단하다! 감탄하다가 그런 저력과 깡의 바탕은 그들이 결코 과거를 쉽게 '잊는' 민족이 아니어서 아닐까?라는 깨침이 들었다. 한편으론 미국의 경제봉쇄를 견뎌낸 나라가 베트남, 북한, 쿠바 정도인데 이제 다 미국과 교류를 하거나 희망 중에 있으니 미국이 얼마나 초강국인 지를 새삼 깨닫게 되어 씁쓸하다.


  베트남 근대사를 조금 들여다보니 외세의 침략과 식민지 통치, 남북 분단..... 등 우리 근대사와 참 많이 닮았다. 그리고 일본이 우리에게 과거사에 대한 정리와 사죄가 없는 것처럼 우리도 똑같은 과오를 저지르고 해결하지 않고 있다. 일본의 역사교육만 탓할 게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 세계사 공부도 다시 돌아봐야 하지 않겠나는 생각도 들었다. 동양사, 세계사를 미국과 유럽의 시각과 관점에서 배우다 보니 오히려 우리 주변 국가인 동남아시아에 대해선 더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는 게 많지 않나 하는...... 베트남 하면 아직도 S라인의 흰 아오자이 옷을 입은 여인을 떠 올리는 사람이 많은 것도 그래서일 거다. 이제 그런 옷도 민속품 가게나 항공사 승무원테서 나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결혼식 같은 잔치 때만 한복을 입는 것처럼.


  과거 386, 486 세대에게 전태일 평전, 철학 에세이와 더불어 주요 금서 중 하나가 '사이공의 흰옷'이라는 베트남 소설이었다고 한다. 베트남 학생운동을 다룬 이야기라는데, 그 소설을 모티브로 한 시가 우리나라 민중가요의 한 곡으로 애창되기도 다. 유튜브서 찾아보니 마침 있어 가사와 함께 올리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한 다발의 삐라와 신문, 감추어진 가방을 메고 행운의 빛을 전하는 새처럼 잠든 사이공을 날아다닌다.
복습은 끝나지도 않고 평온한 밤도 오지 않았다.
내일도 수업시간엔 잠이 오겠지, 그러나 간다.
내일도 내일도 죽음 넘어 뇌옥의 깊은 암흑의 벽에 흰옷의 시를 쓴다.
방울방울 흐르는 선혈 속에 이 흰옷 언제까지나.  
어느 날 사라진 내 모습 어머님의 슬픔과 눈물 사랑하는 사람을 뒤로 한채 그러나 슬피 울진 않는다.
사랑과 신뢰로 이루어진 삶 조국과 동지와 연인에게 굳게 맺은 나의 언약은 생명이 있는 한 변함이 없다.
죽음 넘어 뇌옥의 깊은 암흑의 벽에 흰옷의 시를 쓴다 방울방울 흐르는 선혈 속에 이 흰 옷 언제까지나.

https://youtu.be/YBRhKWQnIW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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