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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는 사람 Jun 21. 2019

서원 이야기 1-도산 서원

조선시대 금수저들의 명문 사립대


1. 서원에서 발견되는 영남 패권주의


한 때는 여행 중에 인근에 사찰이나 서원이 있음 지나치지 않고 들렀다. 오래전에 간 병산 서원을 비롯해 도산 서원, 소수 서원, 함양의 남계서원까지 다 돌았으니 영남의 중세 엘리트 지방 사학은 다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같다. 언급한 서원 모두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서 공히 다 제외됐다는 것, 정조가 퇴계 이황을 추모하고 영남의 선비들만을 위한 지방 별과를 특별히 치렀다는 기록에서 당시 영남 사학, 서원의 위세가 짐작된다.

서원 입구는 조경과 산책로 조성을 잘해 놔서 오래전 기억보다 많이 매끈, 새끈 해서 날 좋은 날은 산책하기도 좋더라만 ‘안 꾸밈 애호가’인 나는 살짝 서운했다. 서원 앞으로는 넓은 강이 영화의 파노라마 화면처럼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언 강 위에 얼린 우유를 곱게 간, 빙수 가루같이 쌓인 설경은 이곳이 초행인 이에겐 강이 아닌 '눈밭'으로 일러 주어도 그리 알리라. 어떤 분은 붉은 배롱나무가 핀 여름 서원이 좋다고도 하지만 꽃도 잎도 없이 살만 남은 나무가 지키는, 눈 덮인 이런 겨울 서원에 가 보면 그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으리. 옛날에는 나룻배를 타고 갔을 저 길이 지금은 산책로로 연결돼 있다는데 그날 기후상 애로로 눈으로 감상하며 강 건너기는 훗날을 기약했다. 


도산서원 입구 마당에서 바라 본 강 건너의 시사단(試士壇)


강 건너편에는 마치 '섬 속의 섬' 같은 곳이 있고 그 꼭대기 가운데엔 작은 건물 하나가 보인다. 시사단(試士壇)이란 곳으로 정조가 특별히 퇴계를 추모하고 영남사림을 위해 도산서원에서 과거 보던 것을 기념한 전각이라고 한다. 원래는 그렇게 높은 곳에 있지는 않았는데 안동댐 공사로 이 건물이 수몰되면서 축대를 높이 쌓아 옮긴 것이 지금의 모습이란다.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이 숭상하던 스승을 기리기 위해 특정 지역의 학생들만을 위한 지방 고시를 특별히 실시, 참관한 것이다.
조선의 성균관이 지금의 서울대 같은 국립대라면 향교는 경북대, 부산대 등등의 지방 공립대일 것이고 서원은 연고대 쯤 되는 지방의 명문 사립대에 해당할 것이다. 지금은 명문대가 국립, 사립대 할 것 없이 서울에 죄다 몰려 있지만, 조선의 서원만 놓고 보자면 당시는 지방의 학문이 중앙을 능가했는 것과 당시도 정계나 학계에서는 영남 패권주의가 적용되고 있었구나 싶다.



2. 지폐 속 도산 서원(의 전신)


정선의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


천 원 권 지폐 앞면 모델이 퇴계 선생이라는 정도는 알았지만, 뒷면 그림이 '도산서원'의 전신인 '계상정거'란 것은 금시초문이었다. 돈에 초연하지도 못하면서 정작 돈에 무심, 무지했구나. 돈을 몰라 돈을 못 번 것인가! 그저 만 원, 오만 원이란 '원'의 액수에만 급급했지 그 속에 그려진 인물이나 배경에는 무관심이었던 게다.
원래 퇴계가 종택 가까운 계천 쪽에 먼저 자리를 잡아 '계상정거'란 작명까지 했는데, 좁고 높은 데다 비바람에 쉬이 쓰러지니 제자들의 간청으로 새로 지은 것이 도산서원이라 한다. 도산서원을 다녀와 새삼스럽게 천 원 권 지폐를 꺼내 뒤집어 놓고 한참 바라보았다.

하회마을과 퇴계의 도산서원이 있는 안동 도산마을은 예로부터 영남의 명당지로 손꼽힌 곳이다. 도산 서원, 병산 서원 등 유서 깊은 서원이라는 곳엘 가 보면 풍수지리에 문외한인 내가 봐도 '임산요수'의 명당에 죄다 자리 잡고 있었다.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펼쳐진 강과 산이 서원을 호위하고 있고 한적하나 햇빛 밝아 답답함이 없으니 최고의 '힐링 고시촌'인 셈이다. 굳이 입신양명의 출세욕이 없다 해도 뜻 맞는 사람들이 모여 공부와 풍류, 경치를 나누니 행복한 '그들만의 세상'이다. 게다가 대대로 논, 밭과 노비가 주어지니 밥벌이 걱정도, 힘든 노동도 없어 가히 조선시대판 금수저 엘리트들의 고고한 유토피아아다. 공부와 예술을 논하던 '학문의 명당'이 요즘은 '래프팅의 명당'으로 바뀌었더구나!



3. 지명 도산마을의 유래


제주도를 자주 드나든 시절, 다른 지역과 차별되는 이쁘고 정답고 아름다운 (‘가시리’ ‘정드르’ ‘알뜨르’ ‘종달리’ 같은) 우리말 지명을 대하면서 지명 유래에 잠깐 관심이 생겼다. 명승 유적지란 곳엘 가도 거기가 누구의, 어떤 의미의 장소, 공간이라는 궁금증보다는 이 이름엔 어떤 뜻이 담겨 있는가가 더 궁금했다. 그 겨울의 도산서원 걸음에서도 이곳이 조선의 최고 엘리트 사학이라던가, 흥선대원군의 사원 철폐령에서도 제외된 곳이라던가 하는 역사성보다는 이름에 대한 호기심이 더 일었다.

퇴계 이황 선생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을 먼저 떠올리게 하는 '도산 서원'의 주소는 안동시 도산면(陶山面) 토계리(土溪里)였다. 옛날에 이 마을에 옹기 굽는 가마가 있어서 퇴계 선생이 도산(陶山)으로 이름을 지은 것이란다. 낙동강 하류 지역인 이곳은 안동댐 건설로 마을과 지형이 수몰됐는데 옛날 퇴계 선생이 계셨을 당시의 지명은 지금의 토계리(土溪里)가 아니라 토계(兎溪)였다고 한다. 이 강물이 퇴계 선생의 종택 앞을 흘렀는데 선생이 어느 날 퇴계(退溪)로 고쳐 부르고 그 후 자신의 아호로 삼은 것이라 한다. 정리하자면 원래 토계(兎溪)에서 퇴계(退溪)로 부르다 후에 음(音)이 같은 토(土) 자로 고쳐 마을 이름을 토계(土溪)로 부른 것이란다.

옛 선조들을 보면 자신의 이름에 호를 붙이는 것뿐 아니라 집안 곳곳의 이름, 직장(서당/사원/관가/궁궐 등)의 처소에 작명하는 걸 즐겼던데 작명자의 풍류와 사상을 엿볼 수 있다. 문득 나도 집 현관 앞에 '모모 씨' 대신 그런  하나 만들어 붙여 볼까? 하다가 '이름 짓기를 흉내 내기 전에 몸과 마음을 먼저 닦을 일이다' 싶어 말았다.


한때는 권세 있는 명문가에서 줄 서서 이 댁에 중매를 넣었다는데, 이제는 제사를 비롯한 종손의 각종 의무가 부담스러워 그 댁네 남자 자손들이 결혼하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퇴계 종택-  '문화인은 남의 내실이 궁금하지 않습니다'


안동 곳곳은 퇴계 선생의 흔적이 많은데 아름다운 마을 '가송리'라는 이름도 선생이 지었다는구나. 퇴계가 청량산을 왕래하던 중 이 강가에 늘어선 소나무의 아름다움에 반해 가송(嘉松)이라 칭하고, 소나무가 아름답게 잘 보이는 강 건넛마을을 가사리라 불렀단다. 마을 가송리는 지금도 기암절벽과 너른 강, 농암종택 부근의 한적허니 아름다운 절경으로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데 퇴계가 걷던 그 시절의 비경은 감히 상상이 안 가는구나.
퇴계는 이 길을 걸으며 '그림 속으로 들어가네'란 시를 지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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