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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는 사람 Aug 11. 2020

'웃었소', '울었소', '죽었소'

삼소-파안대소(破顔大笑), 읍소(泣訴), 사소(死所; 죽은 장소 )


'웃었소', '울었소',  '죽었소'

-삼각뿔 소(三角牛)는 신라의 파견 노동자, 산업재해 희생자


 왕의 통 큰 하사품-퇴계 이황의 종산(宗山), 청량산


홍수를 피해 지붕 위로, 사찰로 대피한 소떼 사진을 많이 본 탓인지 소와 관련된 얘기, 영화들이 두루 생각난다. 불교문화에 소 관련 얘기들이 많은데 경북 봉화 청량산 청량사에도 그런 일화가 있다. 소 얘기에 앞서 먼저 청량산 소개를 좀 해볼까 한다. 
청량사는 청량산의 여러 암자 중 하나로 경상북도 봉화군에 있다. 봉화군은 경북의 최북단에 있으며 북쪽으로는 강원도 태백과 영월, 동쪽으로는 영양과 울진, 남쪽으로는 안동과 영주와 접경해 있다. 대구에서 가면 같은 경북권인 봉화가 경북보다는 강원도에 가깝게, 청량사는 주소지인 봉화보다는 안동이나 영주 쪽으로 더 가깝게 여겨진 이유가 그런 지리적 위치 때문일 것이다. 서로 맞닿은 지역명으로 짐작해 볼 수 있듯 산세와 주위 경관이 수려하며 선비 문화의 유서가 깊은 지역에 인접해 있다.


청량사 길목의 짚풀 공예. 설치물 바로 뒤의 황토벽 공방 주인의 작품. 짚 조각 외 솟대, 도자기 등 다양한 조각 작품이 전시돼 있다.


청량산은 화엄종의 성스러운 산으로 칭해지는 중국 청량산에서 연유한 것이라 한다. 이런 청량산의 수려한 절경에 반한 주세붕은 여러 시와 함께 무명의 봉우리들에 이름을 지어 주었고 단원 김홍도는 그림을 그렸으며, 퇴계는 그의 글과 일화 곳곳에 청량산 사랑을 자랑했다고 한다. '도산 9곡' 중 마지막 장을 '청량곡'으로 했으며, '십일월입청량산'시를 읊었고 도산서당 건립 시 이곳 청량산과 지금의 도산서원 자리를 두고 끝까지 망설였다고 한다. 도산서원을 자기 학문과 후학의 근거지로 삼은 뒤에도 평생을 이 산을 왕래하며 공부했고 '청량산인(淸凉山人)'이란 호(號)를 쓸 정도로 이 산을 아꼈다. 도산 외에도 최치원, 김생 등 수많은 학자와 선비들이 이곳에서 공부했고, 홍건적을 피해 노국공주와 피신 온 공민왕이 써 준 친필 현판인 <유리보전>이 아직 남아 있다.


퇴계가 아낀 이 산은 왕의 하사품이라고 한다. 퇴계가 소싯적부터 공부와 수양을 위해 청량사를 수시로 드나들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으나 퇴계의 '종산(宗山)'이라는 것은 이곳에 세 번째 갔을 때 알았다. 宗山? 퇴계 선생의 선산이 있는 산, 이 산의 일부가 집안의 소유거니 했다. 그런데 그 정도가 아니고 퇴계의 고조부가 임금께 받은 '하사품'으로 청량산 전체가 집안의 산이란다. 그래서 퇴계 선생의 집안에선 이 산을 '오가산(吾家山)'으로 불렀다고 한다.
참.... 온 산수 강산이 '내 재산'인 임금의 시대라 그런지 하사품도 통 크다. 말을 비선 실세에게 비공식 경로로 하사한 대통령도 있었지만, 명마는 죽어도 명산은 살아남으니 말과 산의 가치를 어찌 비교하랴! 조선 최고의 사립대인 '도산서원'과 경북과 강원에 걸친 명산까지 하사 받은 퇴계 선생은 그야말로 순금 수저다. 그래도 퇴계 선생은 그 유산과 명망에 걸맞은 학문을 평생 연마해 후대해 많은 문화유산을 남겼으니 수저 값은 잘 한 셈이다.


왼쪽 건물/ 공민왕의 친필 현판인 유리보전(琉璃寶殿). 약사유리광여래( 藥師琉璃光如來),약사여래불,약사 부처를 모신 곳.

 

'웃었소', '울었소', '죽었소'


관광 명소나 문화(역사) 답사지라는 곳에 들리다 보면 전국 곳곳에 이순신 장군과 원효 대사의 이름이 걸치지 않은 곳이 잘 없다. 교통수단이라야 기껏 육지에선 가마 아니면 말, 바다에선 배, 그런 게 이용이 안 되는 곳은 두 다리로 산 넘고 수풀을 헤져 지역과 지역을 넘었을 시대다. 전국구로 활동, 출몰한 두 사람의 피로와 부담이 이만저만 아니라 과로사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다. 특히 한국 불교는 원효의 후광이 크다 보니 전국 사찰 어디서나 그 이름이 쉽게 발견되는데 이곳 청량사에서도 창건주로 그 족적을 남긴다.


청량사 오르는 길은 입구에서 암자가 있는 정상까지 시간상으로는 30여 분 내외로 비교적 짧지만, 산세가 제법 가파르고 낭떠러지에 접한 좁은 길이다. 숨을 고르느라 잠시 멈추어 낭떠러지 왼쪽 위를 쳐다보면 험준한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싼 높은 하늘이 가까워 시원하면서도 아찔하다. 이제 좀 쉬고 싶다고 생각할 때쯤 사찰이 보인다. 공민왕이 써 준 현판 유리보전이 붙은 대웅전 맞은편엔 소나무 한그루가 마주 서 있다. 뿌리 쪽 둘레엔 테두리를 둘러 접근 금지 구역임을 표시해 놓았다. 이 소나무가 '삼각우송(三角牛松)', 그 아래 뿌리가 묻힌 봉분이 ‘삼각우총(三角牛塚)’으로 이곳에 ‘소’의 전생이 있다.

'삼각우총'이란 뿔 셋 달린 소가 묻힌 무덤이란 뜻이겠다. 원효대사가 절 건립 시 마을에 내려갔다가 어느 농부가 데리고 있던 '뿔 셋 달린 소(삼각우)'를 보게 되었다. 말 안 듣고 일 안 하는 소 때문에 농부가 뿔따구 나려던 참에 원효가 농부에게 소 시주를 청해 절에 데려왔다. 농부의 말은 죽으라고 안 듣던 이 소가 스님 앞에선 순한 강아지가 되었다. 소는 절 착공에 필요한 무거운 건축 자재들을  가파른 자갈 경사길을 오르내리고 실어 나르며 '죽도록' 일하다 준공 하루 전에 진짜로 '죽어' 버렸다. 원효가 소의 공을 기려 소나무 아래 묻었는데 그곳에서 죽은 소의 뿔 같은 '가지가 셋'인 소나무가 자라므로 이 소나무를 '삼각우송, 소의 무덤은 '삼각우총'으로 부른 것이란다.

삼각우송, 삼각우총-날이 흐리고 사진을 잘못 찍어 가지가 잘 안 보이는데 큰 가지가 세 갈래로 갈라져 있다.


원효의 불력이나 소의 우직함을 얘기한 설화겠지만 삐딱한 나는 다른 생각도 들었다. 소는 농경 국가의 가장 큰 재산이다. 일 못하는 소라도 식용으로 팔거나 먹을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큰 재산을 선뜻, 넙죽 줄 수 있었을까? 지금으로 치면 논, 밭의 주인이 농부에게 와서 제 건물 새로 짓는데 '경운기' 바치고 너는 손으로 흙 파라는 소리지 뭔가? 원효는 어찌 보면 농부가 눈 뜨고 있는데 코 꿰어(베어) 간 갑질 소도둑놈이다.
불교는 신라 시대의 국교였고 원효는 유학파 엘리트에 공주와 결혼까지 한 상위 1% 다이아몬드 수저다. 본인 자신이 깊은 불심과 수양으로 청정 검소하게 살았다고 그 계급 자체가 검소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재용이 아무리 검소해도 서민이 아닌 것처럼. 그런 건물주가 흙수저 세입자 농사꾼에게 와서 소를 '시주'하라는데 '못 주겠소'라 할 간 큰 백성이 있을까? 더군다나 소를 시주한 그 농부는 '사찰 소유'의 논밭을 빌어 농사를 지으며 사는 사하촌(寺下村)의 소작농이었다. 땅 주인인 '갑' 스님이 새 사찰 지으니 시주하라는 말에 세입자 '을'이 ‘미쳤소? 소가 웃을 소리요.’ 할 리 만무하잖은가.

 

태안화력발전소 운설 설비 점검 중 사망한 김용균 비정규직 노동자.  비정규직 철폐 운동과 추모 행사에  불교계의 참여가 많았다.


죽은 소는 비정규직 산업재해 파견 노동자?


소작농으로선 자신이 시주 인부로 차출 안 된 것만도 천만다행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또 불교계의 거승(巨僧)이 절을 짓는다는데 게으른 소 한 마리 바치고 이 한 몸 부서지라 일하다 저세상 가면 '극락정토' 내세가 기다린다는 위안이 됐을 수도 있다.
내게는 뿔 셋 달린 죽은 소가 마치 을 중의 을, 파견 노동자 같다. 정규직 노동자가 하기 싫고 힘든 일을 도맡아 하다가 죽은 계약직 노동자! 죽고 나서야 산업재해의 전사로 기억되는 비정규 노동자.
어쩌면 소가 처음에 절에 끌려 왔을 때는 뿔이 두 개만 있었던 건 아닐까? 건설 현장 과로로 뿔따구 모양의 종양이 생긴 건 아닐까? 혹은 가장 큰 재산인 소를 빼앗긴 농부의 가슴속 뿔다구가 소에게 붙은 건 아닐까? 하나 더 생긴 뿔은 갑의 횡포에 희생된 농부 소 화병, 산업재해는 아닐까?


우직하게 군말 없이 일 하는 사람을 '소같이' 일한다, '소 같은' 사람이라고 흔히 말한다. 사후의 천국을 기약하는 국가의 무상 보수 국책 사업에 불려 다니다 노독과 원통함에 쓰러져 죽은 민초의 영혼을 '소의 공덕'으로 미화한 것은 아닐까? 원효 대사가 극락에서 들으면 나의 내세를 지옥 아귀에 빠뜨릴 망언일지도 모르나 기록에 남은  무수한 미담, 설화도 결국 '글을 쓰고 남길 줄 아는' 그 시대 권력자들의 전언이다. 이 우화(牛話)를 각자의 처지에서 얘기하면 원효는 '웃었소', 농부는 '울었소', 소는 '뿔났소, 죽었소'이다. 청량사의 건립 설화로 나오는 삼각우송, 삼각우총 이야기가 나에겐 이런 삼소, 소소소(笑,訴, )로 해석된다.
원효 파안대소(破顔大笑), 농부 소 읍소(泣訴), 소 사소(死所; 죽은 장소 )


9층 금탑봉


※ 이 글은 사실, 우화, 필자의 상상력, 가상이 혼재된 글입니다. 특정 종교나 인물 폄하를 위한 글이 아니라 과거 설화를 통해 현재를 생각해보는 '만약'이라는 가정, 가상의 상황을 설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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