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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는 사람 Jan 31. 2019

매맞는 아내가 때리는 남편보다 더 나빠?

심리학으로 보는 조선왕조실록


온라인 책 구입의 단점


앉아서 구경하고 주문할 수 있는 편의성이 온라인 구매의 최대 장점이라면 '미리 읽어볼 수 없다'는 것이 큰 단점이다. 현장 구매는 사고자 하는 책을 몇 권 골라 서문과 앞 장 몇 페이지라도 읽어 보고 선택할 수 있어서 구매 후의 '후회'가 적은데 온라인 구매는 그렇지 않다. 온라인 구매는 주로 출판사의 소개글, 교보나 알라딘 등 온라인 서점의 추천 평을 보고 사게 된다. 책에 대한 내 '감' 보다는 많이 팔아야 하는 출판사와 서점의 광고성 홍보글에 의지해 사게 되는 것이다. 막상 받아서 읽다 보면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다.

「심리학으로 보는 조선왕조실록」가 그런 책이었다.

      



맞는 아내보다 때리는 남편이 더 불쌍하다고?

읽어 보고는 싶지만 역사적 시간과 분량의 압도감 때문에 도저히 읽지 못할 것 같은 '조선왕조실록' 속 27명의 왕을 책 한 권 속에, 그것도 '심리학'으로 살펴 본다니 솔깃했다. 막상 손에 넣어 읽을수록 실망감이 컸다. 사학자가 아닌 심리학자가  조선의 왕들과 그 주변 인물들을 심리학적으로 해석했다는 의미만 남았지 역사, 심리 양쪽 다 아쉬웠다. 두 분야 다 문외한인 내가 전문적으로 뭐를 비판할 깜냥은 안되지만 심리학, 사학 어느 한쪽의 깊이감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이 역사적 관점을 갖고 계신 분들에게는 심리학 책으로, 심리적 관점을 갖고 계신 분들에게는 역사책으로 보이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상호보완적인 관점을 가지게 되어 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요.>라는 말을 했는데, 내 감상은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두 마리다 놓친 포수를 대한 것 같다.


정사(正史)가 공중파 뉴스의 취재 기사나 탐사 보도에 가깝다면 야사(野史)는 '카더라' 류의 인터넷 기사나 찌라시 뉴스일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정사보다는 야사에 기댄 감이 많다.  정사보다는 민담, 야사가 더 재미있고 더 많은 상상력과 담론이 긍정적으로 발휘되기도 한다. 지상파, 정간지가 놓치고 보도하지 '않은' 것들을 인터넷, 찌라시가 '진실 혹은 사실' 보도의 역할을 더 잘할 때도 있다. 그러나 사실과 상상, 이성적 보류와 주관적 단정 사이의 중심을 잃고 한쪽으로만 귀가 쏠릴 때 내가 보는 진실은 서툰 주장이나 가벼운 가십으로 그치기 쉽다.


저자가 의도한 심리학의 틀에 역사를 맞추기 위해 어떤 역사적 사실 예시를 함에 있어 임의적 차용과 단편적 해석이 많다고 느껴졌다. 또 그 임의적 해석과 정보 선택의 정서에는 은근한 '강자의 선택', '남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가부장적 정서와 보수적 역사관이 자주 느껴졌다.

예를 들면 '세조의 단종 폐위와 왕위 찬탈'을 '감정이입'을 말하기 위해 끌어다 쓴 부분이다. '감정이입'을 설명하면서 일제의 만행과 6.25 사변을 겪은 백성들이 북한에 대해 갖는 미움과 원망이 수양대군과 신숙주에 대한 부정적인 '투사'라는 식이다. 


어쩌면 겉으로 보기에는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단종이 세조로 하여금 왕위를 빼앗도록 만든 것일 수도 있다. 그 결과 단종은 주변 사람들의 동정과 마음도 얻고, 왕이 맡아야 할 임무와 책임에 대한 부담도 덜게 되었으며, 세조는 온갖 비난을 받으면서도 왕의 임무와 책임이라는 막중한 부담을 얻게 되었다. (73)


할아버지 세종과 그의 신하들, 숙부인 양평대군과 수양대군이라는 특출난 사람들 사이에서 열등감과 불안감에 쌓인 단종이 쿠데타를 원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여러 왕들 중에서도 쿠데타로 집권한 태종, 세조에 대해 호의적 시선을 더 보이는데 그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태종과 세조, 광해군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도덕적 잣대에서 정치적, 현실적 측면으로 재평가되기도 하고 수긍가는 면도 있지만, 해석의 다양성이 아니라 그 해석을 하는 방법이나 도구에서 문제가 느껴졌다.

강한 일본의 지배를 약하고 못난 우리 백성이 속으로 원해서 일본이 마음속 그 소원을 들어준 것이고, 위안부가 사실은 자발적 매춘이며, 박정희나 전두환의 쿠데타도 강한 지배자를 원하는 국민들의 숨은 염원을 이뤄준 것이다라는 식의 인식으로 읽혔다. 그러니 친일파와 수많은 박정희, 전두환들은 오히려 못난 국민들로 인해 막중한 임무와 책임을 맡게 된 동정과 불안의 대상이라는 해석이지 뭔가.


가해자와 피해자를 설명하는 부분에선 '심리학자'라는 직업적 위험성이 우려되기도 했다. 세조 이야기를 하면서 세조와 단종의 관계를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가'라고 되물으며 여러 예시를 드는 부분이다. 세조와 단종의 '대상관계'와 '투사적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매 맞는 아내'는 과연 '피해자'이기만 한가?라는 글 의제와 무관한 예를 들어 비상식적으로 해석한다.

매 맞는 아내가 겉으로 보기엔 육체적 피해자지만 알고 보면 심리적 가해자다-라는 식이다. 맞고 사는 여자는 폭력을 당한 뒤 주변에 남편을 욕하며 위로받고 돌아가는 과정을 반복하니 모두가 아내의 편이지만, 때리는 남편을 편들고 이해할 사람은 하나도 없으니 '알고 보면' 맞는 여자가 '가해자'라는 궤변을 한다. (물론 모든 매 맞는 아내가 다 그렇다는 아니라는- 안전망을 슬쩍 흘리면서.)

처음에 저 부분을 읽고 뜨악했지만 내가 저자에 대한 섣부르고 과장된 해석을 했을 수도 있다는 조심 속에 계속 읽어나갔지만 내 생각이 별로 틀리지 않음을 확인시키는 말이 계속 나온다. 


지금은 가정폭력범 처벌도 강화되어서 '자신만 원하면' 얼마든지 법적인 조치가 가능하다..... 일차적인 책임은 때리는 사람에게 있지만, 맞기만 하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으며, 정확하게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하는 일은 쉽지 않다.(69쪽)


'때리고 맞는 관계'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경우도 있나?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경우는 '네가 날 때리지 않으면 내가 널 때리거나 죽일 거야'라는 마조히스트거나, 맞는 사람이 더 이상 못 견디고 같이 때리거나 죽이는 상황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교차 인식하는 저런 태도로 학대와 폭력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혹시라도 '심리 상담' 할까 봐 우려된다.

'자신만 원하면' 가정폭력범의 법적 조치가 '가능하다'는 가정문(假定文)에서 현실의 한 단면이 보여서 씁쓸했다. 피해 당사자의 청원이 없어도 폭력은 법적 조치가 '가능'한 것이 아닌, 즉각 조치돼야 하는 것이다.


<일차적인 책임은 때리는 사람에게 있지만, 맞기만 하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라는 말은 폭력에 대한 정당성,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해석의 위험성이 있다. 또, 맞고도 당장 집을 뛰쳐나와 신고하지 못하게 만든 사회 관습과 정서, 경제적 자립, 싱글 맘이 됐을 때의 육아 등 여러 복합적인 문제에 대한 통찰과 고민이 부족한 해석이다. 때린 남편이 있는 집에서 당장 뛰쳐나올 수 있는 사회적 여건과 제도를 먼저 말해야 되지 않을까?

단종과 세조의 '대상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매 맞는 아내와 때리는 남편'을 예시로 든 것도 무리수인데, 게다가 '그중 누가 (더) 피해자고 누가 가해자인가?''라는 자문자답까지 한 것은 저자의 잘못된 세계관,  인식을 보여주는 일례로 보인다.

   

단종(1441~1457) 김호석 한국전통문화학 교수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심리학 용어 중에 '확증편향'이란 것이 다.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확증하기 위해 외부의 정보를 선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란다. 사람은 누구나 그런 부분이 있고 나 역시 그런 면이 있지만 개인대 개인으로 만나는 관계나, 혼자 쓰는 일기글이 아닌, 다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책'이란 것을 펴 낼 때는 좀 더 조심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역사'와 '심리'라는 중차대한 주제를 다룰 때는 더!


소설가는 과학에 대해서 얘기하면 안 되고, 철학가는 음악에 대해서 얘기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역사를 사학 관련자만 얘기하고, 인간 심리는 심리학자나 정신과 의사만 얘기해야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서로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비전공 분야를 이야기할 때 새로운 시각, 다양한 해석이 많기도 하다. 심리학자도 역사에 관심을 갖고 역사를 쓸 수는 있다. 그러나 '역사와 심리의 만남'이란 두 마리 토끼 앞에서 웬만한 공부와 생각 없이는 어느 한쪽만 얘기만 할 때보다 단점이 더 빠르고 쉽게 보인다는 걸 느꼈다.


이 책을 읽으며 '심리학자' 혹은 '심리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단순히 심리 자체만 공부할 게 아니라 '사회(학)적'인 고민과 공부도 같이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리학의 정확한 정의를 내 잘 모르겠으나 '인간의 아프고 그늘진 마음과 상처를 살피고, 듣고 어루만지는' 그런 학문 아닌가 싶다. 사회학적 응찰과 공부, 약자에 대한 온정적 시선 없이 심리학의 단순 이론이나 이름만으로는 인간 마음을 제대로 살필 수 없을 것이다. 저자는 심리학으로 할 수 있는 여러 곁가지 중 하나로 '역사'를 택했는데, 지나간 역사를 살피는 건 과거의 과오를 현재의 시각에서 재해석하고 그 과오를 반복하지 말자는 것 아닐까?


저자의 역사적 해석이 여러모로 아쉬웠던 것은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둘 다 놓친' 의도와 결과의 불균형뿐 아니라, 사회학적 고찰이 부족해 보이는 일면이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그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저자가 보여 주고 싶은 심리학을 말하기 위해 제시한 예화들 일부가 거슬기도 했지만, 심리학 용어를 일반인 눈높이에서 역사 속 인물을 차용해 쉽고 편하게 설명한 점은 좋았다.

차라리 해석의 여지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영화나 소설을 소재로 선택하는 게 좋았지 싶다. '심리학으로 본 소설(영화) 속 주인공들' 같은.


* 다 읽고 책 출간 연도를 보니 '2008년' 도다. 무려 십 년 전이다. 강산이 한 번 변한다는 시간이다. 강산만 변하는 게 아니라 시대도 사람도 생각도 변하는, 변해야 하는 세월이다. 그간 미투를 비롯해 여자들과, 여자들의 목소리도 많이 변했으니 저자의 여성 성인식, 사회 인식이 좀 더 좋은 쪽으로 변했길 바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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