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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는 사람 Nov 11. 2022

굴뚝 위의 난장이는 아직도 많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SNS 친구가 이 책 리뷰를 올려서 나도 수 년 전 재독 리뷰를 썼다고 얘기하다가 옛 글을 찾아보았다. 2016년 3월에 쓴 난쏘공 리뷰 중 하나다.


2015년 크리스마스 전 날, 한 인터넷 매체에서 희한한 기사를 보았다. 

<ㅇㅇㅇㅇ역사교육연구소>라는 이름도 생소한 곳의 대표는 '현실을 왜곡하는 대표 도서' 중의 하나로 조세희의 작품을 두 편이나 선정했다.

<뫼비우스의 띠>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었다. 아마 조세희의 12편 단편 중 대표적인 두 편만 읽어서 저리 올렸지 만약 전 단편을 다 읽었다면 99%가 저 연구소의 왜곡도서로 이름이 올랐지 싶다.


재미있는 이름의 그 단체가 조세희의 저 두 작품을 왜곡 도서로 선정한 것은 문학 교과서가 정의한 '문학의 성격'에 반한다는 이유를 댔다.

문학 교과가 정의하는 문학의 성격은 다음과 같다.

① 문학은 기록으로 구현된 언어이다.

② 문학은 인간의 본질적 모습을 담고 있다.

③ 문학은 현실의 반영이다.

④ 문학은 예술이다. 그러므로 일정한 형식에 의해 구현된다.

⑤ 문학은 인간에게 감동과 읽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그러면서 문학이 '사회나 역사 교과서의 역할'까지 해서는 안된다는 첨언도 했다. 작가의 창작 자유에 대한 간섭뿐 아니라 작가가 그런 의도로 집필을 하지 않은 경우의 독자 개인 해석까지 침범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기록, 인간의 본질, 현실의 반영, 예술, 감동'을 혹시 반대로 알거나 모두가 이해하는 뜻이 아닌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극소수만이 느끼고 아는 언어로 아는 것인가? 싶었다.


김훈은 광화문 사거리에 오래도록 서 있는 피곤한 성웅을 그린 책에서 '나는 보았다. 나는 보았으므로 믿는다'라고 했지만 때론 보고도  믿기 힘들거나 믿기 싫은 경우가 있다. <ㅇㅇㅇㅇ연구소>의 말이야말로 두루말이해서 화장실에 흘려보낼 말이라고 생각했다.

연구소의 의견이란 문학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긍정을 가르치는 교과서'가 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들의 긍정이란 절망은 외면하는 거짓 희망이다. 내가 본 조세희의 작품들은 모두가 '절망의 목격자'다.  연구소는 절망의 목격과 인정(認定) 없이는 절망의 극복도 없다는 진정한 희망은 모르는 같다.


조세희는 이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열두 편으로 이루어진 '난장이 연작'은 하나하나를 따로 놓고 보면, 분열된 힘들에 지나지 않았다. 나에게​, 책은 분열된 힘들을 모아 통합하는 마당이었다.... 그동안 작은 싸움에 참가한 적이 있는, 그러나 누구에게도 아직 분명한 정체를 잡혀보지 않은 소부대들을 불러 모았다..... 혁명이 필요할 때 우리는 혁명을 겪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자라지 못하고 있다....우리는 그것의 목격자이다.


연극 난.쏘.공의 한 장면


12 편의 단편이 모여 장편이 되다- 불구(성) 극복과 미완의 혁명 


난.쏘.공 연작집은 난장이 다섯 가족과 그들을 억압하는 소유 계층들 각자의 시선과 삶에서 본 이야기를 합쳐 놓은 것이다.

원래 75년~78년 사이 여러 문학잡지와 대학신문에 연재된 각각의 단편이었지만 78년 '문학과 지성사'에서 소설집, 연작집으로 합본돼 나왔다. 그러니 각각의 단편으로 읽기에도 손색없지만 연작으로 읽으면 이 난장이 가족의 비극이 더 총체적으로 다가온다. 이 난장이 가족의 비극이 이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각성시키고 싶었던 것이 작가의 집필 의도 아닐까.


세상의 부당함과 부조리에 의문을 가지지만 저항할 생각은 못했던 각각의 난장이들은 12편이 다 합쳐지면서 비로서 연대와 혁명의 세계로 나간다. 비록 그 혁명은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혁명'을 생각하고 시도하는 자체가 새로운 변화와 출발의 시작이라는 걸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같다.

12편으로 이루어진 이 연작집을 편의상 난장이 아버지, 장남 영수, 차남 영호, 막내 영희의 이야기로 나눠서 들여다보기로 했다. 이런 '나눠서 읽기'는 끝내 이 세상과의 불화를 극복하지 못하고 비극으로 막 내린 난장이 가족을 더 가까이서 보는데 효율적이다.


이 다섯 가족 중에서도 난장이 아버지와 장남 영수의 이야기가 작품의 구심적 역할을 한다. 영수의 이야기는 12편의 단편 연작 중 총 4편으로 나왔다.


 난.쏘.공 제4편  1.『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문학과 지성, 1976년 겨울호)

 난.쏘.공 제8편  2.『은강 노동 가족의 생계비』 (문학사상, 1977년 10월호)

난.쏘.공 제9편  3.『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문예중앙, 1977년 겨울호)

난.쏘.공 제10편 4.『굴뚝 위의 난장이는 아직도 많다병』

(문학과 지성, 1978년 3월호)


이 네 파트는 거인들이 조종하는 나라에서 무력하게 참기만 하던 영수가 자신들의 가난과 부당함의 원인를 자각하고 그에 맞서는 과정의 단계다.

12편 중 11편은 각각 한 명의 주인공이 1인칭, 3인칭 주인공 시점의 화자인데 비해 난.쏘.공만 영수, 영호, 영희 3남매 각각의 목소리를 다 담은 이야기다.


반어와 대조 


'반어'와 '대조'는 난쏘공의 주요 표현 무기다. 난장이, 앉은뱅이, 꼽추 등의 신체적 불구성을 통해 소외와 불안의 극단성을 보여주고 거인으로 대입되는 자본가, 지식인, 권력자들과의 대립을 극대화한다.

난장이 가족은 가난하고 따뜻한 그들의 품성과는 반대로 극도의 경제적 빈곤과 정서적 차별 속에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그런 그들이 사는 곳은 반어적이게도 '낙원구 행복동'이다. 천국 같은 이름을 가진 동네에서 그들은 지옥 같은 삶을 전쟁같이 연명한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도 천국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지겨웠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 (80쪽)

모두가 난장이라고 멸시하는 그들에게 허리를 굽히는 두 사람이 있다. 구청장과 국호의원 선거에 나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거짓말쟁이였다. 그들은 엉뚱하게도 계획을 내세웠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계획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많은 계획을 내놓았다. 그런데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설혹 무엇을 이룬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의 고통을 알아주고 그 고통을 함께 져줄 사람이었다.(90쪽)


신영복은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라는 말을 했었는데 함께 비를 맞지는 못해도 최소한 찢어진 우산을 뺏지는 말아야 다.

판잣집은 폭풍이 몰아치는 세상에서 난장이 가족들이 피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우산이었고, 허리를 굽히던 그들은 찢어진 우산마저 빼앗았다. 오백 년, 아니 천년 만에 마련한 흙수저들의 집 이다.


40년 전의 이 소설이 마치 지금의 이야기 같은 것은 또래 작가, 작품들에서 발견되는 토속, 향수성이 없는 현대적 분위기가 큰 이유지만 '지금도 그때와 달라지지 않았다'는 현실적 공감 때문이다.

재개발 과정에서 가진 자들의 이익 창출과 증대를 위해 잠만 겨우 자던 협소한 공간에서 하루 아침에 거리로 강제 내몰리는 영수네 가족은 어제도 오늘도 계속 생기고 그 벼랑 끝에서 살고 있다.


한국에는 지하·고시원·쪽방과 같은 집 아닌 공간에 거주하거나 최저주거기준에 미달하는 삶을 사는 주거빈곤가구가 200만에 달한다. 그런데도 집 부자 상위 100명은 평균 207채의 주택을 소유하고 있다. 정말 주거 불평등이 극심한 사회다.
ㅡ아래 링크 정성철 칼럼에서 부분 인용


정부가 내년도 예산에서 공공주택 예산을 5조 7천 억 삭감한 조치는 국가가 소외 계층도 최소한의 공간에서 잠 만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주거권이나 생존 기본권보다는 가진자의 이익 증대에만 더 신경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공공임대주택

https://vop.co.kr/A00001622866.html


이 소설에서는 최근 몇 년 사이 많이 회자된 '수저 계급론', '흙수저' 얘기도 나온다.

인쇄 공장에 다니는 영수는 어느 날 인쇄 조판을 하다가 집안의 매매 문서 하나를 보게 된다. 500년, 혹은 1000년도 더 된 문서다.


영수 남매의 조상(난장이 부모)은 대대로 노비였다. 나는 어머니의 어머니, 어머니의 할머니, 할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 어머니의 할머니, 할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할머니들이 최하층의 천인으로서 무슨 일을 해왔는지 알고 있었다. 어머니라고 달라진 것은 없었다. 마음 편할 날 없고, 몸으로 치러야 하는 노역은 같았다. 우리의 조상은 세습하여 신역을 바쳤다. 우리의 조상은 상속. 매매. 기증. 공출의 대상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나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엄마를 잘못 두어 이 고생이다. 아버지하고는 상관이 없단다."


천년을 두고 우리의 조상은 자손들에게 이 말을 남겼다. 할아버지의 아버지대에 노비 문서가 사라졌지만 '죽도록 일해도' '죽도록 힘든'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수도 파이프 공사, 서커스 단원 등 자신의 몸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고 영수 남매는 중학교 졸업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공장에 다녔다. 천신만고끝에 도랑의 돌을 나르고 학교를 파하며 겨우 마련한 영수네 판잣집은 그들에게 허리를 굽히던 사람들의 '계획'으로 얼마 뒤면 헐린다.


 분양 아파트는 오십팔만 원이구 임대 아파트는 삼십만 원이래요. 거기다 어느 쪽으로 가든 매달 만 오천 원씩 내야 된데요.(89쪽)

그건 우릴 위해서 지은 게 아니예요.(84쪽)​


​그 집을 새로 지으려면 백삼십만 원이 든다. 그들이 오백 년 만에, 어쩌면 천년 만에 마련한 집을 그 개발에 앞장선 재벌2세는 가만 앉아서 이십오만 원에 산다. 전세비 십오만 원을 주고 나면 전세 얻을 돈도 없어서 그들은 길거리로 나앉아야 한다.

이십오만 원에 오백 년, 어쩌면 천년 된 집을 산 재벌 2세는 바로 얼마 뒤에 사십오만 원에 판다. 영수네가 천 년 만에 온 식구가 매달려 마련한 집을 그는 앉았다 일어나니 바로 이십만 원이 생겼다.

철거 대상 주민들은 다 떠나고 이제 난장이 가족만 남았다. 가난한 그들은 아궁이에 넣을 땔감이 항상 부족하고 며칠전 떠난, 가족 같던 옆집 명희네 집의 안방 문설주를 쪼개 불을 피운다.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도 부동산 업자에게 부당한 매매를 한 철거촌의 앉은뱅이가 철거된 꼽추네 마루를 뜯어 살인(방화)의 불로 쓰는 장면이 나온다. 

가장 가까운, 가족 같은 이웃들의 희생과 몰락으로 얼마 남지 않는 자기 생명을 연명하는 도리 말고는 아무 방도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나무 타는 연기 속에 자신들의 슬픔과 눈물을 푼다. 그들에게 연기는 눈물이고 눈물에도 냄새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 냄새는 영양 나쁜 얼굴과 더러운 몸에서 나는 생존의 냄새다.

재개발로 허물게 될 쪽방촌 -출처<뉴시스>
공공주택 예산 감축을 반대하는 국회 앞 시위. 출처<비마이너>


무존재의 존재들- 달나라로 간 난장이


오백 년, 어쩌면 천년 만에 마련한 집을 파는 매매계약서에 쓴 아버지의 이름은 金不伊(김불이)다.

한자의 뜻을 알아보았다. 伊(이) 저:이(저것 그것 할 때의 저)-  不伊불이: 저(그) 것이 아니다, 金不伊김불이: 김도 아니고 저도 아니다, 성도 이름도 없다.... 존재성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이름처럼 들린다.


아버지는 계약서 매도자란에 '金不伊'라고 쓰고 도장을 눌렀다. 나이 든 사람은 아버지의 이름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아버지 이름이 갖는 아픈 바람의 뜻을 알 리 없었다.... 집을 헐 값에 버리기 위해 생전 처음 내본 인감 증명 두 통,... 힘 하나 없는 식구들의 이름과 나이가 차례대로 적혀 있는 주민등록등본 두 통.... (119)


난장이는 이 세상에서 약한 존재 중에서도 약한 존재다. 그들은 '없는 듯이, 안 보이게' 살아야 된다. 사랑하는 딸 영희를 업어 주고 싶어도 낮에는 사람들이 놀리니까 아무도 안 보는 '밤'에 업어줘야 한다. 나무에 '혹'처럼 붙어서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먹을 걸 찾으로 다니는 쏙독새와 같은 존재다.

그는 이 무자비한 땅에서 자라지 못해 난장이가 되었고 사랑과 연민이 가득한 달나라를 꿈꾸며 굴뚝에서 쇠공을 쏘다가 추락사했다. '아무것도 아닌 난장이 김불이'는 그렇게 죽었다.


사랑만 가득한 아버지는 줄 게 너무 없었다. 아이들이 공부를 계속하기를 바랐지만 밀어줄 힘이 없었다. 영수 남매는 '주머니'가 달린 옷을 입고 싶었지만 넣어 줄 게 없는 어머니는 주머니 없는 옷만 입힌다. 악당은 돈이 많던데 아버지는 악당도 못 된다.

아버지는 '일만 년 후의 세계'라는 책만 보더니 '달나라'로 가는 망상에 빠진다.  (아버지에게 일 만년 후의 세계를 준) 지섭은 이 땅에서 우리가 기대할 것은 없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사랑이 없는 욕망만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 한 사람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릴 줄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만 사는 땅은 죽은 땅입니다.

-아저씨는 평생 동안 아무 일도 안 하셨습니까?
-일을 안 하다니? 일을 했지. 열심히 일했어. 우리 식구 모두가 열심히 일했네.
-그럼 무슨 나쁜 짓을 하신 적은 없으십니까? 법을 어긴 적 없으세요?
-없어.
-그렇다면 기도를 드리지 않으셨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지 않으셨어요.
-기도도 올렸지.
-그런데, 이게 뭡니까? 뭐가 잘못된 게 분명하죠? 불공평하지 않으세요? 이제 이 죽은 땅을 떠나야 됩니다....달나라로!.....이제 이 죽은 땅을 떠나야 됩니다...달나라로!


아버지는 굴뚝에 올라서 달나라로 가는 비행기를 날리다 그렇게 죽었다. 끝내 한 번 날아 보지 못하고, 떨어져 죽었다.



아직도 난장이는 많다- 고공 크레인 위의 수많은 난장이들

난장이 아버지가 자살하는 장면은 다시 읽어도 또 눈물이 났다. 그가 올라 간 굴뚝 장면을 읽으며 수많은 크레인과 난장이가 떠올랐다. 수많은 김진숙이, 수많은 한진중공업과 쌍용이, 마포 대교 위의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최근의 파리바게뜨 산업재해 사망 노동자, 수많은 난장이들이....

근무 중 사망한 노동자가 일 한 파리바게트 공장

이 넓은 땅 위에서 작은 몸 하나, 발 두짝 비빌 곳이 없던 그들은 그들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높은 곳이 굴뚝이었고, 크레인이었고 대교였다.


이 책을 읽은 직후 아래 동영상을 봐서 그런지 감정 이입이 많이 되어 보면서 엄청 울었다. 드디어 김진숙은 내려 왔고 이 동영상은 시간이 좀 지난 것이지만 또 다른 김진숙이 유효하다는 의미에서 오늘의 동영상일 수도 있다. 노래와 영상이 아주 잘 어울리고 뜻밖에! 아주 경쾌하다. 경쾌한데 보면서 울었다. 중간에 잠깐 나오는 쥐 조각상 땜에 웃었다.


https://youtu.be/pYa-VQ1ZiFE


김진숙은 2011년 1월에 고공 크레인에 올라가 309일의 농성과 37년 간의 복직 투쟁으로 갖은 병과 가난 끝에 법원으로부터 드디어 복직 승소 판결을 받았다.

소설 속 난쟁이 가족은 현실에서 끝끝내 패배했지만 김진숙은 일생에 걸친 투쟁과 주위의 많은 도움으로 작은 승리를 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 작은 승리를 보기 전에 추락한 사회적 타살이 더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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