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 기슭에 자리한 아파트엔 곤충이 많다. 산촌(山村)에서 자란 내겐 익숙하지만, 도시에서 나고 자란 딸아이에겐 공포의 대상인가보다. 하루살이나 나방 같은 하잖은 곤충에도 기겁을 한다. “아빠, 아빠~”하고 부르는 다급한 소리에 달려가보면 화장실이나 천장에 기껏해야 조그만 벌레나 곤충이 붙어 있다. 우리 아이만 그런 건 아닌지, 아파트에 벌레가 좀 많아졌다는 생각이 들 때쯤이면 어김없이 소독을 한다.
내 고향은 영화 ‘웰컴투 동막골’에 나오는 동막골 같은 곳이었다.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교차하는 그 곳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6∙25때 인민군도 그냥 지나쳤을 정도다. 내가 아직 학교에 들어가기 전인 1975년 무렵에 전기가 들어왔다. 논에는 메뚜기와 개구리, 산과 들에는 송충이와 잠자리, 매미, 시냇물에는 가재와 미꾸라지가 넘쳤다. 개구리와 잠자리가 장난감이었고, 어머니가 후라이팬에 튀겨준 메뚜기와 가재가 간식이었다. 산과 들을 돌아다니며 지천으로 널린 머루와 다래, 산딸기, 오디를 손에 가득 뭉쳐 먹곤 했다. 밤이면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고 아침마다 쪽문 너머 봉황산 위로 해가 떠오르면 잠을 깼다.
어릴 때 고향마을에선 목이 마르면 누구나 시냇물을 벌컥벌컥 마시곤 했다. 가재가 살 정도니 먹어도 문제 없는 1급수였다. 그러던 것이 초등학교 3~4학년 때쯤 마을에 경운기가 들어오고 과수원에 농약을 치기 시작하면서 하루 아침에 시냇물을 먹지 못하게 됐다. 중학교 때는 그 많던 메뚜기와 가재도 서서히 사라지고 머루와 다래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생각해보니 하루 아침이다. 1970~80년대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이제는 DMZ가 아니고서는 우리나라에 나의 고향마을 같은 곳이 남아 있지 않을 게 분명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에는 대략 800만 종 이상의 생물이 살고 있는데, 현재 100만 종 이상이 멸종 위기에 놓여 있단다. 서울에서 살며 눈으로 볼 수 있는 동물과 나무, 꽃, 곤충, 벌레를 다 합쳐도 기껏해야 몇 백 종류일 텐데, 해마다 수만 종의 생물이 사라지고 있다니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인류의 과학기술 발전과 자원 개발, 경제성장은 우리에게 풍요로운 삶을 가져다 줬지만 지구의 환경과 생태계에는 끔찍한 재앙을 안겨주고 있었다.
수많은 생물들이 멸종 위기에 놓인 것 못지 않게, 인간이 대규모로 재배하거나 사육하는 농작물과 가축들의 생물다양성이 사라지고 있는 것은 더 큰 문제란다. 복제 동물처럼 사육되니 유전적으로 생물다양성이 거의 사라져 조류독감이나 구제역이 발생하면 대량 살처분말고는 방법이 없다. 특히, 메르스나 코로나 같은 바이러스도 인간들이 야생동물의 생태계를 교란하거나 침범함으로써 전염된 것이니 인과응보가 아닐 수 없다.
Hindsight… 뒤늦은 후회와 깨달음이지만 멸종위기에 놓인 생물을 보호하고 생물다양성 회복을 위한 인류의 노력도 이미 오래 전부터 진행되고 있다. 1992년 생물다양성협약이 그 시작이다. 한 쪽에선 파괴하고 다른 한 쪽에선 복원하는 아이러니가 반복되고 있다. 인류의 탐욕이 멈추지 않는 한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다.
생명다양성재단을 만든 최재천 선생님은 인류가 반성하지 않고 지구의 생물들과 공존하려는 노력을 포기한다면 금세기 내에 인류가 멸종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즉, 더 나은 내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생존을 위해서라도 지금보다 더 악화되는 건 막아야 한다는 고언(苦言)이다.
유럽의 유명 자동차메이커 포르쉐는 세계 최대의 양봉업자라고 한다. 식물의 꽃가루를 나르는 생물다양성의 ‘파수꾼’ 꿀벌을 보존하는 활동으로 생물다양성 회복에 일조하고 있다. 절망에 빠져 자포자기할 필요는 없다. 우리도 일상에서 유기농 제품을 구매하거나 육류 소비를 줄이고 FSC(Forest Stewardship Council) 인증을 받은 제품이나 열대우림동맹(Rainforest Alliance Certified) 인증 받은 커피를 마시는 일부터 시작하면 어떨까.
이화명나방과 멸구벌레는 벼농사가 시작되기 전에는 해충이 아니라 그냥 곤충이나 벌레였고, 잡초로 불리는 모든 풀도 그냥 풀이었다. 이런 모든 곤충과 이름없는 풀들이 이 지구 생태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저마다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우리가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야 하는 이유다.
이 글은 <IMPACT ON> 2월8일자에 게재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