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여름에 친구 따라 간 교회엔 이상하게 여학생이 많았다. 생긴 지 얼마 안된 작은 개척교회였는데, 나와 단짝친구 두 명을 빼고는 중고등부 10여명이 전부 다 여학생이었다. 내 사춘기에 내린 신의 축복이었을까, 신앙심의 발로인지 이성의 발견인지 대학 가기 전까지 참 열심히도 다녔다. 거룩하게 기도하고 찬송도 했지만, 모임이 끝나면 신앙의 테두리 안에서 ‘합법적으로’ 교회 근처 대학가를 어울려 다니며 노는 게 재미였다. 어떤 때는 일주일에 네 번을 갔으니, 학교를 다니는지 교회를 다니는 것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였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생애 첫 올나이트(all-night)을 해보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밤늦게까지 찬송가를 부르고 간식도 먹고 하다가 게임을 했다. 신문지를 손바닥만해질 때까지 접고 접어 그 위에 오래 버티기나 둘이서 빼빼로를 양쪽 끝에부터 먹어나가는 게임은 긴장감 최고였다. 우린 남자 숫자가 부족하니 무조건 여자와 커플이 됐고, 처음으로 손바닥만한 신문지 위에서 여학생을 두 팔로 번쩍 안아보기도 했고, 빼빼로 게임을 할 땐 너무 몰입해 입술이 스치는 불상사(?)가 일어난 것 같기도 하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발렌타인 데이가 다가왔다. 처음 들어보는 기념일인데 여학생들이 맘에 드는 남학생한테 초콜릿을 준다는 거였다. 그게 일종의 사랑 고백이란 걸 알고 나자, 거의 자동 반사로 정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2월14일이 되자 정말로 다양한 방식으로 여러 명의 여학생이 남학생들에게 초콜릿을 선물했다. 내가 받은 걸 집계해보니 모두 8개였다. 하나씩 설레는 마음으로 뜯어보는데… ㅠㅠ 정작 정희의 초콜릿은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랑의 비극을 깨우쳤다고 할까. 첫 발렌타인 데이의 기억은 그렇게 설렘과 기대, 실망으로 남아 있다.
발렌타인데이의 유래를 따질 필요도 없이 ‘사랑 고백’을 모티브로 초콜릿 이벤트를 기획한 회사의 발상은 천재적이다 못해 존경스럽다. 사랑의 달콤함에 비할 수 있는 물질이 이 지구 상에 초콜릿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매년 의례적이지만, 나를 사랑하지도 않는 회사 여직원이나 혹은 나를 사랑하지만 정희와는 다른 빛깔의 사랑을 담은, 딸아이의 초콜릿을 받았는데, 올해는 조용히 지나갔다. 설 연휴와 겹치기도 하거니와 코로나 때문이다.
넷플릭스에 가입한 후 영화나 다큐를 즐겨보는 편인데, 마침 설 연휴에 『부패의 맛』 ‘쓰디쓴 초콜릿’ 편을 보게 되었다.
초콜릿의 원료가 되는 카카오 콩의 생산에도 아동노동으로 인한 공급망 이슈가 있었다. 전 세계에서 소비되는 카카오의 60% 이상을 담당하는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와 가나엔 200만 명의 아이들이 카카오 재배에 동원되고 있다. 농촌에서 자란 나도 어린 시절 농사일을 돕는 걸 당연하게 여겼지만, 그곳에선 어떤 아이들이 부모를 돕는 것인지, 강제노동에 동원된 것인지 구분조차 할 수 없단다.
먹이사슬처럼 수직 계열화되어 있는 피라미드 구조의 제일 아래쪽에 생산자인 농민이 있고, 그 위에 카카오를 수집하는 중간 상인, 중간상인으로부터 카카오를 매집하는 수출업체, 그리고 이들 수출업체로부터 카카오를 수입해 가공한 후 초콜릿 브랜드에 납품하는 대형 글로벌 수입업체에 이르기까지 얽히고 설킨 유통구조는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 지도 모를 만큼 총체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아이를 학원에 데려다 주는 길에 갑자기 생각이 나서 물었다.
“이번 발렌타인데이에 왜 초콜릿 안 줬어?”
“……”
“근데 너 착한 초콜릿이라고 들어봤니?”
“알지, 그 비싸고 맛없는 초콜릿 말하는 거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비싸고’ ‘맛없는’ 것으로 ‘착한 초콜릿’을 정의한다. 초콜릿 다큐에 네덜란드 최고의 초콜릿 브랜드이자 생산자에게 정당한 대가를 치르는 ‘착한 초콜릿’으로 알려진 ‘토니스 초코론리’ 생각이 나서 물은 것인데, 의외의 거침없는 대답에 당황했다. 정말 맛이 없나…. 맛은 기호와 취향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
착한 초콜릿 맛이 궁금해 살려고 보니 동네 편의점이나 마트, 백화점에선 구할 수가 없다. 커피와 관련한 공정무역이나 윤리적 소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초콜릿도 벌써 오래 전 ‘착한 초콜릿’이 등장했지만 아직 일상에서 쉽게 접하기 어렵다.
그런데,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정말 가격이 비쌌다. 아니, 오히려 편의점에 놓여있는 익숙한 브랜드의 초콜릿들이 착한 초콜릿에 비하면 너무 싸다고 해야 하나. 아프리카 농민들의 저임금 노동을 담보로 형성된, 턱없이 낮은 가격. 값싸고 질 좋은 상품을 원하는 소비자의 본성이 나쁘다 할 수는 없으니, 이미 고착화된 가격구조는 웬만해선 변하지 않으리라.
“아빠, 원래 몸에 안 좋은 게 더 맛있는 거야.”
맞는 말이다. 악마의 유혹이 아닐 수 없다. 유럽산 초콜릿들의 부드럽고 달콤한 향미만 그런가. 온갖 가지 고소하고 바삭바삭한 과자들부터 실로 놀라울 정도로 쫄깃쫄깃한 던킨이나 크리스피 도너츠, 그 이름만큼이나 다양하고 매력적인 맛을 구현하는 베스킨라빈스에 이르기까지 그 유혹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온라인으로 착한 초콜릿을 주문했더니 하루 만에 도착했다. 비싸지만, 의외로 부드럽고 맛있다. 특히 개구리가 그려진 RAINFOREST ALLIANCE 라벨이 너무 반갑다. 불편한 진실 위에 놓인 악마의 유혹과 착한 초콜릿, 그 선택은 쉽지 않지만 나는 착한 초콜릿을 지지한다.
이 글은 <IMPACT ON> 2월22일자에 게재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