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런 제주 여행이었다. 와이프가 제주도에 출장을 간 김에 일이 끝나는 날에 맞춰 2박3일 가족 여행을 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제는 스무 살을 넘은 까탈스런 아이가 선선히 수락하자 내 의사 따위는 문제될 게 없었다. 여행을 가면 가장 번거로운 게 잠자리인데, 와이프가 좋은 곳(?)이 있으니 걱정 말고 오란다.
여행 일정은 짤 것도 없었다. 코로나 때문에 어디 갈 곳도 마땅치 않았지만, 설령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나와 아이는 만사가 다 귀찮은 ‘귀차니스트’여서 돌아다니길 싫어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저녁노을 지는 바다만 보여 달란다. 노을을 보려면 서쪽으로 가야 하는데, 마침 산방산 쪽에 와이프가 후원하는 카페가 있었다.
10여년 전 일찌감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커피가 좋아 제주도에 카페를 차렸다는, 와이프 선배이자 사장님은 카페 연간 정기구독자수가 100명을 넘는다고 했다. 속으로 ‘커피도 구독을 하나’ 했더니, 초기부터 구독을 수익모델로 선택한, 자칭 ‘구독경제’의 선구자다. 바리스타도 생소하던 시절에 커피 로스팅을 배워 원두를 볶아 전국의 구독자들에게 보내왔단다. 커피라곤 카페라떼밖에 모르는 내가 신맛 쓴맛 구수한 맛 나는 원두를 종류별로 맛볼 수 있었다.
차를 타고 해변을 따라 가며 노을을 감상한 후 저녁으로 제주 특산 흑돼지 삼겹살을 먹고 나서야 드디어 김녕항 근처에 있다는 좋은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 곳의 이름은 ‘까사 가이아’였다. ‘까사’엔 집이라는 뜻이 있고, ‘가이아’는 대지의 여신이니 굳이 우리말로 번역하지 않아도 느낌이 왔다. 얼마 전 EBS 건축관련 프로그램에 소개된 적이 있고, 지붕모양이 안젤리나 졸리 입술모양을 닮았고, 거실에서 바라보는 바다 풍경이 압권이란다. 한 시간을 달려 숙소에 도착하니, 정작 사방이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낯선 사람을 보고 6개월 된 강아지 자두가 짖는 소리만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바깥 풍경이 보이지 않아도 넓은 거실은 안락했고 벽면을 장식한 정갈한 책꽂이와 각종 인문학 교양서적이 출판사 사장님이라는 건물주의 면모를 짐작케 했다. 주방 쪽에는 긴 테이블이 놓여 있어 차나 술을 마시며 대화하기 제 격이었다.
“와~ 이거 펜션이야? 아니면 그냥 사는 집이야?”
“은퇴하면 살려고 지었다는데, 지금은 아는 사람들한테만 이렇게 빌려주시는 거야”
“그런데 이렇게 좋은 집을 왜 1층으로 지었대? 2층이나 3층으로 해서 우리도 입주하면 안되나?”
“헐, 내일 아침에 저쪽 언덕 위에 올라가서 한번 봐봐. 왜 안 되는 지 알 거야”
아침에 눈을 뜨자 비로소 ‘까사 가이아’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도로에 연한 작은 삽작길을 따라 언덕에 올라서자 바다와 육지의 경계에 자리잡은 하트 모양의 집터와 입술모양 지붕이 한 눈에 들어왔다. 옆으로 긴 모양이고 단층이어서 새로 지은 집이 아니라 원래부터 거기 있던 집처럼 보였다. 김녕항에서 까사 가이아를 보면 지붕라인이 배경화면처럼 보이는 산과 들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다. 입술모양을 기준으로 바다 쪽 벽은 현무암으로, 안쪽 벽은 모던한 하얀색으로 대조를 이루었고 직선과 곡선의 조화도 돋보였다. 만약 2층이나 3층으로 지었다면 이 모든 조화와 균형이 깨어질 게 분명했다.
어느새 아이가 일어났는지 환호성을 연발하며 사진을 찍는다고 난리다. 밤에는 몰랐던 실내도 다시 눈 여겨 보게 된다. 거실 안쪽 벽만 책꽂이와 모형 벽난로가 자리를 잡았고 나머지 사방이 모두 창을 내어 어느 쪽으로 눈을 돌려도 산과 들,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특히, 김녕항을 바라보는 긴 안락의자에 누워 차를 마시거나 책을 읽는 건 일생에 한번 누릴까 말까 한 호사였다.
불현듯 바쁘게 살면서 놓쳐 버린 것들이 생각났다. 카페 사장님이나 출판사 사장님 모두 느리게 사는 삶,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위해 이미 오래 전 제주를 선택했다. 부러웠다.
아침을 가볍게 해결하고 서귀포 쪽에 동백꽃을 보러 가기로 했다. 그런데, 낮에 제주도를 돌아다니다 보니 바람이 많은 제주도라 그런 지 가는 곳마다 풍력발전기가 눈에 띄었다. 자료를 찾아보니 제주도의 재생에너지 비율은 16%(2020년 태양광 420MW, 풍력 295MW)로 전국 최고란다. 전기차 보급도 지난해 2만대를 돌파해 전국 지자체 가운데 최고였다. 그러고 보니 렌터카를 찾으러 간 소카 스테이션에도 절반이 전기차였다. 제주도엔 전기차 충전소도 부족하지 않단다.
며칠 전 KBS 시사기획 ‘창’에서 본 프랑스 파리 얘기가 생각났다. 지난해 6월 재선에 성공한 파리의 안 이달고(Anne Hidalgo) 시장은 시내 노상주차장을 모두 없애고, 시내 주행속도를 30km/h 이하로 제한하는가 하면, 4차선 도로의 3개 차로를 자전거 도로로 만들어버리는 강력한 기후변화 공약을 실행하고 있었다. 시민들이 불편을 감수하고 스스로 선택했다고 하지만, 파리의 콘크리트 면적만큼 녹지를 조성해 생태도시를 만들겠다는 안 이달고 시장의 공약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몇 년 만에 제주도를 와보니 2030년까지 ‘탄소 없는 섬’(Carbon free island)을 만들겠다는 제주도의 야심찬 계획이 프랑스 파리보다 먼저 성공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페 사장님이나 출판사 사장님이 선택한 제주에서 그린(Green)의 미래를 보았다.
이 글은 <IMPACT ON> 3월8일자에 게재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