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육아와 생각 Apr 21. 2022

장애 인식개선의 에스컬레이터를 타보자

" 당신은 장애인이십니까? "


2022년 4월 20일 장애인의 날


대학교 때 연을 맺은 장애인 친구가 아닌 장애를 가진 친구가 있다. 그 친구의 모든 특징을 장애인으로 묶어버리는 '장애인 친구'라는 표현보다는 '장애를 가진 친구'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장애에 대한 묘사보다는 그 친구가 가진 특징을 표현하자면 뇌병변 장애로 기본 보행이 가능하지만 사지의 뒤틀림으로 비장애인들이 걷는 보행 동작보다 변형되어 있다. 수의근, 불수의근이란 말이 있다. 수의근은 나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내 몸의 근육들이다. 그러나 불수의근이란 몸 안의 내장기관처럼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심장이 뛰고 폐가 제 역할을 해내도록 알아서 심장근육과 폐근육이 움직이는 것이다. 나의 친구는 자기의 의지대로 똑바로 걷고 싶어도 똑바로 걸어주지 않고 약간은 제맘대로 움직여 버리는 뇌의 전달체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에스컬레이터에서 함께 넘어짐


그 친구와 겪었던 잊지 못할 사건은 함께 에스컬레이터를 탄 일이었다. 아직 친구의 장애를 오래 경험해 보지 못한 새내기 대학생이었던 터라 대형 쇼핑몰에 함께 가보는 것이 큰 어려움이 될 것이라 예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면 넘어질 수 있는 위험성이 있으므로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이 안전한 선택인 것을 그 친구도 나도 몰랐기 때문에 시련이 닥쳤다. 첫째로 그 친구는 넓은 캠퍼스 여러 단과대학 강의실들을 오가는 일들을 휠체어 없이 그리고 별 어려움 없이 수행했다. 하지만 한 발 한 발 내딛는 다리의 연속동작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조금은 힘들어 보이는 그런 케이스였다. 그러나 속도감을 내지 않고 조금만 천천히 가면 별 문제가 없었다. 두 번째로 그 친구는 대형 쇼핑몰을 자주 이용했던 경험은 아직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두 명의 20세, 21세 어린 친구들의 판단 오류로 함께 부축하여 에스컬레어터에 오른다는 것이 타자마자 함께 균형을 잃고 넘어져 버렸다. 비장애인 사람이라면 에스컬레이터에 타자마자 바로 몸의 균형을 잡고 안정된 자세로 이동을 마친다. 그러나 내 친구는 처음 타보는 에스컬레이터의 속도에 놀라 균형을 잡을 새도 없이 넘어져 버리고 만 것이다. 갑작스러운 균형의 상실로 함께 넘어진 나도 긴긴 에스컬레이터를 함께 버둥대며 공포를 참아내며 버티다가 결국엔 한 층을 다 이동하고 나서야 먼저 범벅이 되어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시선을 빼앗는 쇼핑몰 환경에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당한 행인 둘을 인식하여 괜찮냐고 물어봐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아도 장애인식이 부족하여 위험천만한 경험을 한 것이다.


유쾌 발랄한 각기 다른 장애를 가진 4명의 특별한 이야기 - EBS <세상을 비집고>   
[이미지출처 = ebs]
[이미지 출처=ebs]

*프로그램 설명은 아래 링크를 참고해 보세요.



이들의 두 번째 만남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풀밭에 둥그렇게 모여 앉아 각자의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일상을 담담하게 풀어나가는 모습이 신선하고 돋보였다. 나는 다시 한번 알게 되었다. 장애는 성별, 체격, 인상처럼 그 사람이 가진 특징이고 신체 특성의 일부라는 것을. 우리가 장애를 극복의 대상으로 여기거나 측은하게 바라보거나 정상에서 멀어진 상태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나는 <우리 모두가 가진 장애에 대한 인식>이 에스컬레이터를 타듯이 한 칸, 한 칸, 올라가기를 바라는 한 사람이다. 장애 인식개선이란 말과 그 일을 하는 장애 인식개선 강사라는 직업이 있다. 장애 인식개선은 멀리 있지 않다. 태어나는 모든 사람의 신체 및 뇌의 기능 상태가 완벽하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고 생활속에서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것이다. 보통 평범한 사람들이 올림픽 출전 선수들과 비교하여 신체 기능상태가 월등하게 차이가 나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의 신체 기능 상태가 다를 수밖에 없고 어떤 사람들만이 정상 범주 안에 있고 그렇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을 차별과 부정적 낙인을 목적으로 의식적으로 따로 구분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러므로 사실은 장애인이란 단어조차 가치중립적으로 올바르게 사용되지 않고 차별의 의식이 담겨 커나가는 학생들의 입에서 비난과 놀림의 의미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쓰임새라면 차라리 없어져야 할 말이라고 생각한다. '장애인'이란 단어 자체가 없어지는 날이 장애인식이 진일보한 그 날인 것이다. 나는 제언한다. '장애인'이 아닌 '장애를 가진 사람들'로 칭하는 것을 제안한다. 그것이 좀 더 가치중립적이고 사실에 가까운 표현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사고와 장애를 얻을 수 있다. - 장애 인식개선의 첫 번째 단추



 는 큰 무리나 압력을 가하지만 않는다면 살아가는 데에는 크게 문제는 없지만 과거에 왼쪽 다리의 무릎인대가 완전히 끊어져 인공인대 재건술이란 수술을 한 적이 있다. 사고는 아주 우연히 부주의한 실수로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고 한 번 손상된 정교하고 섬세한 신체는 사고 전의 상태로 완벽한 재활은 불가능했다. 한 달의 석고 고정과 수술을 거쳤지만 담당하셨던 의사 선생님은 결국 수술 경과가 좋지 않다고 결론 내렸다. 그리고 후유 판정을 받았다. 안타깝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었다. 내가 남들과 다른 손실된 기능의 다리 인대를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현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빠른 인정이 내 삶의 행복에 더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한쪽 다리에 고정기를 착용하고 목발을 사용하며 회복기를 거치면서 경험했던 장애체험은 귀중한 삶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자부한다. 불편한 다리로 목적지를 향해 보행을 해보고 지하철과 버스를 탔다. 그때의 중도 사고와 장애체험은 절망도 측은함도 극복의 대상도 아니었다. 그러한 신체의 기능 손실 변화를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나의 평범하고 인간다운 삶에 가장 도움이 되었다.


장애 인식개선의 첫 번째 에스컬레이터는 이것이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사고를 겪을 수 있고 장애 또한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염두하여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장애인'이란 단어보다는 차라리 장애를 (선천적 또는 후천적으로) 갖게 된 사람들이란 풀어쓴 말을 사용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들의 장애에는 인생이 있고 삶이 담겨있다. 그냥 쉽사리 명칭하여 '장애인'으로 부르는 것은 어떻게 보면 옳지 못한 일이고 섬세하게 들여다보면 무례하고 불친절한 행위에 가다.


당신은 장애인이십니까?!
-장애인식개선의 두 번째 단추:
언어순화


이 말이 달갑고 정답게 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아무도 처음 보는 상대방을 대상으로 거리낌 없이 당신은 장애인이 맞냐고 확인하는 이 질문을 해대지는 않는다.

 언어에는 힘이 있고 풍기는 분위기가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장애인'이란 이 단어를 쉽사리 상대방을 향해 거리낌 없이 할 수 없다면 바꾸는 것이 맞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이미 아래와 같은 풀어쓴 말들을 사용하고 있다.



" 몸이 불편하신 것을 보니 제가 좀 도와드려도 될까요?", "장애를 갖고 살아오신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우리 사회가 모두 동참하여 장애 인식개선의 에스컬레이터에 탑승하기를 바란다. 긍정의 변화는 모든 사람이 공짜로 함께 나눌 수 있는 행복의 공공재이기 때문이다. 말에 도 좋고 나도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이 우리 사회가 한 걸음 나아가는 행복한 변화가 아닐까요?(^-^)


https://m.blog.naver.com/hong68223/222704780252


작가의 이전글 내겐 너무나 벅찬 그대 라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