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왠지 나쁘지 않은 하루이다. 우울이가 말을 잘 듣는다. 거실이 말끔하게 되진 않았지만 오늘 할 일들을 무리 없이 해낼 수가 있었다. 아이 시간 맞춰 데려다 주기는 아주 안전하게 잘 되었고 누구보다 빠르게 도착해 오늘 아이가 타고 나갈 대형 관광버스가 주차하는 것을 보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동승하신 이웃 아주머니께서 아이 점퍼 모자를 예쁘게 꺼내 주면서 원복이냐고 물어보신다. 다정하게 응대하시길래 나도 오늘 화성행궁에 가는 날이라 어린이집 원복을 입었다고 설명해 드렸다. 대답과 반응이 적절했는지 반갑게 인사하시고 엘리베이터를 나서신다.
그리고 운동을 했다. 가벼운 걷기 운동인데 최근에는 계단 오르고 내리기 운동을 추가하였다. 똑같은 운동만 반복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기분이 정체되고 게을러질 수 있는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약간 힘든 운동을 넣어주는 게 좋은 것 같다. 그리고 오전에 마지막으로 했던 일은 반찬가게에 가서 저녁에 먹을 반찬을 사 오는 것이었고 반찬가게 잘 들어가서 먹고 싶은 거 사서 인사하고 잘 나왔다. 하지만 왠지 기쁘지 않은 무언가 피곤함이 동실동실 함께하는 하루이다. 이렇게 날씨가 좋고 가족들이 건강하고 몸이 아픈 사람이 없고 경제적으로 크게 걱정이 없는 상황인데 기분이 좋지 않다. 얼마 전에 하나병원이라는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았었는데 우울증 보다는 기분부전이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둘 중에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바라보고 괜찮다고 뭐라도 말해주기 위해서 일단 기록을 해보기로 했다.
먼저 나의 우울이를 칭찬해 줘야 할 것 같다. 말을 그나마 잘 듣는 우울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5~6년 우울이가 함께 해왔지만 크게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은 적이 없다. 우울은 감정이고 나는 그보다 상위의 생각을 하는 주체이기 때문에 꼭 기분과 감정의 지배를 받을 필요는 없다고 언제부터인가 스스로에게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처음엔 자꾸만 아래로 향하는 기분과 거기에 맞춰 느려지는 행동을 잘 인식하지도 못했고 깨닫지도 못했던 시간이 꽤 길었다. 감정과 기분을 그렇다고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크게 영향을 받아 내 삶을 전부 차지하도록 보고 있을 수도 없다. 우울이든 슬픔이든 적절하게 나에게 왔다 가도록 자유를 줘야지..
책을 오래 읽지 못하던 내가 어느 순간부터 책을 진지하게 생각하며 읽게 되었다. 무엇이 책을 읽게 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책을 읽어보면서 그리 오래지 않아 깨닫게 된 단순한 진리가 하나 있다.
나는 그냥 나일뿐이다.
이 결론은 너무나 단순하면서 명백하다. 하지만 이 단순한 생각 한 가지로부터 많은 자유를 얻었다.
나는 훌륭한 어머니가 되고자 높은 기준을 표방할 필요가 없다. 모든 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을 끌어다 남부러운 자식농사를 지을 필요가 없다. 아이가 건강하고 바르게 자라면 그만이다.
나는 엄마 아빠의 갈등을 완벽하게 해결해 드릴 능력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들의 갈등 중재자가 아니다.
나는 자는 시간 빼고 나머지 시간을 촘촘하고 알차게 구성하여 한 단계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꼭 심혈을 기울여 살아갈 의무는 없다. 열심히 뭐가 몰두하고 싶을 때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고 쉬고 싶고 편하게 지내고 싶을 때가 있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대한민국에서 온 평생을 살아오고 일상생활에서 영어 쓸 일 전혀 없는 내가 영어를 꼭 잘해야 할 이유가 없다. 영어로 다른 문화권의 생각과 깊이가 알고 싶다면 틈날 때 조금씩 공부하면서 즐기면 그만이지 무리한 시간을 내어 연습을 하며 원어민 쫓아가겠다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될 수도 없다.
나는 부모님의 딸이고 함께 삶을 공유하는 자녀일 뿐이지 큰 효도를 하지 못해서 아쉽고 절절함을 느낄 필요가 없다.
나는 갑자기 큰 부를 이룰 수 있는 능력도 없고 천천히 쌓아 올려 언젠가 경제적 자유를 누릴 자신도 없다. 오늘 성실히 내가 맡은 역할을 다 하는 것에 충분히 만족한다.
꼭 행복하고자 하는 생각 자체가 어리석다. 희로애락은 그때그때 그날그날 다르다. 감정과 생각은 늘 변화하기 마련이고 행복이 충만한 상태와는 늘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모든 물건이 깨끗하고 단정하게 제자리에 365일 들어가 있을 수 없다. 집은 CF 촬영하는 스튜디오가 아니다. 늘 어지르고 꺼내는 어린이가 살고 있다.
늘 남에게 도움 되는 가치 있는 인간이 되고자 나 자신을 잃어버릴 필요는 없다. 그렇게 하면 좋지만 그렇게 안 하면 큰일 나는 일 또한 없다.
매번 실패 없이 최선의 선택이란 어렵다. 늘 온전할 수만은 없다.
뒤집어지고 엎어지고 구겨지고 망가지고 뒤섞이고 잠시 정돈되었다가 다시 변화해 간다.
성공이란 말이 정말 싫다.
성공이란 점 하나를 찍어 놓고 그보다 가치 있는 나머지 삶의 가치를 그 작은 블랙홀 속으로 쓸어 넣는 실수를 범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