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수원시민 인권 아카데미 2기 '외로움과 존엄'에 참석했다. 저녁시간 7시부터 9시까지. 처음 수원시 홈페이지에 들어가 우연히 발견했을 때 나의 삶과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느낌과 정말 나에게 큰 울림을 줄 것 같은 기대감 두 가지 생각이 같이 왔다. 적극적으로 살기로 결심한 것도 있으니 일단 신청했다. 그리고 매우 자세하고 친절한 행사진행 안내 문자가 나의 참여하고자 하는 마음보다 열 배 적극적으로 문자 메세지함에 도착하였다. 사실 놀랐다. 어떤 시민 아카데미이길래 누군가 이리 열심히 준비를 하고 얼굴도 모르는 신청자 1인일 뿐인 나를 부르고 있을까? 육아와 게으름을 핑계로 안 갈 수 없네. 나는 가기로 마음먹었다.
아이와 첫 번째 축구 체험수업도 성공적으로 하고 재래시장에서 낮에 사 온 떡과 통닭으로 저녁도 먹고 생애 처음으로 가보는 시민 아카데미가 열린다는 수원시청 별관에 도착했다. 어두움이 깔린 시간에 관공서를 방문하는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춥고 어두운 밤 문이 굳게 닫힌 중앙문 앞에서 안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향해 이 유리문을 좀 열어달라고 헛짓거리를 1회 하고 다시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그 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전화를 받으신 담당자께서 멀리서 손짓을 하시길래 나는 비로소 아카데미가 열리는 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늘 겪는 일이라 괜찮다.
첫 주제 강연자이자 <이렇게 누워만 있어도 괜찮은 걸까?>를 쓰신 작가이기도 하신 안예슬 님이 당사자인지 연구자인지 지나가는 시민인지를 눈빛으로 또는 질문으로 물어보았다. 나는 당사자도 그 문제 연구자도 아니다. 일단 뒤에 흰머리 성성한 그리고 몇 분 늦은 탓에 앞에 앉아서 유난히 뒤에 난 흰머리가 뒤에 자리 잡은 분들 눈에 들어올까 어색함을 감추지 못하는 지나가는 시민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내가 왜 '외로움과 존엄' 주제를 다루는 시민 아카데미를 신청하고 갔으며 돌아와서까지 주제를 고민하고 있을까? 찬찬히 지나간 삶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나는 분명 20년 전에 취업과 실업, 분절과 반복을 거듭한 고립청년, 은둔청년, 외로움 청년이었다. 20대에서 30대 중후반까지 취업과 아르바이트, 구직활동, 불안정 노동, 실업, 해고, 직장 내 괴롭힘, 산재, 병원치료, 산재보상, 계약직 근로자 등등은 나의 이삼십 대를 설명해 주는 중요한 키워드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금은 일상생활이 가능한 착한 우울증을 갖고 살아가고 있으며 이 정도면 별 탈 없이 살고 있는 거라고 스스로에게 늘 용기를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그때의 시기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의 나에게 누군가 은둔청년, 고립청년, 외로움 청년에 대한 질문을 한다면 여전히 정책수립과 대응방안 그 모든 과정에 관련한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나의 생각과 의문이 딱히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인지는 알 수 없으나 20년이 지난 지금도 풀리지 않았으니 나름대로 혼자 고민해 보고 글로 정리해 보려고 한다.
왜 쉬면 안 되는 걸까?
대한민국에서 열심히 일한다는 것은 참 좋은 미덕이면서 최고의 칭찬이다. 수도권 도시에 살면서 나는 새벽 일찍부터 지하주차장을 박차고 나가는 씩씩한 차들의 출차소리를 잘 듣는다. 대로변에 이어지는 차량 행렬을 보면 또는 내가 그중 한 명이 되어 차량을 운전하는 운전자로 느꼈던 것은 아주 간단했다. 정말 모든 차들이 속도전을 벌이며 치열하게 어딘가로 가고 있고 한치의 시간 지체도 아깝게 생각하는 듯 용납하지 않는 모습을 볼 때가 많다. 나도 저렇게 출근할 때가 있었지. 모두가 동일하게 도로를 나누어 쓰면서 제한된 시간 안에 각자의 출근 과업을 정확하게 맞추기 위해 벌이는 속도의 전쟁은 때로는 경이롭게 느껴질 정도로 일사불란했다. 다른 나라 대도시의 모습들도 비슷하기는 마찬가지일지 모르나 나는 이런 분주한 차들의 운행을 보며 전혀 낯설지 않고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면서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나 한국에 살고 있구나 실감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모두 트랙 위를 달리는 삶을 살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라고 가정해 보면 좋을 것 같다. 동그랗고 은빛으로 빛나는 CD를 플레이어에 올바로 위치시키고 플레이 버튼을 누르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정말 잘 돌아가게 마련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무슨 플레이어에 CD 돌리는 일인가? 말도 안 되는 가정이 될 것이다. 하지만 보통의 평범한 생애주기에 따라 살면 학령기에 학교를 다니고 졸업하여 사회에 나가 취업을 하고 그 취업과 일상.. 먹고사는 일상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반복된 노동과 성과를 계속하여 창출해 나가는 것이 보통이다. 모두가 삶의 정의가 다르고 소중하게 여기는 방법이 다르겠지만 또는 인간의 성실함이라는 위대함을 깎아내릴 생각은 전혀 없지만 나는 여전히 의문스럽다. 왜 꾸준히 쉼 없이 달려야만 하는지..
트랙을 성과와 효율을 겨루는 경쟁의 공간이라고 가정해 보자. 모두가 삶에 대한 시각과 방향, 정의가 다르겠지만 어떤 사회 안에 속해 살아가는 구성원이라면 이 성과와 효율을 겨루는 경쟁의 공간이 존재하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잘 치르기 위해 그리고 대한민국 취업시장에 첫발을 성공적으로 내딛기 위해 치열한 취준생의 삶을 산다든지 어떤 회사와 기관에 취업성공을 하여 인정받는 직장인이 된다는 것은 모두 트랙에 올라가는 행위가 될 것 같다.
트랙 위에서 개인의 속도와 합류하기와 내려오기는 자유로워야 한다.
<신경 끄기의 기술>을 쓴 마크 맨슨의 유튜브 채널 중 한국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면 한국사회에는 다른 어떤 나라도 범접하기 힘든 높은 수준의 직업윤리가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다. 직장에 나가 어느 정도 일을 하다 보면 사람들이 일을 쉬기 위해 진짜의 이유든 가짜의 이유든 둘러대는 각종 이유와 변명이 수없이 많다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유독 개인적인 핑곗거리를 대며 일을 쉬려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인터뷰 장면이 있다. 나도 깊이 공감하는 바이며 이렇게 성실하고 투철하게 사회구성원 대다수가 동의하고 지켜온 직업윤리에 감사하며 살 때가 참 많다. 예를 들어 마트나 시장을 직접 찾아 구매해 오지 않고 인터넷 쇼핑앱을 활용하여 날씨 계절 시기에 구애받지 않고 원하는 물건을 집 앞까지 배송으로 받아볼 수 있는 사회는 얼마나 우리에게 편리함으로 다가오는가. 하지만 이 극도의 편리함 뒤에 숨어있는 야간노동의 현실, 어느 가장 또는 건강했던 청년의 급작스런 과로사는 또 어떠한가.
트랙에 올라가서 달리는 기간이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일정하게 존재한다면 트랙에서 내려와서 쉼을 선택하거나 재충전을 하여 다시 올라가는 시간까지 자신만의 시간을 꾸려가는 것이 자유로운 개인의 영역으로 남아있어야 함이 맞지 않을까? 하지만 왜 쉼이 보통 사람이 꿈꾸기 어렵고 이토록 닿기 어려운 상위의 개념이 되었을까? 넌 기왕 태어났으니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눈에 보이는 법조항은 없다. 하지만 모두가 무엇인가 동일한 물줄기의 속력으로 바다로 나아가고 있는 과업을 수행하고 있는 가운데 그 물살에 전혀 섞이지도 않으며 잠시 뒤에라도 합류하려 노력하지 않는 분절되고 흩어진 물방울들이 존재한다면 과연 그들은 어떻게 평가될까? 나는 이 얼토당토않은 물줄기 얘기에 고립청년이라고 명명된 사람들을 단순하게 갖다 놓으려 하는 것은 아니다. 남들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나 그들은 섞이지 않는 물방울이 아니라 매 순간 사회 속에서 존재이유를 찾고 나름대로 치열하게 삶을 살아나가고 있는 가능성이 담긴 인구라고 생각한다.
취업시장에서 최고의 경쟁률을 자랑하며 사회 구성원에게 한결같이 최고의 효율과 성과를 기대하는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나는 가장 먼저 사람들이 수없이 나누어 놓은 라벨을 떠올린다. 우리 사회의 사람의 가치와 효용을 단순히 라벨과 타이틀로 나누어 구분하려는 노력이다. 명문대, 지방대, 대기업, 중소기업, 정규직, 비정규직(계약직), 일용직, 번듯한 직업, 금수저, 흙수저, 학교내신 *등급등 개인 고유의 장점과 특성보다는 돈과 직결된 성과주의가 배경을 이룬다. 사람의 본질에서 멀어진 성과의 추구는 모두를 불행하게 한다.
정규직, 비정규직, 대기업, 중소기업을 나누기 전에 사회를 구성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삶을 건전한 노력으로 채워가고 있는 모습들이 얼마나 감동스러운가. 아이가 학교나 어린이집에 잘 다녀오기만 해도 일하는 직장에서 꼬박꼬박 업무를 잘 해내는 것도 모두가 기본 이상을 해내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 고립청년의 이야기로 되돌아가 보면 짧은 취업 기간, 실업상태의 되풀이로 반복되고 분절되어 버리는 고립의 삶을 살아나가는 것을 개인적인 노력부족 탓으로 돌리는 것은 바람직하다 못하다고 생각한다. 트랙은 열심히 달리고 내려오는 곳이다. 그것이 트랙의 존재이유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이 같은 효율과 결과를 낼 수 없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 보통 기성세대 기치관이 기대하는 평균의 기대치에 못 미친다고 해서 비난과 평가의 잣대에 힘들어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 쉼은 모든 인간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꼭 필요한 권리가 아닐까? 고립청년 중에서도 본인이 고립을 선택했다고 인식할 수는 있어도 사실 보통 평범한 수준 이상의 경쟁이 벌어지는 사회에 살아가며 취업 또는 생계가 수없는 분절과 반복으로 이어질 때 고립이나 은둔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결과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울이나 고립이 의지가 박약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노력으로 해결이 가능한 문제라고 구성원 대다수가 생각한다면 그것은 문제를 한층 더 악화시킬 뿐이다. 본인들의 한 번뿐인 인생이고 귀중한 삶인데 개인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좀 다른 얘기이긴 하지만 같은 질병의 종류인데 예를 들어 당뇨병이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는 것이 당연하지만 우울증은 의지가 박약해서 그런 거라는 시선 또한 사회 한쪽에 강하게 존재하고 있다. 그런 논리가 어느 정도 사실이라면 당뇨병 환자에게도 의지가 약해서 인슐린의 분비가 잘 안 되는 것이니 어서 개인적인 노력을 더 기울여 인슐린이 나오도록 해야 한다는 말 또한 성립해야 한다. 모든 질병의 치료에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의지 100퍼센트로 병을 나으라고 하는 것은 얼핏 듣기에도 이상할뿐더러 상대에게 불필요한 부담을 오히려 얹어주는 말일뿐이다.
고립청년에게 가장 필요한 말이 무엇인지 아는가? 이게 네 인생 최종결과물이 절대 아니다. 너는 젊고 기회가 여전히 많이 남아있어. 어둠만이 이어질 것 같은 터널은 언젠가 끝나기 마련이다. 너는 터널 한중간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렇게 느껴지는 것뿐. 건강한 밥을 먹고 규칙적인 생활을 유지해. 그리고 너는 혼자가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