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대해 생각해 보기

2024년 11월 29일 오늘도 눈이 많이 온 날

by 육아와 생각

일곱 가지 보물이 있다는 칠보산에 갔다. 계획되었던 것은 아니었고 집에 있기가 싫어서 나섰다. 칠보산에 대해 여러 번 검색은 해보았지만 정작 가기로 마음먹기가 어려워 2년의 시간이 벌써 흘렀다. 지리도 위치도 가장 중요한 날씨도 미리 점검할 줄 모르는 기분파는 네*버 지도를 지팡이 삼아 날씨가 궂어도 성실한 근무태도로 버스를 운행하시는 운전기사님 덕분에 눈이 폴폴 내리기 시작하는 칠보산 입구까지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기 직전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창밖을 바라보며 잘못 왔다는 것을 직감은 했지만 어쨌거나 오늘 칠보산에 내 발 한 짝이라도 들여놓고 싶다는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에잇.. 또 눈이 오네. 지겹다." 한 아주머니의 푸념이 들렸다. 어제도 혹자가 말하기를 100년 만에 처음 본다는 눈폭탄이 왔었고 그 어마어마한 눈들이 아직도 온 세상을 덮고 있기에 딱 적절한 말이라 평가해 보았다. 이번 눈의 양에 대해 나의 의견을 누군가 묻는다면 지금까지 온 것까지는 시원시원하게 와주었으니 어쨌거나 찬성(?)하지만 또 그만큼의 눈이 또 온다면 나도 눈을 미워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씨는 내 의견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인데 반기고 좋아하고 미워하고 원망하다니.. 산 입구를 한몇 번 헤매고 오늘은 산에 오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한동안 인적이 드물었는지 들어가는 초입부터 나무가 누워서 가지 말라고 가로막고 있었다. 나 혼자 있어서 객관성을 말할 수는 없으나 갑자기 동물소리를 들은 듯도 하고 순간 옆에 멧돼지나 고라니가 나타나도 하나도 이상할 것 없는 정적이 흐르는 공간에 낯설고 무서운 감정을 느꼈다. 눈이 펄펄 내리기 시작하는 기세를 보니 나도 단념하고 돌아서 버스 정류장에 섰다. 오늘은 도심 속에서 높은 빌딩이나 아파트숲과는 분위기가 전혀 다른 산세만으로 풍광을 즐길 수 있는 곳을 알게 되었다는 이득만으로 만족을 얻기는 했다. 정류장 전광판에 '폭설로 지연운행'이 몇 번 깜박이더니 얼마 오래 지나지 않아 버스가 다행히 와주었다. 날씨로 인해 한적한 버스 뒤에 앉아 얼토당토않게 이웃집 토토로에 나오는 고양이 버스에라도 탄 듯 이상했다. 보통 아이와 남편이 tv나 핸드폰을 보는 것을 옆에서 보고 있었을 시간에 집을 박차고 나와 영화 스크린 안에라도 들어온 듯 모든 것이 낯선 배경 속으로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에도 나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거울 속에 반사된 운전기사 아저씨의 얼굴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아마 처음에는 이렇게 날씨가 궂은날에 버스운행을 하는 사람의 감정과 마음은 어떨까 하는 호기심에서였을 것이다. 대형버스를 눈 속에서 조심조심 운전하고 있는 기사의 얼굴표정은 말 그대로 날씨를 그대로 반영한 듯하였다. 원래 약간 찡그려져 있는 인상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정말 평소에도 늘 찡그리고 있어 주름진 인상에는 미치지 못했고 누가 보기에도 뭔가 문제가 있나 '기분이 안 좋은 사람 건들지 말자.'라는 생각이 조금 날 듯한 중간 정도의 표정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산풍경을 벗어나 아파트 단지나 상업건물들을 좀 지나고 있으려나 눈발이 잦아들어 그의 주름진 얼굴 표정은 금세 펴지고 없었다.


고통이라는 감정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굵은 눈발이 날리는 날에도 안전상의 책임을 지고 승객을 많이 태우는 버스의 운행을 해야만 했던 그분의 얼굴에 나타났던 고통을 시작으로. 나에게 가장 처음으로 떠오르는 고통은 꿈이었다. 나의 우울이는 아주 떠나지는 않았지만 어느새 세력을 많이 잃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우울이가 생활 전반에 흐르지 않도록 일상생활 루틴에서 꽤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나와 오랜 시간 같이 걸어온 우울이를 싫다고 내쫓으려는 것은 아니다. 우울이가 있어도 함께 우아하게 공존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우울이 아침부터 넘쳐나는 상황은 좀 어렵고 불편한 감정을 많이 만들어 냈다. 아침에 우울이가 '자. 이제 스타트.'라고 시작했다기보다는 밤부터 집요하게 쫓아온 꿈들이 나를 힘들게 했었다. 꿈에게 당장 멈추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여전히 죄책감, 고통, 괴로움 등의 감정을 불러들이기 좋아하는 꿈들을 뇌가 만들어내고 탐닉하고는 있지만 '이제 너의 영향을 주는 패턴을 아니까 괜찮아. 지지 않아.'라고 말할 수 있는 가벼움을 얻게 되었다.


나에게 고통은 늘 함께였다.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해 뿌리가 뽑히고 할 일을 얻지 못한 할아버지의 분노로 덩그러니 구멍이 뚫린 외가의 방문을 보며 아이 수준에서 어렴풋이 고통이라는 세계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고통은 아이였던 내가 사는 집에도 동일하게 흐르고 있어서 아침에 깨어 밤에 잠들기까지 늘 숨 쉬는 공기와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고통이든 뭐든 저항할 수 없으면 그대로 수용하는 것.. 밖에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이 없었다.


외로움과 고통을 정확하게 아니 대략이라도 측량하거나 할 수 있을까? 외로움과 고통은 별개의 다른 감정인 게 분명한데 언제부터인지 그 시작도 분명하지 않은 두 녀석이 함께 어울릴 때가 많았다. 둘은 하나만 떼어서 수용하기 어려운 듯 함께 하는데 예를 들어 외로움을 많이 느끼면 고통을 수반하고 고통을 누군가 이해해 줄 수 없을 때 다시 외로움의 터널에 들어서게 된다. 아무도 오지 않는 낮에 집안에 머물던 반려견은 문 밖의 알 수 없는 사람소리와 발자국에 한동안 반응하지만 어느 순간 그 모든 소리들이 자기에게 의미 있는 방문이 되지 않을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짖지 않았다. 집안의 반려견이 알 수 없는 외부소리에 반응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느끼는 정적과 고요함은 어떤 것이었을까? 나 또한 아무도 찾지 않을 낮 시간에 최대한 아무도 모르게 마음 아래로 아래로 내려보내는 동아줄이 있다면 그것이 외로움의 깊이가 될 수 있을까.. 하지만 아무도 외로움의 끝까지 닿아본 사람은 없을 것이고 외로움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아래로만 향한다는 것을 알 뿐이어서 나는 측정하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고통은? 고통은 대략 측정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고통은 처음에 감당하기 어려운 어마무시한 크기로 왔을 거라 추측한다. 그렇게 크고 엄청나 대하기가 버거운 존재가 왔기 때문에 안간힘을 써가며 감당하려 하고 무게를 견디려 최대한의 인간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고통은 굉장히 큰 존재로 왔기 때문에 좀처럼 가질 않는다. 그렇게 쉽게 갈 존재이면 처음부터 고통으로 불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고통은 해결하려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임을 알게 되었다. 고통은 보통 쉽게 해결될 수 없는 경우가 많아서 그냥 거기에 두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똑같은 위치에 여전히 존재하지만 아직도 거대하지만 점차 거기에 무뎌지는 것일 뿐이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불행한 사건과 함께 엮어진 고통이 있다면 그 사건과 고통이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숨 쉬어 방금 일어난 것과도 같이 작용하지만 그리고 그 기간이 꽤나 길지만 거기에 점점 물을 타는 것이다. 오늘도 물 한 방울. 내일도 물 한 방울. 고통은 여전히 그대로 거대하지만 하루하루 부어 넣은 물방울들이 모여 힘이 돼주었고 마음이란 공간을 넓혀 놓았는지 고통이 조금이나마 비율적으로 작아진 듯하다. 보통 모든 사람들은 세상에 살며 양손에 쥐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고통을 잘 받아들이고 겹겹이 덮을 수 있는 회복탄력성이 있다는 것을 태생부터 알고 있을지 모른다. 나도 고통과 외로움, 상처, 트라우마와 정면승부하지 않고 그저 얇디얇은 보자기나 천만으로 충분히 덮어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덮어놓으면 충분하다... 가끔씩 들춰 보아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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