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연습실 가는 길의 단상

by andy

아파트를 나서서 이웃 아파트와의 사잇길을 지나 양재천 다리 건너 또다른 아파트 단지 상가 2층의 피아노 연습실에 가는 일은 나의 오랜 오전 루틴이다. 빼곡한 판상형 아파트촌을 헤치고 나와 영동교에 접어들면 갑자기 전망이 확 트이면서 우면산에서 발원한 양재천이 제법 넉넉한 수량으로 아침햇살에 반짝이며 탄천 쪽으로 내달린다. 가끔 다리 아치의 중간께에 멈춰 서서, 오리떼가 무리지어 떠다니는 모습이나 백로, 왜가리같은 섭금류 새들이 긴 다리로 한가롭게 물을 헤집거나 우아하게 활강하는 자태를 바라본다. 불과 몇 번의 날갯짓 후 날개를 좌우로 주욱 펼친 자세로 허공을 가르는 이들의 동양화 같은 모습은 천변 산책로에서 반려견을 산책시키거나 달리던 사람들의 주의를 일제히 끌기도 한다. 시선을 물 속으로 옮겨 보면 제법 씨알이 굵은 잉어 무리가 왕왕 보이는데, 그곳에는 누치같은 잉어류 외에도 버들매치, 동사리, 피라미 따위의 다양한 어종이 나름의 먹이사슬을 이루고 있다.


양재천을 지나면 자동차 도로와 아파트 사이로 보도가 이어지는데, 시기에 따라 각별한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보도 좌우로 식재된 플라타너스와 느티나무에 이 동네 까마귀들의 둥지가 몰려있기 때문이다. 재작년 늦봄 무렵 이 길을 걷는데 나무 위에 앉아있던 까마귀 한 마리가 내 머리를 스치듯 수직낙하해 꽤액! 괴성을 지르고 다시 솟구쳐 올랐다. 깜짝 놀라 올려다보니 나를 주시하고 있다가 연이어 다시 공격을 감행했고 냅다 뛰어가는 나를 집요하게 쫓아오며 위협을 가했다. 까맣고 큰 새가 공중에서부터 들이닥치는 것 자체가 공포스럽지만 머리 뒤에 근접해서 높은 데시벨로 지르는 소리는 가공할 만했다. 번식기에 예민해진 까마귀의 오상방위임을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나의 무고함을 어미 까마귀에게 항변할 길이 없으니 그 후로는 그냥 우산을 방패삼아 펼쳐들고 얌전히 지나고 있다. 내가 유일한 피해자가 아니었는지 얼마 전에는 큰부리까마귀에 대처하는 "시민 행동요령"을 알리는 안내문이 인근 공원에 내걸렸다. 어쨌든 그 일을 계기로 서울이든, 까마귀로 악명높은 일본의 도시든 까마귀를 만나면 먼저 눈부터 내리까는 비굴한 습관이 생겼다.


그런데 이 큰부리까마귀의 위협도 한동안은 덜할 지 모르겠다. 작년에 동네 가로수랑 아파트 단지 내 나무들의 가지가 몽조리 쳐졌기 때문이다. 가지치기야 일상적인 일이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작년에는 굵은 가지들까지 통째로 잘라내는 강전정을 해버려 지역 나무들이 일제히 사지가 잘린 채 맨몸으로 서 있는 볼품없는 몰골이 돼버린 것이다. 한여름 아스팔트가 달아오르는 뙤약볕에 아름드리 천연 터널로 몸을 식힐 틈을 만들어 주고 겨울에는 눈꽃으로 제법 장관을 연출하던 은행나무, 느티나무, 플라타너스 나무였다. 구원(舊怨)이 있는 까마귀야 그렇다 쳐도 까치, 참새나 직박구리처럼 대체로 무해하고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던 새들의 행방은 신경이 쓰인다. 가지치기를 하면서 알이나 새끼가 있는 둥지는 관련법과 조례를 지켜 안전하게 처리했을까?


그나저나 서식지에 급격한 변화를 겪는 게 비단 새만은 아닌 것 같다. 몇년 전 동네 여기저기에 '우리 아파트가 더이상 안전하지 않음을 당국으로부터 확인받았다'는 내용의 현수막이 붙기 시작했는데 문구의 왼쪽과 오른쪽 끝에는 '경'자와 '축'자가 각각 월계관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과거 비슷한 시기에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섰던 이유인지 이 재건축이라는 것도 가지치기처럼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나보다. 내렸다 오르기를 거듭하는 동네 현수막들을 보면 그 단지의 재건축 추진현황이나 조합원들의 열망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우리집 주인은 재건축으로 인한 이주가 시작될 때까지 나가지 말고 있어달라고 부탁한다.


한겨울 차고 구름이 낮게 내려앉은 날 헐벗은 나무들과 쫓겨나고 없는 새들, "아파트 소유주님"께 건설사 임직원 일동이 올리는 새해인사 현수막을 보며 상가 2층으로 향하는 날은 이래저래 마음이 스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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