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1장 10

기억과 기록

by 엄도경



두려움과 마주하는 건

두려움을 이해하고

더는

두려움에 휘둘리지 않기

차라리 두려움으로 도움닫기.




노랑 배추 애벌레는 자석에 빨려들듯이 나무 위로 올라갔어요.

저 너머에는 저 위에만 속한 무언가가 따로 있는지 높은 가지 고치 속으로 냉큼 들어갔지요.

동작은 둔탁해도 단호한 몸짓

마치 모범답안을 들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어요.

나비로 거듭나는 확률이 단 2%일지라도

그리운 날개

살 빛나는 공중

꿈꾸는 애벌레는 좁은 방 안에서 끝까지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기억일까요?

기록일까요?



성장과 발전 그리고 상승

사람의 목표도 언제나 저 위 높은 데에 있었지요.

자신의 가망성을 하나씩 찾아내고 펼치는 일은 사람이라면 당연한 일이니까요. 그렇다고 특별한 방법이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이전에 속했었던 곳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려면 선을 넘고 또 넘어야 했거든요.


'여유롭고 평화로운 노후'

사람들이 감히 쳐다볼 수 없는 곳까지 더 높이 올라있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늘 부족한 자리

가문의 영광. 비행(飛行)하려니 비행(非行). 역사적으로 흐르는 전쟁터.

이것도 기억일까요?

기록일까요?



엄마는 풀리지 않는 현상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을 끝내 이기지 못했던 거예요.

‘상승 욕구’ 하나만 갖고 열정적으로 땅에 붙박았는데

밖으로 드러나는 것만 쫓다가 생(生)의 은밀한 비밀은 영원히 놓치고서 뭐 하나 가슴에 따뜻하게 담지 못하고 떠나던

퀭한 시선.

잊히지도 않고 잊을 수도 없어서 내 가슴도 아팠습니다.

높은 자리가 꿈이었었는데 결국 '졌바둑'을 두었다고 절망하다 무너진 거니까.


무엇을 위해서 열심히 사는지도 모르고 엉뚱한 곳에서 서성거리던 엄마와 달리 나는

제대로 갈 수 있을까?

하긴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서 제대로라 표현하는 내가 우습긴 했지만 그건

왠지 이게 다가 아닌듯한,

짐작할 수 없는 큰 흐름이

구름을 헤치고 튀어나올 것 같고,

존재하지 않는 걸 상상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홀림인지 울림인지,

묻어둔 기억인지 무의식인지,

유래를 알 수 없는 진동(振動)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왜 엄마와 내가 다른 길을 가야 하는지 나 자신을 이해시키지 않고는 선뜻 돌아서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머릿속에서는 벌써 나도 모르게 가설을 세우고 있더군요.



가설 1. 분명히 본향(本鄕), 내 집에서도 애타게 나를 찾고 있다.

가설 2. 지구에는 고급스럽게 변성하려고 왔다. 뇌 회로 정보를 업데이트한다면 귀향길도 열릴 거다.

가설 3. 잘 된 문제는 좋은 답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따라서 나도 좋은 문제일 터이니 내 안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노랑 배추 애벌레는 창공을 날아오르는 나비가 되려고 변태(變態)를 꿈꾸었어요.

나에게도 땅과의 작별은 이미 예정된 절차,

그곳이 어디든 포기하고 적당히 살고 싶은 나 자신과 큰 전쟁을 치러야 하는 건 달라질 게 없었습니다.

보풀보풀 세상을 거스르던 꼬맹이 감정이

노년의 심정을 지렛대 삼아 "막차를 탔는데 못할 게 뭐가 있냐" 되뇌며

공포로 점점 작아지는 어른 나와 한 판 붙어서

치졸한 성질, 비루한 마음을 확 뜯어고쳐 '사랑'으로 거듭나는, 변성(變性)의 진화를 도모하며

그렇게 해서 내 집으로 돌아갈 건지

아니면 줄 세워 무게 달아 줄줄이 패잔병을 만드는 이 세상으로 다시 기어들 건지

확실히 선을 긋고 점프해야 했습니다.

머리가 하늘에 닿을 때까지 계속.


내가 바뀌면 뇌가 바뀐다.

뇌가 바뀌면 내가 바뀐다.

내 한 몸은 내가 책임져야 하므로 애초의 설계대로 커넥텀(connectum, 뇌지도) 수리를 마치고

"돌아가자"

오직 이것만 기억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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