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희망은 그래도, 엄마

2장 5. 준순(浚巡) 하지 말자

by 엄도경



기회가 왔어도 기회를 잡지 않으면 기회란 애당초 없었던 일이었어요.

다른 세계가 와 있더라도 알을 깨지 못하면 신세계는 만날 수 없으니까.



‘그라운드 제로’와 ‘공의 경계’는 동전의 앞뒤처럼 하나였지요.

삶이 시작되고 죽음이 벌어지는 가장 근본적인 시작점이 ‘아해’인 것처럼, 몸은 핵무기가 폭발하는 재앙의 중심지라서

자체적으로 그라운드 제로를 품고 있었어요.

본래부터 몸은 물을 가장 많이 갖고 있어서 수소 함량이 제일 높잖아요.

마음이 삶의 키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거였어요.

탐욕스러운 세상에서 내 마음을 잘 잡는 게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내 몸이 상하기 때문인 거예요.

빼앗기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빼앗는 사람도 피폭자 신세를 면할 수가 없는 건 ‘아해’가 원하지 않아서 그래요.

결국에 승자가 한 명도 없는 패배자의 땅 ‘그라운드 제로’에서 사는 거지요.



망했다는 건

봉은사역 네거리에서 공개 처형을 당하고 강제 퇴거가 집행되는 것 같은 일이라 무엇보다 몹시 자존심이 상했어요.

사회의 동의를 얻기 위해서 타인의 시선으로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그렇게 자신을 볶아댔었는데, 끝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거니까.

그 건 나무 밑에서 함께 즐겁게 놀다가 갑자기 천둥 번개가 내리쳐서 죽어라고 자기 자동차로 뛰어들었는데, 나 혼자만 재수 없게 자동차 문고리를 잡고 벼락을 맞아 널브러진 꼬락서니.

내 눈에도 얼마나 참혹했던지 창피했어요.


우산도 없이 맞는 핵겨울은 나 때문에 더 힘들었어요.

하루라도 빨리 벌 받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지 못하면 미칠 것 같았으니까요.

하지만 보란 듯이 나의 존재감을 세상에 알린다 해도 신경계 손상, 흉한 흉터는 그대로 남아 있을 뿐 아니라,

눈이 멀거나 혈관 마비 같은 심각한 후유증은 각오해야 하는 삶을 다시 반복하는 일이라서

주춤하게 되었어요.

가장 아름다운 날이 기다리지 않을 걸 미리 알아채서 주저주저, 준순(10⁻¹⁴) 했던 건 아니에요.

생각해보니까 습관처럼 평생을 멈칫거렸던 거 같아요. 마음이 썩 내키지 않으면서도 망설이고 준순 하다 돌아가고 또 돌아갔거든요.

그럴 때마다 수소 핵(10⁻¹⁴)이 폭탄처럼 퐁퐁 터졌을 테고

몸이 낡아질 대로 낡게 될 때까지 켜켜이 쌓여갔을 테니까.




참혹할 정도로 아팠던 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어요.

지인들의 거침없는 무시. 따가운 냉대, 혐오의 시선은 얼마나 끔찍한지 내가 누군지 보여주는 것으로 복수하고 싶었지만 아해가,

이기기 위해서 그쪽으로 이긴 사람들 곁으로 가지 말라고 말렸어요.

엄마의 ‘그라운드 제로’는 만회할 수 없어 허망했었지만

시간이 내 편이 되었으니 이번에는 새길을 닦아보라고.

덕분에 불타오르는 지옥 탕에서 지난 세월의 나, 못생긴 마음을 한도 없이 만나 정을 뗐습니다.



그라운드 제로는 영점 처리된 인생에 있어

'빈곤'과 '가난' 중에서 방향을 새롭게 설정하는 변곡점,

그러니까 인공의 숲에서 고층 빌딩을 올려다보던 삶을 떠나 자연의 일원으로서의 나를 들여다보는 ‘공(空)의 경계’, 불확실성의 세계로 넘어가는 길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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