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4. 빈 들에 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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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아
문제가 문제를 풀어야 하는
나는 문제아
지구 궤도에 사람의 몸으로
지구 시간에 인간의 삶으로
사고처럼 던져진 하나의 사건
세상의 문제를 모두 푼대도 사건의 실체, 나를 풀지 못하면 세상에다가 쓰레기나 잔뜩 쏟아내고 집에는 가지 못하니
나는 문제아.
삶은 문제지
몸은 해답지
답을 찾아가는 키가 내 마음인데
열쇠를 쥐고도 풀지 못하는 건 키가 너무 커서 그래, 뉴턴의 열쇠로 마구 열려니까 그래.
주의 깊게 응시하고
고요하게 눈을 맞춰야 겨우 보이는 양자(量子) 열쇠 구멍을
큰 것만 쫓던 왕눈으로 보려니까 꼬리의 꼬리까지 감춘 내 안의 미시세계, 심연(深淵)
닿을 수 없으니 다시 또 나는
문제아.
❞
이 시대는 아시다시피 아이에게 가르칠 지식은 별로 남아 있지도 않고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현실은 가난과 치매가 지뢰밭처럼 깔려있는데
종점까지 가는 버스를 탄 것까지
모두 다 우연이라 치더라도
‘삶이 나한테 묻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봤어요. 인류사상 가장 진취적인 노인 세대일진대 어떻게 문제를 풀 건지 붙어보라고 등 떠미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가능성을 파고들어야 하는데……
나한테는 시점이 중요했어요.
겨울이란 이 시점.
진범을 잡으려는 수사관처럼 진실을 찾아야 할 것 같았거든요. 그건 목숨을 구걸하는 것보다 사람 생명의 비밀을 밝히는 게 더 중요하게 되었다는 의미기도 했습니다.
바쁘니까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자고 외면했던, 어렸을 때의 꿈이 되살아났어요.
그렇다고 제보자가 꿈이었던 건 아닌데 나를 고발하는 운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냥 속 편하게 살자 생각했던 게 틀에 박혀서
결국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해 나다움을 잃어버렸으니까
그 지점부터 재수사를 시작할 수밖에 없는,
그게 아니면 지금의 ‘백세 상황’이 도무지 설명되지 않았어요.
내부고발자의 운명은 용기가 안 나서 아이 때에는 할 수 없었지만, 이제라도 하지 않으면 영영 나를 찾을 수 없을 거 같아 절박했거든요.
긴 겨울.
난생처음 가는 길이지만 꽃처럼 연어처럼 끝은 분명히 매듭지어야 하니까 흩어진 마음의 갈피갈피에서
가닥을 잡아 동선을 정리해야 했습니다.
인생의 겨울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기회일 테니.
겨울은 시야가 넓어져서 좋았어요.
늦가을부터 시작된 대청소에 나목(裸木)만이 남아 강 건너 기슭에 오두막집도 훤히 보였거든요.
굴뚝에 저녁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면 하루를 마감하는 신호 같아 저녁 시간이 평화로웠는데
어느 순간 굴뚝이 멈춘 날에는
행여 그 집 식구들 밥 굶는 게 아닐까……,
덩달아 밥맛이 떨어지고 밥술이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힐끗힐끗 사정을 살피고 있는 따뜻한 눈이 그때 생겼어요.
사방이 어두워지고 빈 나뭇가지가 비파처럼 강바람을 켜면
재생 버튼을 누른 것처럼 밤새도록 연주했어요.
슬픈 가락에 마음이 자꾸 일렁거려서 마음을 다잡고 안으로 들어가다가 어느덧
깊은 눈이 생겼어요. 사각지대에 있던 마음조차 이해할 수 있는 눈이.
욕심과 양심을 구분하지 않았던 어두운 나의 과거,
삶에 겁(怯)을 먹은 엄마 모습이 내게서도 보여서 취객처럼 시뻘게진 얼굴이
너무 창피해 쥐구멍으로 숨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밤이면 먼동이 틀 때까지 뒤척뒤척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따뜻한 눈이 그럴 때마다 토닥토닥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연결되어 있어서 죽는다고 사라지지 않는 거라면 차라리 이 기회에 청산하는 게 더 좋은 일 아니냐고 안심시켰어요.
고치 방에서 허물을 모아 나비 날개를 짓듯이
겨울 방에서 평생 저지른 잘못이 연금술처럼 너와 나를 이해하는 깊은 사랑으로 거듭나면 집으로 날아갈 수 있는 거라고 다독였어요.
가보지 않은 길이 진흙탕일까 무서워서 몰려다니는 바람으로 분탕칠 하지 말고
그 자리에서 깊어지는 나무처럼
나의 욕망이 무(無)가 될 때까지 긴 겨울을 견디라고 당부했어요.
나는 지금 내가 나에게로 돌아가는 계절에 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