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희망은 그래도, 엄마

2장 3. 백 세 찬스

by 엄도경


나는 내 생각이, 마음이, 행동이 끝내 나를 어디로 인도할지 항상 결과가 궁금했어요.

누구의 딸로, 엄마로, 직원으로, 국민으로 전개되는 역할이 내 삶의 진면목인 건지,

나의 참모습은 어떻게 펼쳐지고 죽음과 죽음 이후까지도 잘 연결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게 알고 싶었던 거예요. 그 길을 걸어야 하니까.

질문하다가 상처 받고 어느 순간부터 입 다물고 말았지만 내 안에서는 계속 묻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뭐 할 건데요?’ ‘그럼 어떻게 되는데요, 결국에?’

물음은 이런 거였죠.

“대학에 가서 뭐 할 건데요? 자꾸 높아져서 뭐가 되려고요? 부자가 되면 어떻게 되는데요? 더 많이 알아 뭐 할 거예요?”

질문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어요.

감히 “성서를 계속 공부하면 어떻게 돼요, 평생을 하면 뭐가 달라지죠? 묻다가 혼나고, 부처님 말씀을 들어서 무엇을 했어요?”

사서 눈총도 받아봤어요.

나 자신은 아이 때 감성으로 평생 같은 질문을 대놓고 했으면서

엄마가 되고 다중인격자가 되었습니다.

아이를 쇼핑카트에 꾸역꾸역 구겨 넣듯 가르쳤거든요.

상상력과 쾌활함, 희망, 신뢰, 사랑 같은 귀한 감정을 싹까지 싹둑 죽인 거 같아서, 가시처럼 죄책감이 목에 걸려 잔기침을 자꾸 했어요.


약육강식의 세계는 힘 있는 집 자식은 건드리지 못하면서 밑에서 치받고 올라오는 꼴은 보기 싫어 반골이라고 찍어내는데

내 아이는 착하다 못해

물러 터진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가치 순위에서 동심을 뒤로 미룬 게

바보 같은 짓이었다는 걸 너무 늦게 겨우 알았어요.

아이가 압력에 휘둘리지 않고 독립적인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라는 모정(母情)이

다들 자기 자식을 위하는 판에서 내가 빠지면 어떻게 될까…… 그 생각만 했었으니까요.

만약 내 안의 또 다른 세계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엄마처럼 나도 내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고백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도 엄마를 기리는 의미에서 해명이지만 변명처럼 해야 할 거 같습니다.

사람도 꽃과 같다면 갈등과 선택이 반복되는 인생을 전해주지 않았을 테니까요.

잔혹한 시대 조류(潮流)에 가정환경까지

흑역사의 목록이 저마다 다른 등짐을 짊어지고 태어난 나의 엄마, 그의 엄마들.

삶의 무게에 등이 휠 것 같아 숨 한 번 크게 쉬지 못하고 애면글면하다, (물론 그건 아니겠지만) 묘하게도 엄마 역할을 마치고 얼마 안 가 가을이 오면 사라졌어요.

그렇게 엄마들의 한이 하나로 모여든 묘비명 ‘백 세 찬스’

추적추적 가을비로 새긴 게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요!


영겁(永劫)의 세월,

사람의 난자 알에 심어진 겁(㤼)이 재물을 겁탈(劫奪)당할까 망할까 조바심치던

마음의 행로가 엄마에게서 ‘ctrl C + ctrl V’라 둘러대려다가

“요즘 애들은 겁이 없으니까!” 하던 말이 생각납니다.

겨울이면 대대적으로 대청소를 펼치는 숲 속의 나무처럼

당신의 등짐도 풀어주고 벌거벗은 나를 되돌아보며 겁(怯)을 씻어내 기쁨으로 밝혀달라고 부탁하는 것 같아서요.


나 하나가 존재의 참모습을 밝히면 이기적 유전자로 보였던 엄마들도 줄줄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용기를 내달래요,

육십에도 나를 찾으러 나서도 만날 수 있으니까.

죽음 이후에도 비전이 존재한다는 걸 안다면

젊은 엄마는 가볍게 삶을 누리고 그의 아이는 동심으로 세상을 누빌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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