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 영점 조정,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냐?’
발단(發端)
“사람, 쉽게 안 변해요. 어머니.”
그날은 왜 그랬을까. 처음 듣는 말도 아닌 데다 사람 때문에 상처 받지 말라는 뜻인 줄 알면서, 숨이 막히는 것 같았어요. 가지를 치고 말뚝을 박으며 잔뜩 긴장하고 사는 것 같아, ‘그게 다가 아니야.’란 한마디를 하지 못하고 돌아섰습니다.
예보에 없던 소낙비를 맞으며 긴 밤을 걷는데 시야가 흐려지고 앞이 잘 보이지 않았던 건, 비단 납작 스웨이드 구두 때문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일찍이 우리가 함께했던 소소한 일상에서 지금 알고 있는 대로 ‘엄마’를 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에게 전쟁터에서 생존하는 방법만 가르쳤던 게 아닌지 자꾸 돌아보게 되네요. 자신을 지키고 사회를 돕는 개인으로서 자유롭게 살기를 바랐으므로, 그랬으므로 마음을 키워줬어야 했던 거였어요. 하지만 삶에 대한 이해가 빈약하기 그지없어서, 지키고 돕는다는 서술어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온도 차를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을 믿다가 수없이 치이고 당해도 그들이 내적 에너지를 키워주는 설정의 1, 2, 3~~ 이고, 아이처럼 마음이 열려야 하늘이 열린다는 사실을 몸소 구분 지어 보여주지 못했던 겁니다.
가장 가슴 아픈, 하나를 꼽자면 유쾌하게 많이 웃어주지 못한 거예요.
삶이 까다롭기는 하지만 웃음을 아낄 정도로 심각한 건 결코 아닌데, 웃을 때 가장 예쁜 얼굴을 아이 마음에다 새겨놓지 못했어요. 아이는 엄마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건만 엄마는 모의고사 성적표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으니, 실기(失期)한 거지요.
어느 날 어른이 되어 외롭고 힘겨울 때 불현듯 떠오르는 환한 미소, 따뜻한 추억에 다시금 자신을 믿고 발걸음을 위로 옮기는 것인데 말이죠…….
그러나 자신의 판단력이 틀렸다는 것을 알아야 거듭 반성하고 점차 관대해져 급기야 마음이 열리는 인생행로도 있어서, 글에다 새기고 있습니다. 오십 대에 이르러서야 나도 엄마와 다른 길, 다른 삶을 살게 되었으므로 용기를 내는 거예요.
전개(全開)
항상 땅끝을 바라보던 나의 엄마,
강력한 힘을 바라고 바랐던 건, 활력이 넘치는 모습으로 보란 듯이 노후를 즐기고 싶어서 그랬던 거였습니다. 확신에 찬 눈빛에서 뿜어 나오는 광채는 따라올 수 있으면 따라와 보라고 도발하는 것 같았어요.
달릴수록 커지는 엄마의 바람, 자신하고 경주하는 건지 세상인 건지 점점 모호해졌습니다.
이윽고 해가 저물고 출발선으로 돌아온 엄마, 크게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은데 어딘지 심상치 않았어요. 꼭 ‘바람 든 무’ 같다고 할까, 뭔가 이상했습니다. 뜨거운 바람에 귀까지 어두워졌던가. 바람의 방향이 바뀌고 있다는 것도 또 판이 뒤집히고 있는데도 느끼지 못했어요.
젊을 때는 땅에서 부는 바람만이 거센 것 같지만, 사실 장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는 구간의 이음매가 정말 허술하거든요. 연결 부분이 꼭 흑연 판처럼 약해서 무게를 조절하지 않으면 건너가기가 쉽지 않아요.
늙어 하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귀곡성보다 더 무서워 미리미리 준비해야 해요.
기승전락(起承轉落),
죽을 날을 받아놓아 난이도가 최고도인 노인의 여생.
유령처럼 변해가는 자기 몰락을 노인 3기까지 꼬박 자신의 눈으로 지켜보는 게 어떤 심정일지 알 것 같아서, 알고 싶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치매가 축복이라고 말할까 봐, 적어도 입동 늦어도 동지 전에 두 눈을 감는 게 최고라고 답할까 봐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요.
위기(危機)
나의 오십 대는 엄마와 달리 참담했어요.
사십 대부터 뇌출혈에, 술을 마신 적이 없는데도 얼룩덜룩 굳어가는 간(肝), 갑상샘 고장에 자가 면역질환 등은 불행의 서막에 불과했습니다.
삶은 자꾸 멀어지고 부표처럼 표류하는 자신을 보면서도 돕지 못하는 건, 공포였어요.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 존엄성을 지킴으로써 ‘내가 나를 다함’을 꿈꾸며 사는데 무질서에 휩쓸려 황망하게 사라진다는 건…….
그런 나약하고 허망한 현실에 삶을 바치는 게 개죽음 같았거든요. 울지 못해 죽어간 낙태아와 다를 게 없어서 그 자리에서 증발하고 싶었습니다.
빤히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 덕분에 공허를 허공에 맡기고 ‘엄마’를 지킬 수 있었지요.
‘정녕 다른 삶은 없는가’
나에게도 거친 십 대가 있었거든요. 비록 밖으로 내비치지는 않았으나 삐딱하기만 한 그러나 본질을 벗어나지 않는 질문을 던지는, 겁 없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냐. 그걸로 끝이냐?’
예를 들어 ‘공부를 많이 하고 높은 자리에 앉으면 그게 다냐?’를 내게 물은 것처럼, ‘갑부가 되고 그다음은 어떻게 되었나?’라고 다시 묻기도 했어요. ‘VIP 병동에서의 최첨단 치료가 최종 목적은 아니지 않은가.’ 병실을 나서며 ‘그런 게 자기를 구하는 거라고 누가 그랬을까?’ 혼자 궁금해했습니다.
좋은 말씀을 들으면 거룩해지는 기분에 문제의식이 사라지다가도 그런 종류의 만족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나, 무질서 구역에서 질서의 차원으로 옮겨진 것은 어떻게 증명되느냐고 발칙하게 천착했어요.
아, 나는 이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길에서 길을 잃었어요.
엄마 동네로 돌아간다는 건 죽기보다 싫어 가던 대로 가지 싶다가 그마저도 불길해, 동상처럼 그 자리에 굳어버린 두 발. 설령 답이 없더라도 또 삶을 바꾸지 못한대도, ‘그래서 어찌 됐느냐’에 붙들려 행성 궤도를 징글징글 도는, 출구 없는 시간의 미로에서 말간 물이 흐를 때까지 짜고 뜨거운 눈물을 모조리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울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어떻게 웃을 수 있지?
나만이 질문의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해 세상에서 벌 받는 것 같았어요. 얼굴색이 새까맣게 변하고, 운전대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서 이렇게 떠나가는구나…, 기다렸어요.
난 진정 몰랐습니다. 부끄러운 줄 모르고 세 차례나 그것도 아무 앞에서 터져버린 말간 울음이 거친 불길을 잡을 줄이야‽ ‘그렇게 다음을 궁금해하는 네가 더 궁금하네. 자, 보여줄 테니, 잘 봐.’
기승전결(起承轉結), 에피소드 #11의 ‘전(轉)-전(轉)’이 대반전의 서사를 차곡차곡 쌓아 올려 공간이동을 준비하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어요.
귀에 익은 목소리, 아해가 깊은 곳에서 묵직하게 울렸습니다.
“세상에 부는 바람은 다 지나가는 바람이야. 그게 뭐라고 게 머물고 있니. 넌 너무 서투르더라. 너를 믿지 못하고 두려움을 믿으니까 공포가 몰려오는 거지. 네가 진정 보고 싶었던 건 연장 하나 쥐지 않은 빈손으로 하늘까지 연장하는 삶, 아냐! 자신을 믿으면 삶도 기를 펴는 것, 그게 순서야.”
나는 다시 발길을 되잡았어요.
아해는 빛의 각본을 알고 있을 터이니 엄마를 믿는 아가처럼 나를 내맡기고, 젖 먹던 힘으로 결기를 다지며 ‘전(轉)-결(結)’로 들어갔습니다.
절정(絶頂)
‘활기’로 시작된 나의 노인 1기.
광자(光子)가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리는지 천천히 흐르는 삶. 그 많던 목주름을 한 줄씩 지우기에 쇄골 미인이라도 만들 작정이냐고 아해에게 농담처럼 물었던 적도 있습니다.
‘무언의 설득 효과’라 할까, 논란의 여지가 줄 것 같아 좋았어요.
나도 이런 내가 되어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아이가 새로운 현실을 이해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울지 알겠거든요. 아무리 실제 상황, 리얼리티를 말해도 내용이 워낙 판타지라 근거를 찾아 증거의 증명력을 갖추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영점 조정’이 더 필요할 것 같아, 빨간 펜 오답 수정을 기대하며 줄 긋기를 하게 되었어요.
빛에너지가 몸 안에 쌓여가고 보이지 않던 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자주색 실루엣이 해를 드리우다 몽글몽글 핵융합하는 하얀 해 주위로 보라색, 군청색, 분홍색 헤일로가 갈마들더니, 럭비 공보다 몇 배는 더 긴 검정 뭉치가 떠올랐어요. 해를 등지면 허공에 걸린 노란색, 초록색 긴 뭉텅이가 졸졸 따라와 자동차 유리창에 앉아있기도 하고, 어느 날부터는 태양에서 뻗어 나온 빛의 길에 이중 테의 작은 동심원이 바글바글 마을을 이뤄 감탄을 자아냈지요.
스케일이 달라졌나 봐요.
일 년 반 전에는 미국 서부의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에서 좀 색다른 체험을 했습니다.
두 눈을 감자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파노라마가 끝없이 펼쳐졌지요. 마크 로스코가 떠올랐던 건 두 가지 색상의 조화 때문이었어요. 그러나 화가의 그림처럼 사각형은 없었습니다.
동그스름한 알맹이가 떠오르자 부드럽게 에워싸는 외곽.
핵자 색이 바뀔 때마다 서로를 가장 돋보이게 하는 반대색을 펼치면서 계속 들고 나며 추상화를 그려내는데, 그렇게 선명하고 아름다운 빛깔의 향연은 난생처음 본 하늘의 절경이었습니다.
중심을 확장하자 오호라 어우러지며 커지는 주변,
심지를 쥐었다 풀었다 가장자리 끝까지 살랑살랑 간지럽혀 놓고서 명멸하는, 점 점, 그리운 점, 영 점.
주변에 기대어 다시금 새로운 씨앗을 흩뿌리는 색채의 마술
허공(10⁻²⁰)은 색조의 변주로 생명의, 우아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색계, 컬러풀 월드였어요.
그때 알았습니다. 이제 죽어 건너가는 곳은 이원론을 빌미 삼아 색깔 논쟁으로 차별하고 솎아내는 이 땅을 벗어나, 다름이란 차이로 한껏 풍성한 보색(補色)의 세계인 것을, 그러므로 온전한 팀플레이를 구가하는 화학 공식을 실컷 살다가, ‘회귀 회로’를 재설정해 돌아가는 것임을 깨달았어요.
‘광대한 하늘의 숭고 체험’,
하지만 건조한 사막에서 받은 선물에 마냥 취할 수는 없었습니다,
혈관 출혈을 잡고 나서 수술에만 신경 쓰던 집도의처럼 살펴야 할 게 있었어요. 위험하다는 자외선을 왜 보는지, 일상생활에서 시각적인 변화가 따로 없는지, 그리고 병리 현상을 수반하는지 나에게 설명해줘야 했지요. 눈을 감으면 때때로 북극광 오로라 발광현상이 꾸준히 보여 그것도 정리하고 싶었습니다.
늦봄부터 늦가을까지는 나도 인공 숲에 머물렀었어요.
엄마 양이 함부로 문 열어주지 말라고 당부했는데도 엄마 목소리를 흉내 낸 늑대에게 새끼 양이 잡아먹힌 것처럼, 도심은 사랑, 평화, 공존의 감언이설, 가짜 소리가 넘쳤습니다.
같이 뛰고 같이 땀을 흘렸으니 땀방울 성분도 같은 동료애일 텐데, 속셈은 보이지 않아 목적이 달라도 알 수 없는 혼돈. 밤새 축축한 바람이 불면 어제의 언덕은 흔적도 남지 않으니, 엄마는 “해무가 짙으니까 해안 통제선을 넘지 말라” 끝없이 말했지요.
빌런이 밀물을 타고 밀려와 금언이었던 말씀
단단히 박힌 돌이 되더니 어느덧 넘지 못할 산이 되고, 위험에만 반응하는 안전제일 주의자가 되어 어느덧 삶은 이겨야만 지켜지게 되니
어느덧 겁쟁이. 따뜻한 호의는 가리고 차가운 회의를 방패 삼다 모가지도 굽은 어느덧 노파로 소멸한다면,
그것도 인생의 한 스텝인 걸 모른 채 사소한 것들을 믿지 않다가 무한 루프,
아해를 품은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경계의 끝장이란
늑대가 아닌 나한테 내가 잡아먹히는 것.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각(地殼)을 뒤흔들어놓고서 행인처럼 사라진 빌런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었어요. 상실에는 의미가 있어서 어떤 빌런은 그의 등 너머 우주를 망원경으로 보게 하고, 연이어 나타난 또 다른 빌런은 구름 양탄자를 두고 갔습니다.
의식의 인과적 영향력을 자기 주검으로 재조명하면서 승화(昇華)라는, 금강석처럼 값진 지각(知覺)을 끄집어내 준 적도 있었어요.
더 깊은 질문을 불러온 아픔이 고여서 빛나는 ‘초월’을 꿈꾸고 숭고(崇古)를 그리워하니,
허공이 간절히 기다렸던 게지요. 정신의 끈을 꼭 잡고 아해를 지켜내는 나를 보고 싶었던가 봐요.
결말(結末)을 향하여
우린 떠나야 해요.
올챙이 적 활개 치던 물을 등지고 뭍에 올라와 팔짝거리던 개구리의 삶을 이제 접고 도도히 떠나야지요. 나비의 삶이 기다리고 있어 애벌레가 꾸물 꼬물 고치로 기어든 것은 다들 그렇게 생겨났기에 생긴 대로 살아가고 들 있는 거잖아요. 그러므로 내 한 몸도 같은 듯 같지 않은 삶이 따로 있으니, 그렇게 내가 나를 다함을 실현이라고 하는 거겠지요.
어디로 가도 그게 길이 된 젊었던 늙은이는 길을 잘못 든 것인 양 당황하고 있을 거예요. 발목에 힘도 없는데 화살표가 아예 없으니, 그렇다고 길을 만들 수도 없어 난해한 겨울입니다,
그러므로 겨울답게 겨우살이,
참혹한 추위 속에 벌거벗은 용문산의 은행나무가 흙과 함께 깊은 뿌리로 봄을 준비하듯이 겨울철에 닿은 우리는 허공 깊숙이 뿌리를 내리며 내일을 열어야 해요. 나무는 도생(倒生)이라 땅에 뿌리를 내리고, 인간은 정생(正生)이라 머리에다 뿌리를 내야지요.
늙은이의 시간이란 어찌나 귀한지, 방전된 신경세포가 없어지기 전에 더 깊숙하게 나에게 들어가야 합니다. 뚱뚱한 애벌레가 고치 방에서 날아오를 때 우리도 떠나야 하거든요. 역경의 땅도 ‘한 번 구르니 나무 끝이 아련하고 두 번을 거듭 차니 사바가 발아래’니, 등줄기를 곧게 펴고 빳빳이 고개를 쳐든 우리는,
해(解)를 찾는 초월의 존재입니다.
그네가 가장 높이 오르는 찰나 양 날개를 펼치려면 정신을 맑게 해야 해요.
오직 이 한순간을 위해 존재했던 양 인력(引力)의 줄탁동시, 허공도 내가 당기는 전하량만큼 당기고 있답니다.
죽은 사람이 산삼 뿌리를 먹고 되살아났다는 전래동화를 이해했던 건 빛에너지 덕분이었습니다. 첫날부터 온몸에 맑은 물과 산소, ATP 에너지가 충만하게 차오르는데, 살아있는 생동감이 어떤 건지 직접 체험했거든요.
빛에너지가 누적되고 리드미컬한 양상이 나타났습니다.
광자(光子)가 신호를 주면 트랜지스터가 켜지는 것처럼 세포들이 찌릿찌릿 쫀득하게 일렬로 줄을 서고, 머리로 굵은 전류가 힘차게 흘러들어 등줄기 척추를 초고속으로 내달려 전기장을 전파하면, 손끝, 발끝도 공명을 일으켜 온몸이 떼창을 부르는 것 같았어요.
빛에너지를 계속 공급받고 세포가 달라졌거든요.
전기적 특성이 변했는지 충전이 가능한 배터리, 2차 전지가 된 것 같아요.
엄마의 속절없는 소멸과정이 일반적인 문법대로 계속되는 방전에 엔트로피를 제거하지 못한 거라서, 특히 ‘활성’을 유지하면서 늙어가는 기전에 관심이 갔지요. 세포의 다이내믹을 반도체 같은 구성이 빈틈없이 채워주는 것 같아서요.
빛이 ‘봄’을 조명한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눈이 많이 상해서 오 년 넘게 안구(眼球)로 피가 몰려드는데 건장한 주먹이 틀어쥐는 느낌이었습니다. 광 도파관이라도 만드나, 렌즈를 깎아 사출성형을 하는가 엉뚱한 상상을 했던 것은, 짧은 파장대의 높은 에너지를 가진 자외선, 감마선을 보게 돼서 그랬어요.
‘내가 보는 색들이 벌, 나비가 보는 것과 같은 걸까?’
나비한테 같은 색이냐고 물어본 적도 있었습니다.
분명히 광 투과성은 좋아졌고, 어쩌면 빛에너지가 세포 속에서 고굴절률, 고광 확산의 고분자 화합물의 합성을 돕고 있는지도 몰라요. 영양실조, 골다공증 같은 문제들이 드러나야 할 때가 지난 데다, 기분 좋은 호르몬이 흐르는 순간을 느끼거든요.
그리고 세포의 변화를 주도하는 파장대는 적외선일 확률이 높아요.
에너지를 받는 시간과 공간이, 실내에다 한 차례는 한밤중이니까요. 게다가 눈만이 아니라 피부, 침 등 전신에 물이 찰랑거리는 걸 보면, 건조 문제를 해소하는 질서가 세포에 있나 봐요. 인체의 70%가 물이지만 단백질 등 나머지도 거의 물이므로, 적외선 광자가 세포질의 물 분자를 통해 전자기파의 모든 파장을 사용, 그 주파수 대역에서만 발로 하는 잠재력을 끄집어내는 것 같습니다.
특히 물이 3,000nm의 적외선 파장대에서 벌집형 육각 구조물을 만들고, 그 안에 운집한 음전하 전자가 270nm의 짧은 파장을 흡수한다고 해서, 보라, 분홍, 검정 색깔을 보게 된 메커니즘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전자들이 벌집 구조물 안에서 나오지 않으려 한다는 게, 자연이 육각형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말하는 것 같아 신비했어요.
늙어서는 어느 순간 숨을 내쉬면 쉰 냄새가 나지요. 엄마가 그랬거든요.
산해진미도 소용이 닿지 않아 아무리 먹어도 전자를 보충할 수가 없으니까요. 늙으면 다 삭는 거라고 나 보고도 별수 없으니 두고 보라고 했답니다.
엄마는 행복의 척도가 재물이라 많은 걸 살피지 못했는데 세상을 떠날 때도 정작 무엇을 놓쳤는지 모른 채로 갔어요. 포지션이 달라진 걸 장면의 전환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판국이 변환되었으므로 노화 적응이란 허공에의 조율이며, 나를 찾아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건 쿨롱의 전기력(10⁻¹⁹)을 회복하는 것임을 상상이나 했겠어요.
줄탁동시의 인력이 전자와의 만남인걸.
알았었다면 뉴턴의 제3 법칙에 따라 그물코(10⁻¹⁹)를 훌쩍 넘어갔을까요.
알았었다면 더 많은 눈물을 쏟았을까요. ]
영을 찾아가는 길목에서 공허한 숫자 놀음의 반복으로 행여 돌아오지 못할까, 무려 네 번의 잇따른 시간 배치는 몸과 우주가 화성을 맞추면서 공간감을 채워가는 여과의 미학,
가진 거라곤 오직 시간밖에 없다는 걸 경고한 알람인 줄 알았었다면
10⁻¹⁵, 수유(須臾)
너무 얄미운 동료가 오면 오는 대로 ‘그래. 그때 그 사람도 곧 지나가더라’ 웃어주고
10⁻¹⁶, 순식(瞬息)
잘해줘도 괴롭히는 상사는 부메랑, 같은 돌부리에 넘어지지 않도록 숨 한 번 크게 쉬고
10⁻¹⁷, 탄지(彈指),
가족이란 이름으로 밑바닥으로 끌어내릴 때 뭉친 한숨을 허공에 튕기면서 하늘을 그리고
10⁻¹⁸, 찰나(刹那),
그래도 끊어지지 않는 인연이면 크게 외치기. ‘인생은 찰나. 미운 놈에겐 떡을 준다.’ 그렇게 내 안의 사각지대를 내가 보살피니 거기가
10⁻¹⁹, 육덕(六德), 하늘의 풍경을 볼 수 있는 위치. 천 경분의 일,
미처 잘못 판단한 곳은 없는지, 뱉은 말이 실천되었는지 깊숙이 나를 살피고 나를 지켜 허공에 뿌리를 내리니,
음이온 전자가 줄지어서 세포로 날아와 빈 몸을 감싸 안네요.
그러니 천 경 자산가인들 부러울 리가!
완벽한 대본에다 정교한 구성까지 구비하고 하루도 쉽 없이 찾아오는 빛,
삶에 초대받은 인간.
세포는 일련의 상호작용으로 아름다운 화성(和聲)의 완곡을 꿈꾸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