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희망은 그래도 , 엄마

3-12. 노년의 소찬, 법론 : 수소

by 엄도경


삶이 만만하거나 쉬웠던 적은 별로 없었어요. 그런데도 오십 대는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참담했습니다. 새롭게 자리를 잡는다는 면에서 이십 대와 비슷했지만, 노년의 삶이란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낯선 행로, 끝까지 생소한 실험이었습니다.

내가 알 수 없었던 건 노인의 마음

벌건 대낮 코엑스 네거리에서 눈물인지 콧물인지 저 홀로 뻘뻘 진땀을 흘리며 오그라들고 있는 눈사람의 고해성사는 괄호 밖 영역이었습니다. 생물학적으로는 오래된 어른인데 '다음'을 예측하지 못해 쩔쩔매는 모습이 몹시 힘들고 외로워 보였어요. ‘에이, 어른이 뭐 저렇담…….’


어두운 안개비에 돌연 널따랗던 길이 너울대는 무지개다리

출렁출렁 빨간 경고등

무엇보다도 삶에 미안했습니다.

머물 데도, 도망칠 곳도 없는 생의 끝자락에서 소속감도 사라지는데 어정쩡하게 서성대는 나란 사람은 도대체 뭔지, 진정 길이란 게 있어서 다른 삶을 펼칠 수 있기는 한 건지 생각이 뒤엉켜, 그때처럼 시간이 무서웠던 적은 없었어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떠나야 하는 길, 마음 같아서는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을 알아내 마지막 경계를 차분히 건너가고 싶은데. 시류에 휩쓸려 황망한 심리의 실마리를 어디서부터 되잡아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적어도 목적지 정도는 알고서 이 삶을 시작했었다면, 그랬더라면 파국은 피했을까?

흔히 위기는 기회라는데 마지막 고비에서 나는 '돌아갈 힘'을 획득하게 될까?



지구여행의 목적이 미지 세계를 탐방하고 연결망을 넓히다 돌아가는 자연스러운 귀속이라면, 지천명(知天命)은 우주 집으로 돌아가는 법을 익혀야 하는 시점이지요. 설령 삶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대도 마지막 숨결마저 천 개의 퍼즐 조각을 맞추는 옹골찬 이순(耳順)이 귀향의 이정표를 끄집어낼 거예요.




『공기는 온통 독에 차고, 삶은 또다시 불안한 것이 되었다. 내게는 두 가지가 중요했다. 첫 번째는 세계의 모든 독에서 벗어나 살 수 있는 정신적 공간을 만드는 일이고, 두 번째는 야만적 폭력에 맞서는 정신의 항거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 헤르만 헤세 -



잠을 자려고 눈을 감으면 자주색, 녹색의 오로라가 눈앞에 펼쳐지곤 했어요. 엘로우 나이트도 아닌데 불현듯 펼쳐지는 북극광(北極光)에는 오묘한 힘이 있어 심경의 변화를 심층적으로 일으켰습니다. 그저 이 삶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어떻게 나를 다할 것인지 알고 싶어서 ‘엄마 이브’에 가 닿으려던 건데, 그게 불씨를 지핀 걸까. 뭉게뭉게 마음이 들어 올려지고 말간 슬픔으로 채워져, 엄마를 고쳐 보고 생명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한없이 애처롭고 쓸쓸한 생명

생명을 만든 우주.


지루할 만큼 변화가 없었던 '엄마 이브'의 연대기

긴 세월을 돌아 기어이 변곡점에 다다르는 서사 구조.

여느 아이들처럼 나도 엄마에게서 ‘어른’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녀는 정의하기가 좀 애매했어요.. 똑같이 ‘영과 일’로 자유를 찾아 나선 걸 보면 동지일 것 같은데, 마지막까지 섞이지 못했거든요. 엄마는 거액을 움켜쥔 복권당첨자처럼 들떠서는 바짝 따라붙지 않는다고 성화를 부리는데, 문을 열고 날아가고 싶었어요. 등을 떠밀 때마다 일그러지는 나의 표정 그리고 역설적인 시선몰이, 차곡차곡 응결된 분노가 내 인생 후반전에 방향 전환의 동력이 되었습니다. 엄마를 등지고 엇갈리면서 비로소 앞뒤가 들어맞는 그림이 나의 운명이었는지,

진북(眞北)만 가리키던 나침반 바늘이 ‘생존 너머의 생명’을 응시하게 했어요.

저마다 처절한 ‘시대 앓이’

‘전제 오류’를 끊어내고 높이 날아오르는 운명 속의 존재들.



세상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 굶어 죽거나 얼어 죽는 폐허 속에서 나라를 일으켜 세워야 했던 세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고 한국전쟁에 젊음을 빼앗긴 엄마는 지치면 안 되는 사람처럼 일했어요. 하루라도 쉬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돈벌이는 지상 과제였습니다.

더 많이 배운 환경을 지렛대 삼아 성큼성큼 위치 이동하는 모습이 어느 순간부터는 보기에도 흉했지요. 하지만 근검절약의 근성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순도순 소꿉놀이, 일상의 감수성을 희생시키고 이룩한 성공의 탑은 꽤 설득력이 있어, 엄마의 딸들도 못다 한 숙제를 물려받은 것처럼 열심히 풀었어요.

엄마 세대의 땀과 눈물, 고통 위에 세워진 녹색의 세련된 도시.

어디를 가도 깨끗하고 위생적인 도로는 아름다운 사계절을 풍경화에다 알록달록 담아내고, 꿈결 같은 스카이라인의 고층빌딩은 한밤중에도 크리스마스이브의 꽃불처럼 온 세상을 유혹했습니다.

딱 60년 만에 첨단 문명의 물꼬를 튼 고고한 자태

찐해지는 미세먼지 겨드랑이에 아련한 불빛

“날라 오렴. 서둘러야 할 거야.”


아이들이 자꾸만 아팠습니다.

따라가기는 벅차고 한 발 쉬면 페이스를 잃게 하는 사회의 가이드라인.

희망 고문을 미끼로 성장하는 냉혹한 세상.

섬세한 삶을 관통하는 거친 폭력.

모든 게 다 말끔하고 멀쩡해 보이는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이 늪에서 최대의 수혜자는 과연 누구인지 의심스러웠어요. 분명히 아이들은 아니라는 것. 그것만이 확실했습니다.

애들이 너무 많아 이부제 수업을 했던 그 시절에는 그래도 동심(童心, 同心)이란 게 살아있어 희망도 풋풋했는데. 지금이 더 암담했어요. 남부끄러운 일로 주변에 폐 끼치지 않으려고 소박하게, 아이들이 남부럽지 않게 살기 바랐던 건데. 자식 일이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극단적인 가족 이기주의 앞에서 비비 뒤틀리고……,

해방구는커녕 배출구도 없는 잔인한 세상으로 흐를 줄은 몰랐습니다.

남이 뭐라고.




독립적인 인생을 원했던 엄마와 나는 나무의 삶을 동경했습니다.

엄마는 공놀이에 재미를 붙여 공일이면 땅따먹기에 나섰어요.

뼛속 깊이 사무친 식민지 시대의 열등감, 두려움이 자신도 모르는 속마음이었는지 물질의 풍요로움을 추구했어요. 그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특혜와 우대, 특권의식에서 존재의 의의와 삶의 의미를 찾았습니다.

엄마 등 너머로 세상을 바라보았던 나.

키 큰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 때쯤에야 안으로, 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코드명 ‘직립’의 사고 실험은 순전히 우연이었어요. 무얼 해야 삶이 충족될지 몰라서, 기본적으로 간결하게 생김새만 들여다본 건데, 빨강 신호등에 붙잡힌 행인처럼 인체라는 섬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어요.

등대처럼 우뚝 선 모양이 방향을 가리켜 더 위로 오르라는 예시 같았어요. 나름의 성공을 거둔 엄마였지만 왠지 살다 만 것 같아서, 일생의 범위를 노화와 죽음 그리고 비상까지 한 단위(unit)로 삼았습니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나를 찾아내고 싶은 호기심도 있었지요. 인류의 탐험이 신대륙 발견에서 심해(深海)로 옮겨갔듯이 나도 미지의 심해(深解)를 찾아 심해(心海)로 잠수했습니다. 정답이 거기 있을 거란 기대는 '일'도 없었지만, 달리 할 것도 없었어요.

나에게 직립은 연 놀이 같은 것.

한강 변을 달리다 나뭇가지에 끊긴 방패연 때문에 울다 잠든 꼬마애가, 노년기에도 청년 정신으로 자신을 탐험하다 죽는 순간 명료한 정신으로 우주선에 올라 허공(10⁻²⁰)에 돌아가는, 연(緣) 놀이였습니다.


사실 노인에게 ‘방향 전환’이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거든요.

엄마는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것도 도박인데, 하물며 노후를 거는 건 노망 난 짓거리라고 주저 없이 과거로 돌아갔어요. 하지만 지역 일대를 소유한 동물의 왕 사자의 죽음에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란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잖아요. 세상에서 죽음보다 모호(10⁻¹³)한 난제가 다시없는데, 끝자락에서 마지막 기회를 포기하는 건 그야말로 비극적 말로 같았습니다.

이 세상에는 나의 건재를 알릴 필요가 없지만, 저세상이라면 다르지 않을까? 뭐라도 할 수 있는 순간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삶을 버렸다는 신호로 해석될 것 같았어요. 방향을 바꾼다는 건 내가 나를 지키는 길. 불안하면서 외면하고 순응의 미덕을 실행하는 척 게으름을 은폐하며, 요행에다 운명을 맡기던 습관, 유전자와 투쟁하는 일이었어요. 더욱이 일 회로 끝날 싸움이 아니기에 매번 나를 이겨야 했어요.

그러므로 지구 레이스 최종 결산의 묘수는 어디까지나 정면승부, '모 아니면 도'.

대대손손 생존전략 ‘저울질’, 준순(10⁻¹⁴)의 뿌리를 쳐내며 ' 0‘에 더 가까이 파고들었습니다. 바람개비와 해를 따려고 빙글빙글 허공을 달렸는데, 갑갑하게 몸에, 틀 안에 갇혀있던 '아해'가 풀려나고 있었어요. 찰나(10⁻¹⁸, 0.000000000000000001)가 일으키는 미세한 물보라에 공명하는 육덕(10⁻¹⁹)과 빛에너지의 ’ 결맞춤‘.

오로지 내 안의 영에 다가가려던 결의가 암호 같은 디지털 리듬을 일깨웠습니다. 그 위로 조화로운 간섭파의 화성(和聲)이 얹어지자 현실이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사고의 경계 너머 작은 숫자들이 들먹들먹 동화극 대본이 활짝 펼쳐진 거예요.

긴 노년기와 '숨은 그림 찾기'

망망대해에서도 집으로 돌아가는 그림이에요.



‘엄마 이브’는 청출어람(靑出於藍)에 기대어 기어이 전체 그림을 완성해요.

별 하나가 만들어지는데 천문학적 시간이 필요하듯이, '엄마 이브'가 꿈꾸는 '존중의 시대'도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을 벌써 알았대요.

저 위에서 보면 국경이 애당초 없는데 경계 지으며 자격을 따지고 사람을 차별하는 지구적 인간사는 이기적인 딸에서 영락없이 탐욕스러운 딸에게로 대를 물려, 얄팍한 이익 계산법에 피를 나눈 가족끼리도 공평하게 나눠 먹는 걸 싫어하니, 망설임 없이 손꼽았습니다. 암호문 ‘人’을 실현할 계몽(enlightenment)된 딸이 줄줄이 나타나 '죄수의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그날을!

조합의 정밀성과 절차의 정교성에 따른 구성력으로 펼쳐지는 새로운 '분자 시대'를 예감한 거예요. 예를 들면 엄마 세대의 가장 큰 쟁점이 냉혹한 빈곤에서 벗어나는 ‘양적 성장(量的 成長)’이었으니, 그다음에 등판하는 딸의 소명은 당연히 ‘질적 성숙(質的 成熟)’을 실현하는 방식으로 말이죠.

욕심 때문에 피폐해진 양심을 되살리고 상향 의지의 '직립 코드'를 작동시켜 회향(回鄕)하기를 바라 마지않아요.



엄마는 정체성을 바깥에서 찾았습니다.

엄마의 꿈은 비바람 맞지 않고 편안하게 사는 것이었어요. 마지막 그림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 아늑한 거실에서 따뜻한 홍차와 창밖에 펼쳐지는 설경화를 감상하며 고지를 대물리는 전략이었습니다. 행성에서의 대장정을 마감하는 결(結)이 여름과 가을의 연장선이라면 실로 바람직한 묘책인데, 자해(自害)적인 기획일 가능성에 대해선 전혀 생각하지 않았어요. 불안과 성공에 취해 가을에 두는 훈수 또한 적체된 정체성으로 봄여름에 해가 될 것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썰물의 감회, 강도 높은 밀물에 급격히 떠밀리면 한동안 멍해져요. 강풍을 동반한 쓰나미에 지진까지 들이닥치니 죽음을 느끼고 변화에 맞설 용기 따위 생기지 않지요. 정신을 가다듬고 무너지는 삶에서 엄청난 방향 전환을 꾀하려는 그 신호를 알아채야 했는데, 엄마는 허무감에 휩싸였어요.

다중의 압박, 급격한 충격파에서 ‘해야 할 일이 정확히 뭔지’ 알아내는 심기일전(心機一轉)의 시점에, 호랑이에 먹히지 않으려고 산야를 뛰어다니다 늑대 굴속에 내던져진 표정을 짓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노인의 삶은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 무너져내리는 것. 제아무리 나무를 좋아했기로서니 아무려나 식물인간만은 바라지 않았을 텐데, 길이란 길의 몰락, 무한에의 연장에 실패한 치매는 가장 고약한 형태의 상황 종료였지요.

최후의 방어선인 세포가 핵폭탄처럼 극단적으로 파편화되는 내재성을 소위 배운 사람이 몰랐을 리 없을 텐데 피하지 못했습니다. 세속적 성공에 눈이 뻘게 그날이 그날인 일상에서 주파수가 전혀 다른 새길이 생길 리 없었던 거죠. 일하지 않아도 돈이 쌓이는 시스템, 보조 수단에 자기 경영권을 넘기더니 그나마 낡은 길마저 꼬리를 감추고 말았어요.

긴 노년, 지적 유희로 한가롭게 내면세계를 탐구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동심을 살았다면 마지막 순간까지 주어(主語)였을 텐데…….



겨울은 날을 세우는 결기(決起)의 계절.

끝이 보이지 않는 긴 가뭄으로 죽을 만큼 힘겨웠던 고비도 겪어봤고, 고생 끝에 낙이라고 옹기종기 아이들과 꽃구경도 나서고, 또 환하게 타오르는 붉은 단풍 아래서 한바탕 시원하게 웃어젖혔던 기세를 몰아 대대적인 환경 미화, 대청소 차원에서 공허한 숫자놀음의 물줄기를 확 틀어버려야 해요. 꽃은 지고 튼튼한 씨알 한 알로 영글기 위해

행성 인생의 긴 겨울은 별나라의 봄으로 피어나는 준비 기간

머리에 새로운 뿌리를 더 깊게 길게 닦아

허공으로 날아가버린 연(緣)과 재접속하는 겨울나기

사선(死線)을 넘어서 ‘봄’의 빗장을 열려면 지구에서 했었던 그 어려운 일을 또다시 시작해야 하므로, 분에 겨울만큼 쌓이고 쌓인 내적 추진력을 이용해야지요. 고작 땅의 영웅이나 되려고 태어난 게 아니라면 정신적 존재로 거듭나기

‘생존에서 생명으로’

높이 더 높이 위로 올라요.


삼시 세끼로부터 해방된 나의 노년기는 삶 자체가 정말로 단순해졌어요.

‘에너지 획득’이란 측면에서 비교적 자유로워진 게 반전의 시작인데 모두 ‘전자’ 덕분이다 싶어요. 한편으로 떠날 준비도 착착 진행되고 있어서 남은 생은 우주 적응훈련으로 생각하지요. ‘69’도 ‘9’처럼 경계선을 넘어서는 숫자 같거든요. 빛에너지를 받고 구 년을 넘어서고 턱 밑으로 바짝 다가온 일흔 살에 기류가 완전히 바뀌고 있습니다. 더는 이 세상에 속할 수 없다는 바디 시그널, 몸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요. 의식도 관심사도 이 세상을 뒤로하고 있습니다.

빛에너지를 받으며 달라진 영역을 하나 고른다면 ‘눈’이에요. 한 번 고장 나면 다시는 고칠 수 없다는 수정체가 젊은 시절의 독서력을 회복하여 놀랐는데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눈 세포는 죽을 때까지, 아니 어느 경지에 다다를 때까지 계속 변화되지 않을까 싶어요. ‘봄’에 거는 기대는 분화의 정점이자 시작점인 제3의 눈에 집중되는 빛에너지 때문입니다. 해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이중동심원 안의 문양이 과연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그렇게 눈동자를 조절했었는데, 몇 달 전 ‘그것’이 보였습니다. 새로 개설된 심신의 와이파이로(路)를 내달리며 미확인된 설정값 하나가 또 튀어나온 것 같은데, 이 또한 영원에의 비행을 위한 조율(調律)로 생각하고 있어요.

이제 옛것은 내게서 이렇게 무너지고 있는데…….

마흔 줄에 들어선 나의 아이들이 혹여 현실에 파묻혀 그림 같은 동화를 꿈꾸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대 달라지지 않겠지요. 진실은 묻혀있을 뿐 영원히 덮을 수 없기에,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고 또 찾고야 말겠다는 집념이 있다면 우리는 내 안의 자신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인체에 장착된 판타지 장치 ‘아해’에 관해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세포도 꿈이 있는가.

식물이 광합성을 통해 탄소동화작용을 하듯 우리는 질소동화작용을 벌이는 것 같아요. 영양분을 받아만 먹던 처지에서 빛에너지를 받으며 능동적으로 ‘자기 조직화’를 펼치고 있습니다.

공기에서 가져온 무기 영양분, 질소를 곧바로 유기화하는 효소가 생겼을까? 아니면 DNA에서 잠자던 특정 기능이 깨어나 ‘아해’를 돕는가? 뿌리혹박테리아처럼 빛에너지를 바라마지 않던 어떤 균의 뜻하지 않은 작동이란 말인가? 혹은 그 모두를 종합한 경우의 수가 많아진 것일지도요. 형질 변경 때문이든 다른 무엇이든 나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해명되어야 할 기능입니다.

아무래도 나무와 인간 사이 공통의 연결고리인 ‘직립’에서 ‘자유로워라’의 논리적 완결성이 유래한 것 같거든요. 어쩌면 나를 찾는다는 게 종속 영양생물인 동물에서 식물처럼 ‘자가 영양생물’로 전환하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닐까도 싶고, 정상으로 돌아간다는 게 뭘까 궁금해요. 하필 이 타이밍에 더 정교해진 고분자 중합체 단백질을 통해 높이 상승하는 혁명도 감히 상상해 봅니다. 눈앞에 오로라가 펼쳐질 때마다 내 몸이 지구를 따라 자석이 된 것 같아 더 큰 무엇에 연결된 노인의 비전이랄까, 잃어버린 인류의 마지막 진입로를 찾은 것 같아 ‘생명의 창발성’에 공감하지요.


‘아해’의 활동을 양자효과(量子效果)와 연계시키며 달라진 것은 호기심으로 반짝거리는 아이의 눈동자로 ‘다음’을 궁금해하는 거예요. 애써 무엇을 하지 않고 겨울답게 다만 ‘분수’를 지키는 이유입니다. 빛에너지를 호흡할 때 ‘전자’를 끌어온 세포가 양성자(H⁺)로 물 분자를 만들어 다른 세상 같거든요. 어차피 이 세상은 봄 여름의 것이고 여차하면 가을이 있어, 겨울이 끼어들 틈이란 게 너무 뻔하잖아요.

그보다는 엔딩 크레디트에 999번째 나의 엄마를 시작으로 거슬러 적고 있어요. 수천 년 응축된 지성의 특혜를 몽땅 이 시대로 몰아준 절절한 모성, '엄마 이브'의 큰 사랑을 꼭 기억하고 싶어요. 지상에서의 마지막 날, 아이들은 억눌림과 폭력의 역사에서 오늘을 일구어낸 할머니의 이름을 검은 화면이 멈출 때까지, 가슴으로 한 자 한 자 읽어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 자막과 동시에 끝나는 진혼곡에 ‘엄마 이브’의 짝사랑은 마침내 위로받을 거예요.

이제 남은 약간의 시간.

죽는 순간까지 삶이란 실험은 역시 세포에 초점을 맞추려 해요. 많이 늦었는데도 정성스럽게 '아해'에 귀 기울였던 ‘지속(duration)’이 예상치 못한 현재(present)를 안겨주어서 하늘만큼 기뻐요. 인생이 과연 나를 어디까지 데리고 갈까?

흥미진진합니다.




『자연의 법칙과 일치하기만 한다면 진실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또한 자연의 법칙과 일치하는지의 여부를 아는 데 실험만큼 좋은 것도 없다.』 - 마이클 패러데이 -



봄여름 지나 알만하니 가을 살만하니 죽음

무지갯빛 거품을 쫓는 저들은 나의 초상(肖像).

알래스카의 반환점을 돌아 강원도 남대천 ‘기억의 공간’에 몸을 푸는 연어의 마지막 여정을, 철퍼덕 철썩 ‘엄마 이브’를 찾아 나서던 힘찬 물질과 줄을 그어도 될는지, ‘의식의 변증법’의 질량과 같다고 할 수 있을지 망설여져요. 그러나 역사적 감수성, 회복된 상상력에 마지막 나의 삶이 달라졌다고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치유의 힘은 역시 변주의 슬픔을 이해한 쓸쓸함에서 나오는 걸까.


우리 모녀는 하나의 커다란 흐름 속의 조각들

하늘로의 연장 선상에서 땅에다가 마침표를 찍기 위해 뭐라도 해야 했던 상황적 존재였어요. 한없이 후회하는 게 있다면 “지금 아는 것을 아이들이 슬하에 있을 때 알아, 얘기해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입니다.

근원으로부터 너무 멀어 망각한 본질, 동기를 찾다가 얼토당토않은 '왜'에 사로잡히게 된 것도 원류(源流)에 닿으려던 ‘엄마 이브’의 의도였을 겁니다. 무시하고도 싶었는데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권리를 찾는 일일 수도 있고, 이 역시도 꿈에 관한 것이어서 상상력으로 밀고 나아갈 밖에요. 설령 꽝일지라도.

빛에너지는 인체와 밀접하게 맥락 되었으며 ‘직립 상태’와 깊게 연관되었으므로…….




모처럼 하늘이 열려 펑펑 쏟아지는 눈꽃에 하얗게 길이 사라지던 날

‘엄마 이브’를 따라 올망졸망 고척동 스카이 돔보다 큰 분자 구름 게이트를 통과하면, 길 위에서 더는 길 잃을 일 없는 허공(10⁻²⁰, 해분의 일).

해(垓) 개의 군집(群集)이 한데 모여 동그랗게 타오르는 태양도 군론(群論)의 세계입니다. 노인의 비좁은 마당 수챗구멍까지 따라와서는 끝까지 비추고야 마는 해, 그러고 보면 바다도 비슷해요. 육대주를 도도히 흐르던 수많은 강과 팔방 십이 방의 더러운 하수, 오물까지 살뜰히 받아들인 오대양 역시 해처럼 지구생명체를 먹여 살리고 있어요. 그렇다면 지구 기억 공간에서의 인간의 삶 역시 해가, 바다(海)가 보여주고 있는 해(解)를 유일의 법으로 삼아 대칭으로 답해야 하는 것 아닐까.

바다를 칼로 잘라도 하나로 합해지고 도끼로 해를 조각조각 분절하여도 하나이어서 빛나듯이 그렇게 하나…….


태양계의 일원인 행성들

지구 행성에 몸담은 동식물

피부색과 성별이 다른 인간군상

사람 안에 서식하는 세균 군총

이 중 무엇 하나 섣불리 ‘탈맥락화’할 수 없는 우주 공간에 평등하게 놓여 있으니, 종교, 출신, 사상으로 편을 가르며 해(害) 끼치는 군중(群衆)을 탈피하여 다원성을 이해하고 다름과 어울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해로운 방사선으로부터 지구생명체를 가까스로 지켜내는 얇은 대기층

국립공원 계곡마다 온갖 동물을 품어 두툼한 책갈피

동틀 녘 새들의 노래에 풀잎 따라 허리를 펴는 개미

이슬에 양치하고 꿀벌과 입 맞추는 해바라기

바람 냄새에 고개를 내밀다 젖은 날개를 슬쩍 햇살에 보여주는 고치방 나비.

은하수가 쏟아지는 밤 달맞이꽃 자장가에 코~ 잠드는 벌레와 식물이 지구 최강자가 될 때까지 그들의 공생을 지켜준 맑은 숲같이,

인공의 빌딩 숲에서도 차이로써 서로를 일으켜 ‘인간(人間)이었다’ 답할 차례가 아닐는지!



지구적 공간은 무엇에나 특별한 경로니까요.

복마전(伏魔殿) 마당에도 사람 사는 느낌의 바람이 불어오면 떫기만 하던 장맛이 구수하게 익어가는 마을의 깊은 맛, 육덕(10⁻¹⁹)을 익히려 잠시 잠깐 허락된 생명

집채만큼 쌓인 허물에 노을처럼 붉어진 노인의 앙상한 볼

창백한 동굴 오색영롱한 빛 깊숙해 부끄러움으로 양 날개를 짓는 소중한 곳이에요.




『우리는, 우리의 판단력보다는 도리어 대수적 계산에 신뢰를 두어야 한다.』

- 레온하르트 오일러 -


무한등비급수.  수학백과. 네이버..PNG



헝클어진 머리

절반을 접었더니 따뜻한 가슴

또 절반 접으니

허기진 항아리 밑 빠진 배

탐욕스러운 배가 가슴을 만나면 어느새 맑은 머리, 게가 허공(10⁻²⁰)인가



노화는 태세 전환을 요구하는 ‘신체 언어’ 예요.

중력의 차원으로 돌아가고 싶으면 체급을 올리라고 거품이 꺼지고 모래 폭풍에 휩싸이는 신호를 온몸으로 내보내지요. 지구에서 어서 방을 빼라고 기를 팍팍 꺾으면서 보챕니다. 죽음 속에서도 생명의 씨앗을 지키려면 영혼과 육체에서 점차 몸을 떠나는 방법을 준비시켜야 해요.

사랑, 정의 같은 낱말의 조합으로 그럴싸하게 명분을 포장한 수사학의 허망한 범람

본능적으로 유리를 추구하는 가면 속 민낯

모자란 능력은 뒤로한 채 성급하게 앞장서는 불타는 욕심

어떡하든지 저만 챙기는 수 중에서도 가장 낮은 하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입

욕망도 실망도 원망도 버거워서 잎을 몽땅 털어내고 침묵에 든 가지가 모진 겨울바람에도 떨궈지지 않는 마지막 잎새에 처음 온몸으로 울고 말았습니다. 자신을 마주한다는 건 덜 떨어지고 못생긴, 못난 자신과 가만가만 심연에 머무는 일, 뒤늦은 후회인지 끝없는 복기인지 절반을 접고 또 접고 접어 돌돌 말리다

처마 끝에 나란한 참회의 고드름

반짝이는 햇살 한 줌에 눈물이 뚝 뚝

버퍼링이 일어나지 않는 진실한 깃대 영을 향해 0.0000000000000000000~~~ 의 ‘엄밀성’을 일삼다가 삐쩍 마른 앙상한 가지에 그만 하늘도 울어, 아무리 긴 겨울도 1/N의 일용할 양식, 단위분수(unit fraction)만으로 충분했습니다.

우중(愚衆)의 분자식과 구별되는 육덕의 그물망(六德, 10⁻¹⁹)을 넘어선 허공(10⁻²⁰)에는 각자(unit) 공평하게 제 한몫을 다하여 찬란한, 맑은 별들이 살고 있어요. 어떤 대변환을 겪는데도 오직 이심전심, 염화시중의 미소만으로 착실하게 방향(orientation)을 보존하는 ‘회전 대칭’의 차원이랍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을 이긴 승자의 세계, 그곳에서 노인들에 초대장을 보내왔습니다.



오늘도 노인은 뭉툭해진 손가락으로 뿌연 유리창에 대담하게 해를 그렸어요.

뭉치면 별이지만 흩어지면 먼지일 뿐 기약이 없어 들킬 것도 숨길 것도 없는 동그라미 주위에 빤짝빤짝 빛살을 그려 넣다 문득 ‘쿨롱의 힘’에 붙잡혔어요.

노인은 또 꿈을 꿉니다.

‘엄마 이브’의 연줄로 운 좋게 전자를 잡아당기는 인력을 얻었으므로 우주선을 타고 단숨에 별의 요람으로 ‘돌아가는’ 꿈이요. 수소 원자를 만드는 ‘힘’이라면 다음을 기약할 수 있겠지요. 비록 엄마는 환승역에서 놀다 우주를 까먹었어도 그런 엄마가 있었기에 원자 아기씨는 하늘까지 점프할 것 같아요.

차세대다운 1/N 덕분(德分)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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