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마음을 만드는 랜드마크
<LA 아리랑>이라는 시트콤 아세요? 1996년 즈음에 방영된 프로그램인데요. <하이킥>시리즈와 <순풍산부인과>를 연출한 김병욱 PD님의 초기작으로, 우리나라 시트콤 장르의 시작과 같은 작품이었지요.
전 어렸을 때 TV에서 보았는데요. 시트콤의 배경이 'LA 한인타운에 사는 교포가족의 이야기'인 만큼, 중간중간 늘씬한 야자수 사이로 달리는 자동차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덕분에 어른이 될 때까지 제 머릿속의 LA 이미지는 이글이글 뜨거운 찻길과 교통체증, 그리고 그 속에서 복닥이며 살아가는 한인가족의 모습이었어요.
그 LA 한인타운에, 지금 제가 살고 있습니다. 영상 속에 간간이 등장하던 장면이 여기였구나, 저기였구나 하며 길을 가다 피식 웃곤 합니다.
LA 한인타운은 과거부터 다양한 한국인들이 부푼 꿈을 가지고, 제2의 인생을 찾아 모여든 가장 큰 교포사회예요. 거리의 모습을 보면 지금도 마치 한국의 8-90년대 즈음을 떠올리게 합니다. 딱 <LA 아리랑>이 방영될 당시의 서울 모습이죠. 덕분에 한국 여행자들 눈에는 다소 시간이 멈춘 옛도시처럼 보일 수 있어요.
그런데 여기에 눈길을 확 사로잡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할리우드 싸인이에요.
HOLLYWOOD
드라마나 여행 프로그램에서 자주 등장해서 익숙하죠? 할리우드 스타들이 사는 그 LA 언덕에 세워진 거대한 간판이지요. 가슴 뛰게 하는 <라라랜드>의 상징이자, 캘리포니아 드림을 대변하는 꿈의 글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할리우드 싸인이 LA 코리아타운 감자탕집 앞에서도, 낡은 카센터 앞에서도, 지글지글 고깃집과 세탁소 앞에서도 대문짝처럼 어디에서든 딱- 보입니다. 아침 저녁 출퇴근하는 한인들은 꽉 막힌 도로 위에서 매일 이 글자를 만나게 돼요. 맑은 캘리포니아 하늘에서 구름 찾기보다 더 쉽게 눈에 보인달까요.
당연히 저희 집에서도 보입니다. 제 방 침대에 누우면 마주보이는 창문 한가운데에 떡하니 빛나고 있어요. 서울의 남산타워처럼, 근방 어디에서도 다 보이는 거죠.
비단 한인타운 뿐 아닙니다. 워낙 높은 건물 없이 낮은 집들로 이루어진 도시다보니까, 도시 북쪽 끝 높은 산 정상에 박혀있는 글자는 사방에서 잘 보일 수밖에 없어요. 할리우드 스타들의 집은 물론이거니와 태국, 중국, 아르마니아, 멕시코... 등등 어떤 이민자 커뮤니티에서도 다 잘 보입니다.
어느 날 제가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이 있었어요. 왜, 눈 뜨기도 싫게 무기력하고 누워만 있고 싶은 그런 날 있잖아요? 그렇게 자세를 바꾸려 돌아눕다가, 창 밖에서 햇살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할리우드 싸인과 눈이 정면으로 마주친 거죠.
댕-
실제로 댕- 소리가 들렸던 것 같아요.
나 지금 뭐하고 있니. 왜 누워만 있는거야.
여기는 할리우드인데,
모두가 꿈을 향해 걸어가는 곳인데.
왜 이렇게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있어.
일어나 어서. 뭐라도 해봐.
그 순간 집 나갔던 정신이 쑥- 돌아오더라고요. 그래 일단 일어서보자. 나가서 걸어라도 보자. 할리우드 싸인 앞으로 등산이라도 가자, 했습니다.
이런 일이 저에게만 일어났을까요?
LA 한인타운의 수많은 한인들에게, 피부색 다르고 언어 다른 다양한 이민자들에게, 젊고 늙고 강하고 약한 모든 LA 시민들에게 이런 순간이 있었을 거예요. 무기력한 몸뚱이를 일으켜세우고, 밑바닥까지 방전된 정신에 땡! 하고 급속 전기충전을 해주는 순간이요.
그래서 저는 저 싸인이 도시의 급속 마음 충전기란 생각이 들었어요. 도시의 북쪽 끝 산자락에 척- 박혀있으니까 안보고 싶어도 눈에 띄거든요. 그때마다, 삶에 지쳐 고개가 땅에 떨어지고 마음까지 꺼져내렸던 LA사람들은 저처럼 에너지 새로고침을 했을 겁니다.
<HOLLYWOOD> 싸인을 가리켜 '할리우드의 상징'이라고 말하는데요. '상징'이라는 말에는 단지 사진찍기 좋은 랜드마크, 도시의 간판 이미지 이상의 것이 담겨있는 듯 합니다. 지친 도시 사람들에게 일어서서 다시 나아가보라고 말하는 목소리 같아요.
당신이 <LA 아리랑> 속 한인이든, 인도 아프리카 유럽 그 어느 세계의 이민자든 이방인이든 관계없어. 여기는 할리우드니까 할리우드답게, 너만의 별을 향해 계속해서 걸어가라고 말을 건넵니다. 도시 전체의 활기와 마음을 만들어나가는 마인드마크인 셈이죠.
우리의 도시 안에 우리를 단단히 버티게 잡아주고, 에너지를 불어넣고, 때론 하나로 엮어주는 마인드마크들이 더 자주 눈에 띄길 희망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