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읽어야 할 책도 있고, 공부도 해야 하고, 생각과 고민거리도 많았다. 하지만 이 모든 걸 해치우기엔 너무 깊은 밤이었다. 그럼에도 모든 게 하기 싫었다. 그렇다고 특별히 하고 싶은 게 있는 것도 아니어서 책장을 어슬렁거렸다. 최근에 정리한 책장은 아직 살갑지가 않다. 분명 내 책장인데 낯선 책장처럼 책들이 눈에 익지 않는다. 최소한 책을 구분해 놓은 정도다. 그렇게 어슬렁거리는데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나름 아껴둔 책이었는데 아껴둔 순간들이 민망할 정도였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다시 꺼내서 읽고 싶은 책이 되었다.
일상 만화를 그리다 댓글이 달리고 소통하다 보니 댓글을 받아서 그림을 그려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던 저자. 그렇게 댓글을 받아 그림을 그리다보니 이렇게 책으로 나오게 되었다고 했다. 그저 댓글을 받아 그림을 그려주었을 뿐인데, 오히려 더 많은 위로와 힘을 얻었는데 그 어느 때보다 고맙고, 즐겁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했다. 어떤 댓글과 어떤 그림을 그렸기에 이런 상황에다 책까지 엮게 됐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번뜩이는 센스와 영감, 아재개그, 말장난이 적절이 섞인, 무게감이 균형을 이룬 그림들을 만날 수 있었다.
sns 특성상 어떠한 형태든 소비되고 잊히는 속도가 빠른 게 사실이다. 거기에 어느 정도 메시지를 가진 채 생명력을 지니려면 무게감의 균형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그림은 다소 투박하지만 때론 투박함과 짤막한 글이 주는 공감이 잘 어울릴 때가 많았다. 그렇게 그린 그림과 답변인듯, 말장난인듯, 메시지인 듯한 글을 읽다 보면 방심한 웃음이 터지곤했다. 종종 질문과 너무 멀어진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 고민과 공감이 충분히 느껴져 결코 성의 없다 말할 수 없었다.
이를테면 ‘다 커서 여동생이랑 머리채 잡고 싸웠는데 엄마가 말리는 거 그려주세요’란 요청에 싸우고 있는 자매 뒤에서 머리를 말리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 그냥 킥킥 웃다보면 싸움의 원인, 엄마의 속상한 마음 등등을 깡그리 잊어버린다. 사람들이 이럴 때 즐겁다고 말할 것 같다. 그리고 저자도 그런 그림을 그리며 다른 각도로 상황을 바라보는 시선을 즐겼을 것 같다. 그거면 되지 않을까? 내가 요청한 대로 그려지지 않으면 어때, 그걸 그리고 보는 사람들이 다양한 생각을 하며 다양한 감정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일상인 것을! 빈 공간이 더 많은 그림에서, 긴 설명이 필요 없는 짤막한 글에서 그렇게 또 삶을 배워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