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깊은 밤이었다. 고요 속에서 책을 읽고 사색에 빠지고 그러다 잠들 수 있어 가장 좋아했다. 그런데 가족이 생기고부터 해가 질락 말락 한 어스름한 저녁이 가장 좋아졌다. 내 가족을 기다리다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의 발걸음만 봐도 상쾌해진다. 그들을 보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오늘 하루도 힘들었겠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만은 가벼웠으면 하는 바람을 실어보내기도 하는 시간이다. 이 소설은 그 시간의 상쾌함과 잘 어울린다. 무겁지 않고 일상의 소소함을 잘 드러내며 그것들을 돌아보다 내게 주어진 것들에 감사하게 되는 것. 그런 뿌듯함이 서려있어 오랜만에 기분이 상쾌해졌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을 여러 편 만나 보았지만 기복이 심해 여운의 강도가 극과 극을 달릴 때가 많았다. 요즘에는 저자의 작품을 거의 만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 소설로 인해 내가 좋아했던 『암리타』 『티티새』같은 소설이 떠올랐다. 이 소설 속의 소재는 오히려 상처투성이인데 왜 그렇게 마음에 와 닿았는지 생각해 보니 결국에는 마음이 향하는 대로 흘러가는 의지 때문인 것 같았다. 이미 결정 난 것처럼 보여 왼쪽 길로 가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썩 내키지 않았는데, 타인과의 만남으로 인해 원래 내가 원했던 오른쪽 길로 용기 있게 성큼성큼 다가가는 기분. 그런 긍정이 조금씩 흐리고 있었기에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 실린 단편 속에서도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 격렬한 소용돌이를 일으키진 않지만 소소하게 나를 이끄는 이야기들. 저마다 크고 작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주인공들은 어떤 식으로든지 그 상처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며 치유하고자 했다. 드러난 상처를 억지스레 치유하겠단 의지가 아니라 흘러가는 데로 두다보니 어쩔 땐 폭발하기도 하고 자연스레 시간이 흐르면서 해결되는 일도 있었다.
가장 무던하고 행복감을 묻어나게 했던 「유령의 집」은 남녀의 만남과 헤어짐, 재회를 그리고 있었다. 소소한 추억들이 묻어나는 이야기들 가운데 그들이 다시 만날 수 있었다는 게 내심 안심이 되었던 이야기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별거 아닌 추억도 그 순간만큼은 행복으로 그려지던 시기가 있었다. 그 추억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고 있음에도 산산이 흩어져 다른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기분이 들고 있는 요즘이다. 이 단편으로 인해 나의 20대, 풋풋한 마음을 지녔던 그 시기를 떠올릴 수 있었다.
이런 기분도 잠시 「엄마!」에서는 주인공이 사내 식당에서 독극물 테러를 당하고 「따뜻하지 않아」에서는 어린 시절 동네 친구의 죽음을 목도한 이야기가 나온다. 「도모 짱의 행복」에서는 짝사랑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막다른 골목의 추억」은 약혼자와의 이별을 이겨내기 위한 주인공의 여행을 전하고 있다. 사랑이야기가 밑바탕이 되어있지만 각기 색다른 다섯 이야기가 엉켜있는 것이 신선했고 극단적인 상황들 가운데서도 독자를 우울하지 않게 만들지 않아 안심이 되었다. 동네 친구의 안타까운 죽음을 떠올리는 게 고통스럽기도 하고, 힘겨운 이별을 견뎌내는 주인공과 함께 여행을 하는 게 내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게 해가 지고 지는 것처럼 어떠한 상황에서도 시간은 흘러가고 세상은 변함없이 형성된다는 것을 깨닫게 만든다. 나의 마음먹기에 따라 세상이 달리 보일 수도 있지만 꼭 극단적인 상황만을 생각하며 우울해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저자는 자연스레 보여주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다섯 편의 단편의 소재는 그리 유쾌한 것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다섯 편의 이야기를 만난 후에 느껴지는 감정은 어둡고 우울한 것이 아니다. 이야기가 갑자기 마무리되는 상황 앞에 조금 당황스러울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저자가 드러내는 주제는 치유다. 조금은 힘들다고 느낄 때 다양한 색깔의 이야기를 만나본다면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지라도 내 마음 상태는 좀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