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년 만에 <달과 6펜스>를 다시 읽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읽고 펑펑 운 뒤, 왜 다시 읽으려 하지 않았는지를 알 것 같습니다. 그렇게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소설이 어떻게 읽힐까 무척 궁금했지만 완전 다르게 읽혀버린 소설이라 조금 혼란스럽습니다. 진로를 고민했던 18살에 만난 찰스 스트릭랜드는 39살이 되어 다시 만나 보니 애잔함보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변하게 만들었는지에 더 초점이 간 것 같습니다.
그의 예술적인 재능을 떠나, 인간으로서 바라보기 힘들었던 찰스 스트릭랜드가 그저 가여울 뿐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이 틀에 박힌 생활의 궤도에 편안하게 정착하는 마흔일곱 살의 나이에, 새로운 세계를 향해 출발할 수 있었던 그가 나는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저도 이러한 사실에 이끌려, 진로를 염려하던 고등학교 시절 모든 걸 떠나 찰스 스트릭랜드에 깊이 공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자식을 버리면서까지 하고 싶은 걸 하는 찰스 스트릭랜드. 어떠한 길인지 모르지만 그랬기에 그 길을 끝까지 가보고자 했던 찰스 스트릭랜드에게 저도 마음을 뺏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은 참 매정해. 우리는 이유도 모르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몰라. 그러니 겸손하게 살아야지. 조용하게 사는 게 아름답다는 걸 알아야 해.
겸손하게 사는 것에 대한 기준이 뭔지 모르겠습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그것이 겸손이라며 살아왔던 저에게 찰스 스트릭랜드의 삶은 그저 충격적이었습니다. 반면 상처를 주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평생을 함께 해야 하는 것이 맞는지, 그걸 과감히 던져 버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길을 헤매는 것이 맞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때 내가 당장 그것들의 아름다움과 위대한 독창성을 알아보았더라면 좋았으련만, 유감스럽게도 그렇질 못했다. 이제 그것들의 대부분은 후에 다시 보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복제화로 익숙하게 되었지만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몹시 실망스러웠다는 사실이 지금 생각하면 놀랍다.
찰스 스트릭랜드의 그림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전 먼저 그림을 본 화자의 심경이 안타깝다는 생각도 들지 않습니다. 그렇기엔 그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 내 도덕적 기준에서 많이 벗어나서 뛰어난 예술적인 능력이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화려한 희망과 꿈을 안고 시작했을 블란치의 인생, 그것은 차라리 시작하지 않았던 것만도 못하지 않았을까. 죄다 소용없고 공허하게만 여겨진다.
제가 찰스 스트릭랜드에게 실망했던 부분은 처자식을 버리고 떠났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블란치가 자신에게 와도 거부하지 않았던 것, 그녀의 삶을 마감했을 때에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 그에게 그때부터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도대체 왜 그래야 했을까요?
17년 간 처자식을 먹여 살렸으니 이제 할 만큼 했다는 생각에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고 싶었던 것일까요? 그것 외에는 그의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없을 것 같고, 이해의 영역이 아닌 것 같아 혼란스럽습니다. 저라면 예술적 재능을 떠나서라도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그렇게 상처를 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것도 용기의 차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역겨웠다. 기회만 있었다면 역겹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 말을 해주겠다고 일부러 찾아나설 수는 없는 일이다.
오히려 저도 이중적인 인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화자처럼 그가 역겹다 말하지 못하고, 그의 재능을 인정하지도 못하고,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간 그를 애도하지도 못했으니까요.
저에겐 찰스 스트릭랜드의 삶이 나아갈 길을 몰라 여기저기 헤매다 그림에 정착한 것으로 보였지만 그 과정이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이것 또한 저의 편협함이고 편견이고 가식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에겐 찰스 스트릭랜드는 더 이상 자신의 꿈을 향해 찾아 나선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닌, 왜 그런지 알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를 다시 만나봐야 할 것 같습니다. 40대가 되면 그의 삶을 다시 찬찬히 들여다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지금은 찰스 스트릭랜드가 저에게 너무 어색하고, 씁쓸하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