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소_여러분은 무엇을 하고 싶나요

by 안녕반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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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21년 전에 읽은 책, 그리고 나름 '인생의 책'이라고 말하는 이 책의 첫 대면을 이렇게 소란스런 카페에서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뭔가 좀 더 진중하고, 집중 할 수 있는 곳에서 할 수 있길 바랐는데 오히려 시끄러운 카페에서 시작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는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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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도대체 무엇 때문에 부인을 버렸단 말입니까?」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소」



여기까지 읽고 책을 일부러 덮었습니다. 이제 막 읽기에 속도가 붙어서 흥미진진해지려 하는데 왠지 여기서 멈춰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21년 전에 읽은 소설의 내용이 띄엄띄엄 생각나는 터라, 어쩌면 찰스 스트릭랜드가 이 말을 하는 부분을 기다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1년 전의 저는 18살, 고등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한참 진로에 고민이 많은 터라 추석 연휴를 앞두고 우연히 학급도서에서 집어든 책을 읽고 펑펑 울어버릴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이 책을 읽고 엄청난 충격이 와서 진로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닙니다. 이후의 제 삶은 그저 평범하기 그지없었으니까요.



굳이 연결을 시켜보자면 다행히 그 이후로 책을 계속 좋아하게 되었다는 점 정도일까요? 그렇지 않다면 온라인으로 이렇게 고전 읽기 모임도 만들지 않았을 테고, 21년 전에 읽은 책을 다시 꺼내는 일도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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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막힌 일 아니에요? 부인을 버리고 달아나버렸다지 뭐예요」



18살에 읽었을 땐, 찰스 스트릭랜드의 입장에서 본다면 처자식을 버리고 달아나버린 일을 두고 '나빴다.' 라고 생각하며 큰 감흥이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기억도 나지 않고, 당시의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기억이란 건 미화되기 일쑤니까요.



그렇지만 21년이 지난 지금 저는 오히려 찰스 스트릭랜드의 아내 에이미의 입장과 비슷합니다. 두 아이의 엄마이고, 아직 아이들이 어리고, 찰스 스트릭랜드가 처자식 곁을 떠났던 마흔이 내년입니다(남편과 저는 동갑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남편이 '그림을 그리고 싶다'며, 혹은 다른 이유를 들이대며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남겨둔 돈도 없이 떠나버린다면 얼마나 황당하고 배신감이 들까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에이미의 입장에 백번 공감이 가는 것이 아니라 찰스 스트릭랜드의 행보가 더 궁금해졌습니다. 이유를 생각해 보니, 화가 고갱을 모티프로 한 소설이라는 사실과 찰스 스트릭랜드가 화가로서 멋진 결과물을 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찰스 스트릭랜드가 화가로서 두각을 나타내는지 안 내는지를 모르는 상태에서(찰스 스트릭랜드가 그림을 그리기로 다짐한 시점에서 성공의 여부는 중요해 보이지 않지만요) 제가 알고 있는 결과로써 과정을 지켜보았기 때문에 에이미의 딱한 처지와 여러 가지 감정들을 그저 과정으로 치부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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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특징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훌륭한 시민,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 정직한 중개인일 수는 있겠지만, 그에게 시간을 낭비할 이유는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34쪽



화자가 찰스 스트릭랜드를 만나고 그를 만난 느낌을 남긴 부분입니다. 너무나 평범한 사람, 하지만 부인 에이미 말대로 따분하기 그지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처자식을 버리고 집을 떠났다고 하면 모두들 놀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까지 가장 놀란 사람은 찰스 스트릭랜드 본인이 아니었을까요? 자꾸 결과를 알기 때문에 찰스 스트릭랜드를 옹호하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의 행보를 계속 쫓아가고 싶은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책을 덮었을 때 어떤 느낌이 남게 될 지, 어떤 기분을 느끼게 될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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