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미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요즘들어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며 소설을 너무 몰아서 읽은 탓인지 내용들이 모두 섞여 버리는 부작용이 드러나고 있다. 에세이는 비교적 출판 순서대로 읽어서인지 모두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 든다. 오래전의 글이 아니라(물론 시간적 배경이 판이하게 드러나는 소재나 이야깃거리도 있다.) 내 곁에서 조근조근 저자가 이야기 해준다는 기분이 들 정도다. 그런 독서가 나쁘지 않았고 오히려 편하게 읽을 수 있어서 좋았음에도 내용들이 한데 섞여 버리니 구분하는 데는 조금 애를 먹기도 했다. 굳이 구분할 필요조차 없지만 이렇게 꼬박꼬박 느낌을 남길 때는 도대체 무슨 말을 남겨야 할지 난감할 따름이다.
하루키 에세이를 연달아 4권을 읽다보니 내용이 모두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책마다 미세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책만 해도 다른 에세이에 비해 차분하고 잔잔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초반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책을 덮어 버릴 뻔 했는데 지겹거나 나의 취향에 전혀 맞지 않는 글이 아니었기에 묵묵히 읽다 보니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한 것 같다. 다른 연재에 비해 조금 긴 글을 모아놓은 이 책은 그래프를 그리듯 서서히 만족도가 올라갔다. 글을 읽다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메모지를 붙이다보니 저자의 글에 많은 부분을 공감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그것이 바로 이사의 좋은 점이다. 많은 것을 잊을 수 있다는 것. 같은 곳에 계속 살다보면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일들이 점점 쌓여간다.(33쪽)'는 글만 보아도 요즘 나의 심경을 그대로 반영한 듯 하다. 나는 저자처럼 이사를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고, 자주 하지도 않았지만 최근 2년 반을 살다온 도시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사 여부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다고 결정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결혼을 했고, 아이를 품고 있었기에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내가 살고 있던 곳에서 내가 원하는 일을 앞으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요즘에도 꿈에 자주 전 직장이 나온다. 복귀하는 꿈, 동료나 상사들 틈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그곳은 더 이상 내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퍼뜩 깨달으며 잠에서 깬다. 저자의 말처럼 분명 많은 것들을 잊을 수 있었음에도 마치 그곳에 살고 있는 것처럼 잊을 수 없는 일들이 있는지 모를 일이다.
저자의 글에서 느껴지는 공감대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도 한번쯤 생각했던 것들을 저자가 쓰윽 수면 위로 올려주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하면서도 실감할 수 있는 문장을 만나면 멍하니 그 문장을 붙들고 생각에 빠져 버리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게 에세이에서 만날 수 있는 또 하나의 매력이고 저자의 소설과 다른 마력에 빠질 수 있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소설과 에세이를 딱 나눠 비교할 순 없지만 각각의 매력을 만끽하다보니 더 그의 글에 매료되는 것이리라. 소설은 소설 나름대로의, 에세이는 에세이 특유의 재미와 유쾌함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자 그의 글을 더 많이 만나고 싶은 욕망이 나를 옭아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