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럴딘 매코크런 <시라노>
허겁지겁 허천난 듯해서 사랑을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결을 맞추는 시간이 필요하다. 게다가 가서 '얻어오는' 마음이 필요하다. 다른 마음을 '얻어오는' 것이 필요하다. 멀어지는 사랑의 뒷등을 볼 때서야 나는 그와 사귀는 동안 이것이 모자랐음을 알게 된다. 사랑을 잃은 오늘 내 마음을 보아도 다시 얼뜨고 여전히 거칠다. 머잖아 또 망실(亡失)이 있을 것이다. _『가재미』 뒤표지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연애엔 젬병인 것 같다. 누군가가 내게 좋은 마음을 품고 다가와도 의심부터 한다. 남녀사이에 오갈 수 있는 자연스런 말과 행동들이 드러나면 지레 겁먹고 나의 감정들을 부정해 버린다. 오늘도 나는 『가재미』 뒤표지에 실린 저 문구를 떠올리고 책장으로 느릿느릿 걸어가 시집을 꺼내 이렇게 되새김질 하며 후회하고 있다. 분명 작년에도 이 글을 보며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멀어지는 사랑의 뒷등'만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있다. 왜 이럴까. 왜 매번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결을 맞추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마음을 얻어올 생각을 하지 못하고 무조건 내게 쏟아내 주기만을 바랐던 것일까.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해 본적이 있냐는 진부한 질문보다 평생을 사랑할 누군가를 만난 적이 있느냐고 묻고 싶어진다. 혼을 다해 사랑할 사람. 곁에 존재해 주는 것만으로도 살아갈 목적이 되는 사람. 그런 상대를 향해 뜨겁게 사랑을 주었는지 내 자신에게 묻고 싶다. 다가오는 마음도 제대로 품어내지 못하는 내가 타인의 사랑에 왈가왈부할 자격은 없지만 '시라노'란 인물을 보면 내 마음이 가난해진다. 한 여인을 향해 뿜어내는 열정만으로 충분히 나를 가난하게 만들어 버리는 사람 시라노. 내게 그런 사람이 없음을 한탄하기보다 사랑의 씨앗을 뿌릴만한 마음의 밭이 준비되어 있지 않음에 나는 더욱 더 초라해지는 것 같다.
어떻게 하면 그토록 열렬히 사랑할 수 있을까. 그것도 한결같이, 상대방의 어떤 상황에도 개의치 않으면서, 비밀스럽게! 시라노의 사랑이 그랬다. 팔촌누이 록산을 사랑하는 시라노는 마음을 넘어 영혼까지 넘겨줄 기세였다. 자신의 흉측한 외모, 특히 코 때문에 그녀 앞에 당당히 나서지 못해서인지 더 뜨겁게 록산을 사랑했다. 심지어 그녀가 사랑에 빠져 자신에게 도움을 청해올 때도, 그녀의 남편이자 자신의 부하인 크리스티앙을 대신해 편지를 쓸 때도, 그녀가 사랑을 잃고 혼자 남겨졌을 때도, 생명이 다하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시라노는 오로지 록산만을 사랑했고 그녀를 삶에 중심에 놓고 살아갔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진대 시라노는 그 이상을 뛰어넘어 사랑의 정점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코가 유난히 크고 못생긴 시라노의 가장 큰 매력은 뛰어난 시적 감각이다. 그의 코를 향해 '코쟁이 양반이 또 주제넘게 아무 데나 코를 들이미셨군?'(16쪽) 이라고 감각 없이 놀리자 혀를 끌끌 차며 연극형 욕설부터 선의형 욕설까지 예를 드는 모습에서 그의 능력을 간파했다. 자신의 코를 보며 어느 누가 '너 그거 알아? 노아의 방주가 도착한 곳은 아라라트 산이 아니었대!'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너무 뛰어난 그의 능력은 록산이 크리스티앙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또한 그가 잘생기고 멋지지만 사랑을 표현할 줄 아는 시적인 능력이 없음을 알았을 때를 대비해서 발휘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긴 했다. 그러나 크리스티앙을 대신해 써내는 편지와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대사를 만들어주는 모습에서 그의 숨은 마음을 절절하게 전해왔다.
위급한 전쟁터에서 크리스티앙 대신 매일 같이 편지를 쓰며, 크리스티앙이 죽었을 때 절망하는 록산을 보며 '나도 죽었소. 이제 당신을 영원히 잃고 말았으니까.'(140쪽)라고 말하고, 크리스티앙조차 록산을 향한 시라노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록산보다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는 시라노에게 더 마음이 갔다. 그것은 내 마음이 황량한 들판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십오 년 동안 왜 록산에게 고백하지 못하고 혼자 두었냐는 안타까움을 드러낼 수 없었던 것도, 끝까지 자신의 마음을 숨기며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도 크리스티앙을 애도하는 마음을 덜어내선 안 된다며 되레 그녀를 위했던 것도 개인적으로 그의 사랑을 논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말았다.
시라노라는 인물을 알게 된 것은 「시라노 연애 조작단」을 통해서였고, 희곡 『시라노』 보다 소설을 택한 것은 읽기에 대한 부담과 감정이입에 더 충실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로스탕의 희곡을 소설로 재구성했지만 희곡에서 직접 빌려온 것은 등장인물의 성격과 줄거리 정도일 뿐'(174쪽) 이라고 말한 것처럼 저자의 순수한 창작물에 단박에 반하고 말았다. '소설이라기보다 장편 산문시에 가깝'다고 말했듯이 문장 틈틈이 녹아 있는 의미들과 아름다움을 해석하며 읽는다면 내 마음 가운데 그만한 사람이 없음을 한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사랑의 풍부함과 아름다움을 알려준 시라노란 인물에게 고마움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사랑의 안타까움에 눈물 한줌을 보태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