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책장 정리를 했다. 책장 앞에 가로 쌓기 되어 먼지만 쌓여가는 책들을 보다 못해 내린 조치인데 정리가 아닌 그야말로 쑤셔 박기가 되었다. 이젠 몇 권인지 알지 못하는 책(늘 3,000권은 안 될 거라고 위로하고 있긴 하다)들을 보며 뿌듯했던 날들도 있었는데 이제는 애물단지가 된 기분이다. 엄청나게 많은 책들을 빼 냈음에도 켜켜이 쌓여가는 책들을 보면 많은 생각들이 교차한다. 너무 욕심을 부리는 건 아닐까, 언젠간 읽겠지, 그래도 사고 싶은 책이 있는데 살까 말까, 이런 생각들이 매일매일 나를 스쳐지나간다. 그러다 책에 관한 소소하지만 많은 의미를 던져주었던 이 책을 읽고 책 자체에는 집착하지 말자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마음이 내킬 때마다 조금씩, 천천히 읽은 탓인지 완독해 버린 게 아쉬웠다. 한문학자의 시선에서 말하는 책은 내가 관심 있어 하는 책들과 거리가 멀어 다른 세상 이야기 같기도 했다. 그럼에도 책을 읽는 것뿐만 아니라 책의 내적, 외적 의미와 그에 따른 다양한 이야기들은 책을 좋아하는 마음과 어느 정도 통함이 있었다. 내가 이렇게 책을 모으는 이유는 ‘어릴 적 책에 대한 결핍감, 도서관에 대한 환상이 그 욕심의 뿌리’는 아닌지(초등학교 때 내 책이란 걸 가져본 기억이 없다. 책은 늘 학교에서 빌려 읽었다), 습관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책을 읽고 느낌을 남기는 것은 ‘무언가 감동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는 건 아닌’지 곰곰 생각해보게 했다.
그럼에도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집에 책을 더 많이 쌓자는 생각, 더 많은 책을 읽고 느낌을 남기자는 생각, 책에서 알게 된 것들을 원래 내 것인양 자랑하지 말자는 생각 등등 오래 전 선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특히나 서로 오가는 사이가 아님에도 다산이 쓴 <매씨서평> 원고를 보고 그에게 꼭 필요한 책을 빌려주어서 책의 내용을 완전히 뒤바뀌게 한 홍석주의 이야기는 뭉클했다. 저자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공부하는 학자에게 책을 잘 빌려주자는 우스개 섞인 뼈 있는 말을 하지만 책이 귀한 당시에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는 학자에게 귀한 책을 빌려주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에겐 그만큼 귀한 책이 있는 건 아니지만(내 책장에는 희귀한 책은 없다. 저자처럼 서점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책들이고, 내 취향대로 모은 것뿐이다), 책에 인색하지 말아야겠단 다짐을 했다. 집에 방문하는 이가 있으면 책을 꼭 쥐어주고 보내는데 귀한 책은 아닐지라도 줄 것이라곤 책밖에 없기에 이런 내 마음이 조금이나마 전해진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하다고 말이다.
공부하는 학자들에게 고서가 어떤 존재인지, 고서가 사라져 버린 이야기(정말 화나고 어이가 없었다), 고서로 장난치는(빌려주지도, 보여주지도 않는, 그러다 외국의 요청에는 선뜻 내어주는) 사람과 기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답답한 마음이 많이 들었다. 연구로 쓰일 수 있다면 선뜻 내어줘도 될 것 같은데 책을 소유하려는 사람들을 보면서 과연 그들에게 책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졌다. 반면 고서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만나게 되는 옛 선인들을 보면 너무나 쉽게 책을 접할 수 있는 지금이 오히려 미안해졌다. 지금과 환경이 다르다고 해도 책이 귀하다 보니 한 권의 책을 닿도록 읽고, 빌려 읽고, 필사하고, 책 까지 쓰는 모습을 보면 내가 책을 좋아하는 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럼에도 책 얘기하면 빠지지 않는 이덕무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원래 좋아하던 이덕무가 더 좋아져서 책장에서 그의 책을 꺼내왔다.
언제 읽을지 알 수 없었던 이덕무의 책을 꺼내서 읽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나에게 큰 의미로 다가온다. 책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이덕무의 이야기까지 읽고 그의 책을 읽으니 여전히 어려운 그의 시가 조금은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전히 한자는 나에게 친숙한 것 같으면서도 번역이 안 되는 외국어인데, 글 속에 많은 것들이 담겨 있음을 이 책으로 알게 되어 뭔가 마음이 개운해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