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자끄 상뻬 <거창한 꿈>
<꼬마 니콜라> 시리즈에 빠져 들면서, 상뻬에 대해 또 다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원래 좋아하는 작가라 신간이 나올 때마다 바로 구입하지만, 그의 숨겨졌던 작품으로 새롭게 관심을 갖고 보니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하게 되었다. 상뻬의 책을 거의 다 모았으면서도 유독 <꼬마 니콜라> 시리즈에는 관심을 갖지 못했었다. 상뻬가 종종 삽화로 참여하는 작품이 있지만, 이 방대한 시리즈를 상뻬만 믿고 구입한다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책을 읽어 보니 그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고, 상뻬의 다른 작품에 더 관심이 기울이게 만들었다.
<꼬마 니콜라> 덕분에 상뻬의 책을 모두 보고 읽고 싶었고, 내게 없는 상뻬의 책을 검색하다 <거창한 꿈>을 구입하게 되었다. 상뻬의 책은 읽는다는 표현보다 보고 느낀다는 표현이 더 맞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짤막하게나마 글이 실려 있지만, 그의 데생이 주는 느낌은 책의 전체를 지배한다. 기존의 상뻬 책에서 크기가 조금 작아진 상태로 출간되어서 그런지, 상뻬의 데생을 큼지막한 느낌으로 볼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그 동안 여러 크기의 상뻬 책을 보아왔지만, 아무래도 큰 책으로 상뻬의 데생을 보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다. 상뻬가 그린 세계에 더 다가가고, 널찍하게 보도록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거창한 꿈>을 펼쳤을 때 작은 크기의 책 안에 갇힌 상뻬의 데생이 조금은 애처로워 보였다. 도시의 한가운데서 인간의 군상을 여러 모습으로 그린 세밀한 데생이 많았는데, 온전히 날개를 펴지 못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책의 크기에 투덜거리고 있기보다, 상뻬가 그려낸 세계에 온전히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기에 그 마음은 잠시 접고 <거창한 꿈>을 느끼는 데만 집중했다. 상뻬의 데생집을 보면 책 제목이 늘 눈에 띈다. 한 가지의 주제를 잡고 그것만 그려낼 때도 있고, 데생 내용과 조금은 동떨어진 내용이 그려질 때도 있다. 거기다 추상적으로 제목을 이끌어 내거나 익살스런 제목을 붙일 때도 있다. <거창한 꿈>은 어떤 내용일까 궁금했던 것도 제목과 어떻게 어우러지는지에 대한 관심이었다. 데생과 짧은 글을 읽어나가면서 상뻬가 <거창한 꿈>이라고 제목을 붙인 것에 대해 설핏 웃음이 났다. 제목과 완전히 일치된 공감보다 익살을 드러낸 데생이 더 많았고, 그것을 알아챘기 때문일 것이다.
보통 우리가 생각할 때 <거창한 꿈>이라면 이루지 못할 꿈이거나, 허풍스러운 꿈을 상상하기 십상이다. 이 책에서 상뻬를 통해서 펼쳐지는 '거창한 꿈'은 일상에서 만나는 '꿈'의 허황됨을 보여주기도 했다. 우리의 정서에 맞지 않는 풍자도 많았고, '꿈'의 대상이 한정된 것이 아닌 다양한 장소와 대상을 다루고 있기에 낯선 것도 많았다. 또한 데생을 보면서 독자가 상상할 수 없는 엉뚱함이 드러난 것도 있었다. 많은 생각을 하지 않고 지나쳐 버리는 데생들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 것은 상뻬의 짤막한 글이었다. 그 글은 이질적일 때가 더 많았지만, 상뻬의 수다스러움이 덧입혀 지면서 상뻬 특유의 매력이 발산되기도 했다. 그 안에서 책 제목이 주는 <거창한 꿈>의 실체를 엿볼 수 있었다. 추상적이기도 하고, 익살스럽기도 하고, 낯설기도 한 글을 통해서 타국의 정서를 느끼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상뻬의 데생집을 무척 좋아하고, 데생만 삽입된 된 책들도 찾아보는 열정이 생겼지만, 그의 데생집을 보고 난 느낌을 남기기란 여전히 힘에 부친다. 다양하게 펼쳐지는 데생이 주는 느낌을 글로 남긴다는 것은 녹록치 않은 일이다. 보면서 느끼는 감정들을 잡는 것도 어렵고, 상뻬의 데생을 일일이 분석하는 것도 여전히 부족하다. 그러나 상뻬의 데생을 보면서 순간에 느껴지는 감정들의 매력을 알고 있기에 상뻬의 책을 계속해서 찾게 되는 것 같다. 익살스러우면서 풍자적이고, 유쾌하면서도 사랑스러운 면을 모두 갖추고 있기에 그의 흔적을 좇는지도 모른다. 그의 데생집을 보면서 명쾌한 느낌을 남기지 못하더라도 그의 데생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갈수록 감격스럽다. 상뻬를 사랑하는 많은 독자들을 위해서 앞으로도 이런 흔적을 많이 남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