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사고>
하루에 수백 권씩 쏟아져 나오는 책의 홍수 속에서,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고민하기보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읽지 못한 책들에 푸념이 짙어가는 요즘이다. 당장 내 책장만 보더라도 읽지 않은 책이 수백 권이고, 한 권의 책을 두 번을 읽는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로 치부되곤 한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꼭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은 책들을 종종 만나곤 한다. 대부분 내가 소장하고 있지 않은 책에 대한 간절함인데, 4년 전 여름휴가차 서울에 올라갔다 서점에서 읽고 내려온 한 권의 책이 그랬다.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사고>란 책을 서점에서 읽게 된 것은 순전히 얇은 두께 때문이었다. 두툼한 책을 서점에서 읽고 올 수 없어, 폭신한 서점 바닥에 앉아 책을 읽고 왔는데 무척 충격을 받았었다. 내게는 낯선 작가였고, 구입할 목적이 없었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펼친 책이었기에 이런 내용을 만날 거라 생각조차 못했다. 그럼에도 이미 읽어버린 내용이라 책을 구입하지 않고 그냥 집에 돌아와 리뷰를 남겼는데, 종종 이 책이 떠오르곤 했다. 구입해서 내려왔으면 좋았을 거란 후회가 깃들 정도로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찾아볼 수가 없어 더욱 애가 탔었다. 서울에 올라 간 지인에게 부탁을 해도 구할 수가 없어 포기하고 있었건만, 며칠 전 서울의 한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말았다.
책을 발견한 순간 감탄사를 연발하며 바로 뽑아 값을 치렀다. 초판 1쇄라는 기쁨도, 그렇게 원하던 책을 발견했다는 놀라움보다, 몇 년 전 그때처럼 우연히 걸터앉은 책장 앞에서 고개를 돌린 순간, 나를 기다리고 있던 이 책이 운명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내 품에 안긴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도, 이미 알고 있는 내용임에도 오래 잊었던 친구를 만난 듯 설렘이 가득했다. 출장을 갔다 귀가하는 도중 단순한 엔진 고장으로, 한 마을에 잠시 머무르게 된 주인공 트랍스 마저 반가울 정도였다. 그가 어떠한 결정을 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결과보다는 과정에 더 중점을 두어 정독했다. 도저히 읽기를 멈출 수 없어 순식간에 읽어버렸음에도, 내 안에 머물러 있는 이 느낌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것은 여전했다.
우연히 하룻밤을 머무른 곳에서 하게 된 게임으로 한 사람의 인생이 송두리째 뒤바뀌어 버렸다면, 그것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로 강렬한 것이었다면 사건의 전말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섬유회사에 다니는 트랍스는 어느 정도 자수성가한 사람이었고, 인생을 적절히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충분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단순한 엔진 고장이었음에도, 혹시 예쁜 아가씨와 즐거운 밤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에 마을로 들어갔다. 그렇게 머무르게 된 집에서 전직 판사, 검사, 변호사, 사형집행인이 하는 모의법정 놀이에 피고로 참석하게 되면서 그는 지금과는 전혀 색다른 감정을 느끼게 된다. 단순한 놀이에 불과했지만, 이미 은퇴한 노인들의 전력은 여전히 날카로워 아무런 죄가 없다고 고백하는 트랍스의 과거를 샅샅이 캐내게 된다. 그들이 트랍스의 잘못을 일일이 잡아냈다기보다, 아무렇지 않게 발설하는 트랍스를 통해 자연스레 죄로 끌어내고 당사자로 하여금 유죄를 인정하도록 만든 것이다.
트랍스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 자신이 살아온 전적을 말하면서 직장 상사였던 기각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된다. 1년 전 심장마미로 죽었으며, 그의 부인과 관계를 맺었던 것과, 기각스가 자신에게 어떻게 대했는지에 대해 말하게 된다. 트랍스는 기각스의 죽음과 그의 부인과의 관계도 모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쉽게 간과하며 넘어가지 않았다. 트랍스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의 충고에도 개의치 않고, 트랍스는 그들이 유죄를 내리기 유리한 발언들을 서슴지 않는다. 기각스가 숨을 거둔 것부터 시작해, 그의 부인과 관계를 맺고, 현재 트랍스가 지닌 위치부터 하나하나 짚어가며 죄를 캐가면서 트랍스가 어떠한 죄를 지었는지를 납득시켜 간다.
그 과정에서 트랍스는 자기가 어떠한 죄를 지었으며, 그 죄를 인정하게 됨으로써 자신의 내면에 어떤 감정이 깃드는지 감추지 않았다. 오히려 죄를 부인하던 그가 죄를 인정하고, 홀가분해 하는 모습이 개과천선해 가는 모습으로 비춰지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그가 깊은 반성을 하고, 후회를 통해 자신의 죄를 깊이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알지 못한 죄를 인정함으로써 갖게 되는 새로운 감정, 이를테면 새로 태어난 기분이 드는 홀가분한 감정이 트랍스의 내면을 잠식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모의법정 놀이였고, 그 끝에는 놀이의 결정적인 판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날카로운 검사의 언변에 모든 것을 수긍하고, 자신의 죄를 무죄라 변호하던 변호사를 만유하면서, 판사로부터 사형이라는 선고를 받은 트랍스는 오히려 고마움을 느낀다. 모두들 모의법정 놀이가 끝나고 그 시간을 자축하는 동안, 트랍스는 행복감을 느낀다. '그 동안 소시민으로 살면서 한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느낌'인 행복감으로 인해 자기 방으로 돌아간 후, 그는 창틀에 목을 매달아 자살을 한다.
모의법정 놀이를 한 사람들은 그의 죽음에 무척 놀라지만, 정작 트랍스 자신은 행복한 죽음을 맞이했다. 한낱 놀이에 불과한 사건에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을 극복해 버린 트랍스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트랍스의 내면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결과만 판단한다면, 놀이를 통해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갔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트랍스의 변화를 차근차근 살펴보면, 그가 선택한 죽음은 죄책감과 반성이 깃든 죽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기에 놀이를 진행한 그들을 비난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저자의 소설에 늘 숨어 있다는 '우연성'과 '개연성'이 철저하게 증명된 셈이었고, 그 중심부에 트랍스가 겪게 되는 하루가 모두 속해 있음을 되짚어 볼 수 있다. 그런 연유로 구경꾼에 지나지 않았던 독자는 트랍스의 선택 앞에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고, 어떠한 비난도, 생각도 뚜렷이 드러낼 수가 없다. 다만, 트랍스가 맞이한 하루와 그가 한 선택이 늘 우리에게도 노출되어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에 대한 책임 또한 우연과 개연성으로 치부하기엔 탐탁지 않으나, 많은 부분에 우리의 의지가 들어가 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