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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힙합스텝 Jul 20. 2024

현상은 그 누구보다 탈주하고 싶다

탈주 (ESCAPE)

감독: 이종필

2024년 개봉


커버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탈주>. https://t1.daumcdn.net/movie/bc4c2ae056eb2f1cefdf2a2a4ab783858d59fed1


영화 <탈주>를 리뷰한 글입니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탈주>. https://t1.daumcdn.net/movie/18afb422736cdbf1399ca2b2b7e78548f8e2e9d9

자유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자유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를 구속하는가? 청소년기에 접어든 아이들은 부모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애를 쓴다. 부모의 잔소리는 그들에게 구속이다. 대입 수능을 코앞에 둔 고등학생에게는 지옥 같은 입시가 곧 구속이다. 직장인들은 살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인지, 돈을 벌기 위해 사는 것인지 모를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자본은 풍요를 가져다주지만 때로는 인간을 구속하기도 한다.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성별도 구속이 될 수 있다. 지정 성별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기를 원한다. 그 결정 과정에 타인이 개입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낀다. 그 불편함을 참고 사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지만 얼떨결에 부여받은 삶에 수긍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다. 부여받은 삶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고 익숙함 속에서 유영하면서 말이다. 이들은 스스로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불편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탈주>. https://t1.daumcdn.net/movie/4099f6aa34ceced8174ea2b374bd6eb1ff2392df

그렇다면 외부의 환경만이 나를 구속하는가? 그렇지 않다. 나도 나를 구속한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구속하는 상황은 우리 일상에서 꽤 많이 벌어진다. 자기 인식을 명확하게 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 구속의 시발점이다. 내가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고, 이러한 나의 욕구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으며, 나의 소망을 좌절시키는 방해물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려야 한다. 자기 인식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실제 욕구에 반하는 행동을 할 때 드문드문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왜 자신이 불편함을 느끼는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편함을 유발하는 행동을 계속해서 자행한다. 페터 비에리의 책 <자기 결정>에서 저자는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자신에 관해 결정하는 한 형태"라고 소개한다. 자기 스스로 무엇을 욕망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자신의 삶에 내리는 결정은 진정한 의미의 자기 결정이라고 할 수 없다. 현재의 욕구를 예리하게 포착하지 못한다면 나의 삶은 과거의 욕구에 의해 관성적으로 이끌려 가게 된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탈주>. https://t1.daumcdn.net/movie/9d304f1b0a319c4f427e014dd3bea2f864168d85

영화 <탈주>에서 규남은 끊임없이 자기 인식에 몰두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여러 가지 장래희망을 공책에 쓰고 지우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고민해 왔다. 현상이 달콤한 제안을 했을 때에도 규남은 잠시 마음이 흔들리는 듯했으나 아주 찰나의 순간에 자신의 욕망에 귀를 바짝 기울였다. '지금 내가 원하는 게 뭐지?' 규남이 원하는 것은 명확했다. 관객인 내가 보기에 그의 욕구가 명확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규남 스스로가 자기 자신이 원하는 바를 아주 명확하게 인식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는 계획이 중요하지 않았다. 계획대로 정확하게 흘러가는 삶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에 세운 계획이 현재에도 반드시 통하리라는 법도 없다. 심지어 하루에도 몇 번씩 나의 욕구가 달라지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나의 욕구를 예리하게 포착하고 그것을 나의 행동과 일치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상은 욕구와 행동 사이에 간극을 경험한다. 그는 그 간극에 부닥칠 때마다 난폭해진다. 흥겹게 피아노를 치던 고운 손으로 사람을 무자비하게 폭행한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탈주>. https://t1.daumcdn.net/movie/d1f21becac866bc14333f16a188ea0289e0d874d

탈주하는 규남을 보는 현상은 괴롭다. 자신도 탈주하고 싶기 때문이다. 현상은 미치도록 탈주하고 싶다. 그는 립밤을 바르고 전자담배를 피우면서 피아노를 치고 싶다. 그러나 피아니스트를 대외적인 직업으로 삼을 수는 없다. 그는 어쩌면 과거에 러시아에서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사랑은 비밀에 부쳐야 하는 사랑이다. 현상이 규남을 때려잡는 것은 자기 안의 욕구를 때려잡는 것과도 같다. 보위부 간부로서의 직업적 역할을 강조하며 반동분자를 때려잡는 행위를 현상은 멈출 수가 없다. 규남이 그대로 탈주하도록 내버려 두면 애써 모른 척했던 자신의 욕구가 미쳐 날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현상은 그냥 산다. 주어진 일을 하면서 그냥 사는 사람이다. 그런 삶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상에게 있어 그런 삶은 나쁘다. 자기 인식에 기반한 자기 결정의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상은 반드시 규남을 죽여야만 한다. 규남을 죽여 없애야만 자신의 욕구와 행동 사이의 괴리가 일으키는 찝찝한 불편함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 있다. 현상이 총구를 겨누는 상대는 규남이 아니라 현상 자기 자신이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탈주>. https://t1.daumcdn.net/movie/fa992fb55892acad0bfa8a6c60f9db5e6e76d384

규남과 현상 모두 북한에서 태어났다. 가정환경은 달랐지만 자유를 억압하는 북한이라는 거대한 외부 환경은 같았다. 탈주의 기회는 규남보다 현상에게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규남은 자유를 고작 책 한 권으로 배웠지만 현상은 러시아에서 지내는 동안 어느 정도 자유를 누려본 적이 있다. 그러나 둘은 완전히 다른 선택을 했다. 외부의 구속이 극심한 상황에서 규남은 스스로를 구속하기를 멈추었고 현상은 계속해서 스스로를 구속했다. 소위 서양 문물이 철저하게 통제되는 곳에서, 현상은 사람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립밤을 바르고 전자담배를 피울 수 있는 자유가 있는 듯하지만, 그는 전혀 자유로워 보이지 않는다. 아내와 아이가 있지만 러시아에서 만난 과거의 사랑에 향하는 끈적한 시선을 거두기가 힘들다. 과거의 사랑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완전히 무시하지도 못한다. 그의 욕구는 그렇게 자기 자신의 선택에 의해 좌절된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변한다. 군을 지휘하고 사단장의 비위를 맞추는 일에 그는 결연함을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욕구가 반영되지 않은 관성적인 업무에 결연함 같은 것이 설 자리는 없다. 반면 규남은 결연하다. 탈주를 하다 죽어도 그것은 자신의 결정에 의한 것이다. 규남에게 있어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자신의 욕구를 관철시킬 수 없는 삶을 영원히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탈주>. https://t1.daumcdn.net/movie/c53848ce6b61a626afefb811c891e6167123994f

우리는 현상에 주목해야 한다. 현상을 보며 자기 진단을 해야 한다. 나는 현상처럼 살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자기 인식의 노력이 존엄과 행복으로 통하는 자기 결정의 삶의 출발이다. 우리를 둘러싼 사회와 문화는 우리에게 풍요와 안정을 가져다주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에서 벗어난 사고를 하지 못하게끔 하는 자기 억압의 굴레를 씌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문화에 너무도 익숙해져서 우리의 의식이 그것에 푹 절여져 버리는 것이다. 나는 자유를 이렇게 정의한다. 나 스스로 결정하지 않았지만 나 자신을 어느 정도 규정하는 것들로부터 스스로 의도적으로 멀어짐으로써 쟁취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성별, 국적, 인종, 민족, 가족 등등은 태어나기 전에 나 스스로 결정한 것이 아니다. 태어나면서 우연히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이 우리의 많은 부분을 설명하게끔 그냥 내버려 둔다. 내가 결정하지도 않은 나의 특징들에 나를 꾸역꾸역 욱여넣는다. 어쩌면 내가 살았을지도 모를 무수한 다른 삶의 경로들을 상상하며, 우리는 무한한 경우의 수 중에서 내가 욕망하는 하나의 삶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순도 높은 자유를 경험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자유롭게 해야 한다. 


hiphopstep. 



참고문헌 


파시칼 메르시어 (페터 비에리). (2015). 자기 결정.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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