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오브 인터레스트 (The Zone of Interest)
감독: 조나단 글래이저 (Jonathan Glazer)
2024년 개봉
커버 이미지 출처: 다음 검색 <존 오브 인터레스트> 포토. https://t1.daumcdn.net/movie/5c79fc4fc92b6b3969cfab5cf44a797baf787672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리뷰한 글입니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홀로코스트. 안타까운 사건임에 분명하지만 나와는 딱히 관계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미안하지만 당신은 아이히만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다. 이미 우리들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시작되었다. The Zone of Interest. 직역하면 '관심 영역'이고 또 다르게는 '이해관계의 영역'이라고 말해도 괜찮겠다. 누구나 관심사와 이해관계가 있다. 그렇기에 개인과 집단은 마구 뒤엉켜 충돌한다. 혹자는 갈등이 없는 상태를 이상적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우리는 멀고 가까운 역사를 경험하며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확인하였다. 주변을 둘러보자. 생김새도, 옷차림도, 성향도, 취향도 모두 다른 우리들의 이웃들. 나와 다른 것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니 갈등은 자연스러운 상태이며 오히려 갈등이 없는 것이 인위적이다. 만약 갈등이 전혀 없는 사회가 있다면 그것은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침묵을 강요받거나 희생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아주 얇은 담장 너머로 나치 독일의 장교 루돌프 가족이 살고 있다. 온갖 아름다운 식물과 채소가 자라는 마당과 정원에서 아이들이 웃으며 뛰어논다. 수영장에서 물장구도 친다. 매일 아침 머리를 곱게 빗고 잘 다려진 옷을 입고는 학교에 간다. 담장 너머의 이 낙원 같은 집은 루돌프 가족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다. 담장은 관심 영역의 경계를 시각적으로 비교적 뚜렷하게 구분한다. 담장 너머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그들이 알 바가 전혀 아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직업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루돌프의 아내와 아이들에게는 적어도 그렇다. 그들에게는 겨울에 닥치는 한파가 더 걱정이다. 그러나 담장이 넘어오는 음성까지 막아주지는 못한다. 총성과 비명소리가 산발적으로 울려 퍼진다. 끔찍한 소리가 이따금 그들의 아름다운 관심 영역으로 조금씩 아주 조금씩 침습한다. 연기가 피어오를 때도 있다. 루돌프 가족은 인간의 살이 타는 냄새를 맡으며 지냈을 것이다. 영화관의 스크린은 냄새까지 전달해주지는 못한다. 담장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루돌프 가족의 집을 구분 짓는 일차적인 경계이고 영화관의 스크린은 그들과 관객인 우리를 구분 짓는 이차적인 경계이다. 두 개의 경계가 관객의 영역 (zone)을 힘겹게 보호한다. 그 모든 장면과 음성 그리고 냄새를 아무런 경계 없이 맞닥뜨렸다면 관객들은 구역질을 하고 정신을 잃었을 것이다.
실제로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는 아이에게 꽃 향기를 맡게 하는 장면이 있다. 거기서 아이가 무슨 냄새를 맡았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정원에는 온갖 꽃들이 가득하다. 그러나 정원에 핀 꽃보다 훨씬 더 많은 유대인들이 담장 너머에서 죽임을 당했다. 피 비린내와 살이 타는 냄새 그리고 꽃 향기. 어떤 냄새가 더 진하게 그 공간을 메웠을까. 어린아이는 그곳에서 어떤 냄새를 맡으며 자랐을까. 잔인한 사실은 인간의 오감 중 후각은 가장 예민하지만 그만큼 쉽게 지치기 때문에 다른 감각에 비해 적응이 훨씬 빠르다는 것이다. 이미 루돌프와 그의 아내는 잔혹함에 무뎌진 듯해 보인다. 그들은 아우슈비츠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다 알고 있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그곳을 떠나기 싫어한다. 아름다운 정원 생활과 달콤한 안정감을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루돌프의 아내는 갑자기 전출 명령이 떨어진 남편의 상황에 탐탁지 않아 한다. 자기가 살고 있는 영역의 아주 가까운 바깥 영역에서 인간의 피가 흐르고 살이 타는 것에 분노하지 않는다. 그들이 분노하고 걱정하는 것은 오직 그들 자신의 이해관계다.
이미 우리들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시작되었다. 나의 관심 영역 주변으로 울타리를 두르고 그 밖의 것들을 모두 죽여버리는 식의 행태 말이다. 이는 비단 전쟁이나 홀로코스트로 국한할 문제가 아니다. 학창 시절에 님비 (Not In My Back Yard)나 핌피 (Please In My Front Yard)를 배웠던 기억이 있다. 그 후로 십 수년이 지났는데 이 문제는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심해졌다. 심지어는 현실 세계에서만 일어나던 집단 이기주의의 행태가 온라인으로 옮겨가 그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다.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갈등과 혐오는 과거 홀로코스트의 모습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 영화 속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담장은 스마트폰 스크린과 익명성으로 옮겨갔다. 가상의 세계에서는 물리적인 폭력과 살인은 일어나지 않지만 그에 못지않은 인격 살인, 명예 실추, 언어폭력 등이 매우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분명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지만 의견을 표현하고 갈등을 빚는 방법은 전혀 민주적이지 않다. 민주적인 삶이란 한쪽이 죽어야만이 내가 살아남는 그런 게임 같은 것이 아니다. 설령 양극단에 놓인 가치관이라도 경쟁하며 공존할 수 있는 것이 민주 사회다. 나의 관심 영역과 타인의 관심 영역이 충돌하며 끊임없는 갈등과 타협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하는 것이 싫어 타인의 영역을 말살해 버리는 쪽을 선택하고 있다. 반드시 필요한 충돌을 매우 적극적으로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아우슈비츠 담장을 넘어왔을 그 끔찍하고 잔혹한 냄새처럼 온라인상에서의 혐오는 스마트폰 스크린을 넘어 현실 세계에 닿는다. 이미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혐오 범죄들이 온라인에서 싹 터 오프라인으로 일사불란하게 넘어왔다. 나치 독일의 명령 하달과도 같은 일사불란함이다. 그 명령을 하달받고 수행하는 데에 자신의 생각 따위는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저 위에서 까라니 까는 것이다. 혐오의 근거는 매우 모호하지만 한번 자리 잡은 혐오는 떨치는 것이 쉽지가 않다. 심지어 혐오 감정에 자신의 실제 경험이 반영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일상에서 노인과 마주쳐 대화할 기회가 현저히 적은 청년들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 노인에 대한 혐오 감정이 싹트기도 한다. 특정 성별과 인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평소에 제대로 겪어보지도 않은 대상에 대한 혐오 감정은 십중팔구 미디어에서 넘어온 것이다. 말 한마디 섞어보지 않았음에도 온갖 판단과 평가의 말들을 쏟아내면서 자기 영역 밖의 타인을 죽이기에 열중이다. 요즘에는 어린아이들의 교실과 놀이터에도 혐오 표현이 만연해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개근거지와 휴거 등등 듣지도 보지도 못한 끔찍한 혐오 표현이 결국 학교의 담장을 넘었다. 많은 이들이 실체가 없는 혐오 속에서 비명을 지른다. 실제로 죽는 이들마저 생긴다. 그러나 희생자들은 빠르게 잊힌다. 자신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 밖의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는 시대다.
자신의 관심 영역을 지키면서 동시에 타인의 영역을 존중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건강하게 갈등을 빚을 줄 알아야 한다. 상대와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고민해야 한다. 상대방의 머릿니가 내 머리로 옮겨오리라는 두려움에 빠져 머리를 맞대기는커녕 목을 베어버리는 어리석은 폭력을 중단해야 한다. 이미 내 영역의 주변으로 담장이 쳐져 있다면 적어도 그 담장 너머로 수류탄을 던지는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 심리학자 스티븐 핑거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 이렇게 썼다. "네 이웃과 적을 죽이지 마라. 설령 그들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나는 궁금하다. 끔찍한 비명소리와 시체를 소각하는 냄새를 맡고 자란 영화 속 아이들이 과연 어떤 성인이 되었을지 말이다. 그들은 이웃과 적을 죽이지 않는 성인이 되었을까? 아니면 그들의 부모처럼 폭력에 무뎌져 버렸을까. 평생 헛구역질을 하면서 말이다.
hiphopste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