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육칠공, 이쪽에는 정말 아무도 남지 않게 될까

by 힙합스텝

3670

감독: 박준호

2025년 개봉


커버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3670> 포토. https://search.pstatic.net/common?quality=75&direct=true&src=https%3A%2F%2Fmovie-phinf.pstatic.net%2F20250806_42%2F1754445032718QvhKz_JPEG%2Fmovie_image.jpg


영화 <3670>를 리뷰한 글입니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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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다. 스스로 선택한 것과 어쩌다 주어진 것들 사이에서 하루에도 수 십 번씩 갈팡질팡하면서. 집에서 나는 얌전한 아들이었다가, 학교에선 말괄량이 소년으로 돌변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오랜 친구이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지독한 원수이기도 하다. 엄마는 환갑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단다. 당신의 말과 행동에 일관성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고, 이래도 되는 게 맞냐고 내게 묻는다. 아무렴 어떨까. 무엇이 되었든 그것이 전부 그녀인 것을. 가지가 하나로 뻗은 나무를 본 적이 없다. 뿌리를 한 줄기로 내린 나무도 본 적이 없다. 단 하나의 자기만을 품고 있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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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3670>의 철준은 북한이탈주민과 게이 정체성이 교차하는 지점에 서있다. 그의 삶의 경험은 주변에서 쉬이 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확실히 낯설다. 그러나 극이 진행되면서 탈북 게이의 낯섦은 점점 희미해진다. 철준은 그저 심심하지 않게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싶은 이십 대 남성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 새로 끼고 싶은 쿨한 무리에 그럭저럭 체면을 구기지 않는 일원이 되려면 옷 입는 스타일부터 바꿔야 한다. 말투도 좀 더 나긋하게. 과거에 지내던 무리와는 데면데면해질 수밖에 없다. 그들은 여전히 소중하지만, 내심 쪽팔리는 건 어쩔 수 없으니까. 철준은 마치 인서울에 성공해 상경한 어느 지방 출신의 대학생 같다. 함경북도 청진도 지방이라면 지방일 테다. 십 년 전의 내가 그랬다. 서울에 처음 온 나는 지하철 환승에 익숙한 사람처럼 보이는 게 인생의 가장 큰 숙제였다. 회색 후드와 촌스러운 청바지를 입고 동대문역사공원역에서 땀을 흘리던 날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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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들은 당연하게도 퀴어 정체성으로만 살아가지 않는다. 퀴어로서의 자기표현은 어느 곳에서는 펼쳐졌다가 다른 어느 곳에서는 접힌다. 정체성의 전략적 관리는 퀴어들이 평생 동안 개발해 온 역량이자 자산이다. 한국이 마음껏 퀴어 정체성을 펼쳐 놓기에 이상적이지 않은 것은 유감이지만 그들은 결코 불행하기만 한 존재가 아니다. 밴쿠버 국제 영화제에서 박준호 감독은 한국 게이 커뮤니티의 역동성을 언급했다. 얻어맞기만 하는 존재에게서는 역동성을 찾기 어렵다. 얻어맞고, 넘어지고, 일어서고, 다시 뛰고. 때로는 내 얼굴에 주먹을 날린 작자에게 크게 소리를 지를 줄 아는 한국의 게이들은 역동적이다. 그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이쪽' 문화를 이뤄냈고, 가끔씩 <3670>과 같은 형태로 이쪽의 경계를 넘어 사람들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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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탈주민으로서 철준과 학민이 짊어진 고민의 무게는 남한에서 태어난 우리가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가족을 향한 걱정과 사랑만큼은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철준의 정체성이 주는 낯섦은 다시 한번 옅어진다. 철준과 영준, 그리고 현택이 얽히고설켜 빚어내는 오해와 갈등도 여느 대학교 MT나 과방에서 한 번쯤은 볼 법한 삼각관계다. 영화 <3670>은 ‘탈북’과 ‘게이’ 커뮤니티를 향한 애정을 분명히 드러내면서도, 그것을 감정의 과잉으로 몰고 가지 않는다. 심각한 분위기와 과잉 감정으로 점철된 과거의 한국 퀴어 영화들은 퀴어의 삶과 문화를 그들만의 울타리 안에 가둬버리는 실수를 범하곤 했다. 그러나 퀴어는 어디에나, 어떤 형태로든 존재한다. 그들은 언제나 울타리 밖에서 모두와 함께 어울려 있었다. 내 곁에 없다고 해서, 평소에 쉽게 마주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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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밍아웃은 퀴어의 삶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삶의 전부는 아니다. 마치 남북통일이 중요한 주제이지만, 반드시 필요하냐는 별개의 문제인 것과 같다. 철준은 커밍아웃 없이 커밍아웃을 한다. 누군가는 그의 머뭇거림을 알아차리고, 누군가는 계속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절절하고 거창한 정체성 의식을 치르지 않아도, 퀴어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저마다의 삶을 살아간다. 정체성을 숨기는 것이 웰빙에 해로울 수 있다는 심리학 연구가 많지만, 그렇다고 커밍아웃을 하지 않는 퀴어를 탓할 수는 없다. 게이라고 말하면 말한 대로, 말하지 않으면 말하지 않은 대로 불편한 시선을 받아야 한다. 문제는 바로 이렇게 생겨먹은 사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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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준을 퀴어 친화적인 캐나다로 보내면서, 박준호 감독의 교차적 정체성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이 더욱 드러난다. 영준은 캐나다에서 이민자 게이로서 정체성이 전환되며, 철준이 겪었던 것과 유사한 교차적 정체성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영준은 서울에서 비교적 견고하게 쌓아온 ‘이쪽’의 네트워크를 뒤로하고, 캐나다에서 새로운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종로3가역 6번 출구, 그리고 저녁 7시. 마지막에 ‘영’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가볍고 피상적인 관계가 만연한 게이 커뮤니티의 공허함을 나타낼까, 아니면 그들의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 그리고 역동성을 보여주는 것일까. 혹은 캐나다에서 다시 제로베이스로 시작해야 하는 영준의 처지를 말하는 걸까. 영화제에서 물어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종로3가역 6번 출구, 저녁 7시에 철준이 만날 사람은 이제 꼭 게이 친구들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는 누군가의 탈북 동지이고, 교회에서 간증을 하는 성도이며, 이모의 조카이고, 힙합을 듣는 이십 대 청년이자, 게이이다. 그의 이쪽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있다. 오렌지 태양 아래 그림자 없이 함께 춤을 출 사람들이.

hiphopstep.


태평양 건너 와주신 박준호 감독님, 조유현 그리고 김현목 배우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