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빛 (Winter Light)
감독: 조현서
2025년 상영
커버 이미지 출처: 전주국제영화제 <겨울의 빛> 포토. https://entry.jeonjufest.kr/uploads/MOVIE/202503/20250327174134.jpg
영화 <겨울의 빛>을 리뷰한 글입니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다빈은 체념했다고 했다. 밴쿠버에서 조현서 감독이 그랬다. "그는 체념한 것이 아닌가" 하고. 그렇다면 이 영화는 왜 <겨울의 빛>이라 불리는 것인가. 갖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다빈은 꽤 잘 적응하는 듯했다. 특히 다빈이 겪은 가족 내 역할의 잦은 변화는 멀미를 느끼기에 충분할 정도로 격했다. 그는 막내로 태어났다가, 여동생이 태어나면서 둘째 아들이 되었다가, 형이 가출을 하면서 장남이 된다. 아버지는 사기를 당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본인도 이른 시간 등교를 해야 하지만,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막내 동생을 등하교시켜야 하는 돌봄을 떠안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빈은 결코 선을 넘는 행위를 하지 않는데, 나는 그것이 다빈의 타고난 선한 성품과 강인함 때문인지 궁금했다.
조현서 감독은 분명히 그것이 적응이라기보다 체념에 가깝다고 그랬다. 어려움에 그저 무뎌진 것이라고. 그러나 체념도 적응의 일종이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적당히 타협하는 것도 무너지지 않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적응의 한 종류다. 그로 말미암아 대단히 더 행복해진다거나, 대단히 덜 불행해진다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다빈은 일탈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오히려 타인에게 비교적 모범이 되며 주변으로부터 신뢰를 쌓는다. 당장은 힘겹더라도 그것은 분명 미래에 자산이 된다. 그는 도망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견디지 못해 가출한 형에게 너만 살자고 도망치냐며 고래고래 소리친다. 그러나 형은 도망친 사람치고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다빈은 무작정 떠났다가 형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다빈은 형의 뒤를 밟지도, 아버지의 뒤를 밟지도 않는다. 힘겹게 모은 해외연수 돈을 몽땅 도둑맞은 다빈의 상황은 사기를 당했던 과거 아버지의 상황과 묘하게 겹친다. 그러나 그는 그 일 때문에 자신과 타인을 해하는 결과에 다다르지 않는다. 오히려 친구를 지키려 애를 쓴다. 결국 다빈은 그 돈을 자신이 아닌 가족을 위해 사용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자신의 의지에 반한 행동이라고는 할 수 없다. 가장 우선하는 목표는 아닐지언정 가난과 아픔 속에서도 가족이 그럭저럭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만큼은 진심이었을 테니 말이다.
나는 성유빈 배우의 서늘하면서도 따뜻한 얼굴이 좋다. 그가 혹시 밴쿠버에 올까 싶어 미리 써두었던 편지에도 그렇게 적었다. 사람들은 뜨거운 욕조 속에서 몸을 녹이는 걸 즐기면서도, 욕조 밖의 찬 공기를 느끼는 걸 좋아하기도 한다고. 유빈 배우에게서는 그런 것이 느껴진다고. 서늘하면서도 따뜻한 그늘과 햇빛이 모두 드리워진 눈빛. 오랫동안 큰 스크린 속에서 빛나는 유빈 배우의 그 눈빛을 동경해 왔다고. 아쉽게도 밴쿠버에서 성유빈 배우를 직접 만날 수는 없었다. 그가 만약 극장에 왔다면 그에게도 물어보았을 것이다. 다빈은, 정말 체념한 걸까요?
hiphopstep.
태평양 건너 먼 곳까지 와주신 조현서 감독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