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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힙합스텝 Jul 22. 2023

중경삼림, 신뢰가 부재한 도시 (1)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구강기 고착의 관점에서

중경삼림 (Chungking Express, 重慶森林)

감독: 왕가위

1994년 개봉 (홍콩)  


커버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중경삼림> 영상/포토.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7033


영화 <중경삼림>을 심리학의 이론으로 분석한 글입니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은 홍콩의 풍경을 낭만적인 미장센으로 그려낸 것으로 유명하다. <중경삼림>의 직역은 ‘홍콩의 빌딩 숲’으로 영화의 제목부터가 홍콩 그 자체를 반영한다. 이국적인 네온사인, 매력적인 남녀 배우 그리고 익숙하게 울려 퍼지는 OST의 향연을 즐기다 보면 어느새 홍콩으로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마저 든다. <중경삼림>은 크게 2부로 구성되어 있고 두 챕터 모두 어딘가 모르게 눅눅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마저도 홍콩 특유의 분위기에 잘 스며들어 있어 우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직접 경험해보지도 않은 90년대 홍콩의 향수에 묘하게 젖는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울려 퍼지는 경찰 223의 내레이션은 <중경삼림>의 핵심을 관통한다. 



매일 많은 사람과 스쳐 지나가지만 아마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은 없을 것이다.
 


홍콩은 전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조밀한 도시 중 하나다. 홍콩의 전체 면적은 서울의 1.82배이지만, 땅 대부분이 개발하기 어려운 산지이기 때문에 다수의 인구가 홍콩섬과 구룡반도 일대에 밀집해 있다. 큰 도시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익명의 사람들과 스치는지 말이다.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른다. 당장 옆집에 사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버스 정류장이나 지하철역에서 마주친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해 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서울에만 천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러나 그 천만 명 중에 우리가 직접 관계를 맺고 지내는 이는 십수 명에 불과하다. 


하나의 사람이 하나의 노드 (node)라면 우리는 노드와 노드 사이를 선으로 연결할 수 있다. 노드 사이에 연결된 선은 경로 (path)를 만들고 그 경로를 통해 사람들은 생각과 감정을 나눈다. <중경삼림>의 배경이 된 1990년대의 홍콩의 인구는 대략 570만 명이었다. 그러니까 홍콩에는 570만 개의 노드가 존재했다는 뜻이다. 570만 개의 노드를 이을 수 있는 선과 그 선이 만들어내는 경로의 가능성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홍콩은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발전시킬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무한한 그야말로 대도시인 것이다.


이러한 조밀한 대도시의 환경이 제대로 유지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구성원 사이의 신뢰이다. 내 이웃이 나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길을 걷다 누군가로부터 봉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처음 만나 관계를 시작하게 된 사람이 여러모로 이상한 사람이 아닐 것이라는 믿음. 이러한 믿음이 전제되어야 사람들은 안심하고 570만 개의 노드 사이에 경로를 만들며 관계의 외연을 확장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중경삼림>에서 그린 홍콩이라는 도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가 잘 보이지 않는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중경삼림> 영상/포토.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7033


우선 인물의 이름부터가 그렇다. 1부와 2부 모두 남성 주인공들은 경찰로 등장하는데 이들의 배역 명칭은 각각 경찰 223, 경찰 663이다. 남성 주인공으로서 실컷 극을 이끌어나가지만 결국 이들의 이름은 숫자로 남는다. 익명은 신뢰의 부재를 보여주는 아주 강력한 지표이다. 타인에게 진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자기 개방이야말로 타인을 신뢰하고 있다는 강한 증거이며, 이름을 알리는 것은 자기 개방의 시작이자 관계의 출발이다. 



[2부에서 계속]



참고문헌


방승환. (2019). 영화 ‘중경삼림’(Chungking Express)_홍콩, 유통기한이 있는 도시. 국토, 4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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