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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힙합스텝 Jul 27. 2023

웨스 앤더슨을 이해하지 마셔요

떠먹여 주는 텍스트에 너무도 길들여진 우리

커버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영상/포토.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73204#


웨스 앤더슨 감독 작품에 대한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특정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지 않습니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영상/포토.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73204


영화든 회화든 출판물이든 어떤 형식의 예술이든 그것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려고'만' 하면 무척 괴로워진다. 예술 작품들은 대개 논리적인 이해를 요구하지 않는다. 종합적인 '감상'을 요한다. tvN 프로그램 <알쓸신잡>에서 김영하 작가는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창작자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작품에 숨겨놓고, 감상자로 하여금 그것을 보물찾기 하듯 찾아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고. 만일 그런 의도성이 다분한 작품이 있다면 어쩌면 그것은 프로파간다에 가까울 지도 모른다. 


작품의 요모조모를 세세하게 따지는 행위로부터 영화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도, 자기만의 주관적인 느낌과 해석으로 작품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도 모두 관객인 자신의 재량이다. 그러나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작품 전체의 가치가 못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특히 웨스 앤더슨의 작품을 보면서 단지 이야기가 이해가 되지 않고, 감독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는 이유로 작품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것은 다소 이상하게 느껴진다. 특정한 메시지나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영화가 있는 반면, 아름답고 조화로운 색감과 이미지, 음악,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도 있다. 필자의 견해로 웨스 앤더슨의 작품은 후자에 가까운 듯하다. 그래서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보지 않는다. 그냥 아름다운 것을 즐기면서 본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필자가 15년도에 스페인 여행을 갔을 때 마드리드에 위치한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에 들른 적이 있다. 그곳의 많은 컬렉션 중 가장 좋았던 작품은 몬드리안의 추상화였다. 단순한 선과 면 그리고 몇 가지의 색으로 이루어진 이 추상화를 감상할 때 나는 이성과 논리를 동반하지 않았다. 저 선은 왜 하필 저기에 그어졌을까? 저 면에만 붉은색이 칠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몬드리안이 말하고자 했던 바는 무엇일까?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작품을 감상하지 않았다. 반듯하게 그어진 선이 그저 아름다워 보였고, 심플한 디자인에 마음이 끌렸을 뿐이다. 설령 원작자인 몬드리안이 이 그림을 통해 말하고 싶은 바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감상자인 나에게는 그것이 썩 중요하지는 않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프렌치 디스패치> <애스터로이드 시티> <문라이즈 킹덤> 스틸컷.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에서 각 영화의 영상/포토.


웨스 앤더슨 작품의 진입장벽이 높게 느껴진다면,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그는 "딥 포커스(deep focus)" 기법을 사용한다. 딥 포커스 기법은 한 프레임 안의 모든 피사체에 포커스를 두는 것으로, 배경과 전경이 모두 스크린에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관객은 피로를 느낀다. 한 프레임 안에 전달되는 정보의 양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도무지 어디에 초점을 두고 영화를 보아야 하는지 혼란스럽다. 캐스팅은 또 오죽 화려한가? 그러나 그가 전개하는 이야기에서는 주연, 조연, 단역 할 것 없이 모든 인물들이 핵심이다. 왜냐하면 그가 써 내려가는 이야기는 대체로 전쟁, 투쟁, 시위, 혁명, 역사적 사건의 한복판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서 모든 인물들은 맡은 바 자신의 역할을 다 하는 자신의 삶에 매우 충실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화면의 모든 피사체에 초점을 두는 딥 포커스는 웨스 앤더슨 감독의 합리적인 연출적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그는 "액자식 구성"을 사용한다. 사실 액자식 구성은 소설을 읽을 때에도 독자가 피로를 가장 심하게 느끼는 구성 중 하나이다. 독자는 액자 밖과 안의 연결고리를 계속 예의주시하며 서사를 따라가야 하고, 액자 안팎의 경계가 모호해지거나 경계를 넘나드는 한 지점을 놓치기라도 하는 순간에는 이야기가 당최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 것인지 알아차리기가 매우 난감해진다. 필자가 기억하기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웨스 앤더슨은 무려 네 겹이나 되는 액자를 서사에 뒤집어 씌웠다. 웨스 앤더슨은 영화 속 이야기를 액자 안팎의 가상의 창작자의 입을 빌려 장황하게 설명하는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마치 어디에선가 실제로 있었을 법한 이야기로 전환한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프렌치 디스패> 영상/포토.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29414


딥 포커스로 만든 그의 세계에서 어떤 피사체에 초점을 둘지 선택해야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관객이다. 그것으로부터 무언가를 느끼며 영화적인 체험을 하는 것도 관객의 몫이다. 이해를 하든, 해석을 하든, 비평을 하든 무얼 하든 작품을 본 이후에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소화해 내는 것은 관객인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다. 필자도 웨스 앤더슨 작품들의 내용을 전부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풀어가는 이야기의 모든 사건과 연도, 내레이션으로 설명하는 장황한 상황들과 낯선 단어들. 심지어는 인물들의 이름까지. 그것들을 모두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데 작품을 감상함에 있어 그것을 일일이 다 기억하면서 줄거리를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바로 그 지점이 의문이다. 예를 들어, 필자는 <프렌치 디스패치>에서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에피소드를 가장 좋아하고, 지금도 그 에피소드의 장면들을 가장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다른 에피소드들은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필자는 <프렌치 디스패치>가 나쁜 영화였다고 말하지 않는다. 분명히 좋았던 지점이 있고 그것을 충분히 감상하며 나름대로 즐겼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한국의 교육에서 감상과 느낌은 멸종했다. 눈 씻고 찾아봐도 작품에 대한 개인의 주관적인 감상을 격려하고 감정의 촉발을 장려하는 교육은 한국에 없다. 창작자는 그저 대중이 자신의 작품 세계를 마음껏 즐기고, 느끼며, 자기 나름대로의 감정이 일렁일 수 있도록 내버려 둔다. 예술 작품에 대한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분석과 이해 그리고 정답 찾기, 그런 것을 반영하는 예술 작품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지만, 만약 그런 것을 요구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아마 수능일 것이다. 


<보기>와 오지선다 그리고 세 줄 요약과 같은 떠먹여 주는 텍스트에 우리가 너무 길들여진 것은 아닐까.  


hiphopstep.



추신: 책과 영화를 보고 감상문을 써오라고 과제를 내어주면, 글의 절반을 줄거리를 요약하는 데 할애하는 학생들이 있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이런 비슷한 일은 심지어 대학원에서도 벌어지는 것으로 추측한다. 왜냐하면, 필자가 수강한 한 대학원 강의에서 영화를 보고 인물의 이상 심리와 행동을 분석하는 과제가 있었는데, 교수님께서 석사 학생들에게 "과제에 절대 줄거리를 쓰지 말 것"이라고 강조하신 적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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