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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힙합스텝 Aug 14. 2023

'좋은 엄마' 프레임 이제는 그만

82년생 김지영과 대상관계 이론 

82년생 김지영 (KIM JI-YOUNG, BORN 1982)

감독: 김도영

2019년 개봉 


커버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82년생 김지영> 영상/포토.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24806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상담이론의 관점에서 분석한 글입니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화병(火病)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 화병이 돋는다고 말할 때의 그 화병이다. 화병은 놀랍게도 관용적 표현이 아니며 실제 정신건강의학과와 가정의학과 등에서 사용하는 진단명이다. 한국 특유의 문화적 배경이 반영된 이 질환은 우울과 분노를 억누르기에 발생한다. 쉽게 말하자면 참아서 생기는 병이다. 정당한 자신의 분노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할 때 그 한이 쌓이고 쌓여 신체적 증상으로 발현된다. 화병의 대표적인 증상으로는 우울감, 식욕 저하, 불면, 명치에 무언가가 걸려 있는 느낌 등이 있다. 울고 싶을 때 마음껏 울고, 화가 치밀어 오를 때 적당히 분노하고, 행복하고 기쁠 때 한바탕 웃는 것. 감정을 그 감정에 맞는 방식으로 제때에 건강하게만 해소할 수 있다면 우리는 조금 더 편한 마음으로 살 수 있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82년생 김지영> 영상/포토.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24806


영화 <82년생 김지영>에 등장하는 김 팀장은 잘 나가는 워킹맘이다. 그런데 회사의 양 이사라는 작자는 공식적인 회의 석상에서 그녀와 그녀의 가족을 아무렇지도 않게 조롱한다.


양 이사: 애는 엄마가 옆에 딱 있어야 돼. 나중에 어디가 한 군데 잘못돼도 잘못된다고. 성공하면 뭐 할 거야. 자식 농사 망치면 다 끝나는데. 


김 팀장은 아주 세련되고도 비극적인 방식으로 응수한다. 


김 팀장: 그거 홍보문구로 쓰면 괜찮을 것 같아요. 엄마가 키우지 않아 문제가 생긴 아이들을 위한 비타민. 엄마의 마음으로 준비했다.


자신을 향한 조롱을 새 비타민의 홍보문구로 이 악물고 치환해 버리는 그녀는 과거부터 어쩔 수 없이 이런 비참한 방식을 취함으로써 팀장의 자리에 올랐을 것이다. 모욕에 대한 분노를 참고 또 참으며 말이다. 김 팀장의 제안에 양 이사는 기가 막히도록 역설적인 답변을 내어놓는다. 


양 이사: 그랬다가 나중에 직장 다니는 엄마들에게 한 방 맞지.

김 팀장: 그럼 저한테도 한 방 맞으셔야죠.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82년생 김지영> 영상/포토.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24806


분위기는 급속도로 냉랭해지고 말단 사원들은 오금이 저리기 시작한다. 김 팀장은 남성 중심의 조직 사회에서 자신이 쟁취한 권력으로 남성 구성원들을 긴장하게 만든 이 영화의 유일한 여성 인물이다. 자신은 이 판에 숨 막히는 공포와 긴장을 삽시간에 불러올 수 있는 능력과 힘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우스꽝스러운 율동을 선보이며 회의실의 긴장감을 누그러뜨린다. 모멸감으로 인한 김 팀장의 분노는 결국 분노 그 자체로써 해소되지 않고 회의가 시작되며 흐지부지 막을 내린다. 김 팀장은 숙련된 모습으로 회의실의 공기에 불을 지피고 또 능숙하게 그 불을 끄지만 자기 마음 안의 화병(火病)의 불씨는 계속 키우고 있다. 


김 팀장은 자신은 좋은 엄마로는 함량 미달이고 좋은 아내, 좋은 딸이 되는 것은 애초에 포기했다고 말한다. 좋은 엄마, 좋은 아내, 좋은 딸은 어떤 엄마이고 어떤 아내이며 어떤 딸일까. 영화에서는 기성세대가 좋은 여성을 어떻게 규정해 왔는지 아주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전부 언급하지 않겠다. ‘좋다’는 것은 가치판단의 단어로써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이다. 따라서 ‘좋은 ○○’이나 ‘나쁜 ○○’이라는 지칭은 사실 나 자신에게만 해당하는 현실일 뿐 타인에게는 아무런 실체가 없는 환상일 수 있다. 그러므로 ‘좋은 ○○' 프레임에 대어 모든 여성을 재단하고 평가해야 했던 과거는 우리 공동체 구성원들 모두가 마치 집단 최면에 걸린 듯 환상 속에서 뜬구름을 잡으며 살아야 했던 것과 다름이 없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82년생 김지영> 영상/포토.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24806


상담이론 중에서 애착과 분리에 주목하는 대상관계 이론(object-relations theory)이라는 것이 있다. 대상관계 이론은 중요한 타인과 나의 관계에 초점을 두며 현재 나의 인간관계가 과거에 이루어진 관계의 경험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어린 시절에 겪은 관계의 경험과 패턴이 성인이 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대인관계의 예로 등장하는 것이 어린 시절의 ‘나’와 ‘주 양육자’와의 관계이다. 대상관계 이론은 내담자가 주 양육자와 생애 초기에 어떻게 관계를 형성했는지 매우 유심히 살핀다. 그리고 그때의 경험이 전 생애에 걸쳐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한다. 


최근에는 그 경향이 바뀌고 있지만 대상관계 이론에서 주로 주목해 온 주 양육자는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였다. 신생아였던 아이가 점점 나이가 들수록 어머니는 아이의 모든 행동을 마냥 다 수용해주지 못하게 된다. 때로는 어머니가 아이의 행동을 다그치거나, 훈육하고, 거부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이때 어린아이는 혼란을 겪는다. 


나의 어머니는 과연 좋은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


아이는 좋은 엄마와 나쁜 엄마 사이에서 내적인 갈등을 빚는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냥 똑같은 어머니일 뿐 달라진 것은 없다. 인간은 다차원적이기에 누구나 좋은 면과 나쁜 면을 가지고 있고 그 모든 면을 다 합친 것이 한 사람이다.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좋은 엄마, 나쁜 엄마 같은 건 없다. 엄마는 좋은 사람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아이의 입장에서 자신의 떼씀을 수용해주지 않는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대상관계 이론은 주 양육자인 어머니가 아이와의 긍정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어머니가 아이와 긍정적인 상호작용을 하지 못할 경우 아이는 대인관계에서 극단적인 행태를 보이게 된다고 주장한다. 즉 아이가 인간을 다차원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분법적인 존재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나에게 못 해주는 사람은 그저 나쁜 사람이 되어버리고,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만이 좋은 사람이 된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통합해서 인식하지 못한다. 실제로 상담이론 교재를 보면 대상관계 이론의 관점에서 경계선 성격 장애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경계선 성격 장애는 대인관계에서 극단적이고 강렬한 분노와 애정이 교차하여 나타나는 것과 관련된 성격 장애의 하위 유형이다. 


지금쯤이면 눈치챘겠지만 대상관계 이론의 주장은 수많은 엄마들의 마음에 죄책감을 심어주었다. 특히 아이와 함께 '양적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워킹맘들의 죄책감은 극도로 증폭된다. 이 이론이 자신은 전혀 좋은 엄마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상담 이론 수업 중 교수님께서 "대상관계 이론 수업을 하다 보면, 아이를 키우는 엄마 수강생들 중에서는 죄책감이 느껴져서 지금 수업을 들을 게 아니라 빨리 집에 가야겠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세요."라고 언급하신 적 있다. 


자식 농사 망친다는 양 이사의 조롱은 김 팀장에게 비수가 되어 날아와 꽂힌다. 그의 발언은 근거가 전혀 없는 조롱임이 확실하지만, 김 팀장의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을 묘한 죄책감을 툭툭 건드린다. 잘못한 것 하나 없이 피어오른 죄책감은 김 팀장의 억울한 화병을 키우고 또 키운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82년생 김지영> 영상/포토.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24806


대상관계 이론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아이가 앞으로의 대인관계를 잘 형성하게끔 주 양육자가 잘 양육하고 훈육해야 한다는 것이지, 엄마가 옆에서 365일 24시간 아이를 케어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양육자에는 엄마뿐만 아니라 당연히 아빠도 포함된다. 별다른 이유가 없음에도 아이 양육에 참여하지 않는 아빠가 있다면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사람은 바로 그 아빠이다. 또 한 가지, 주 양육자가 꼭 엄마나 아빠만 되라는 법은 없다. 두 사람이 모두 바쁘면 새로운 대안으로써 제3의 양육자가 아이를 잘 양육하고 훈육해 주면 된다. 안전하고 체계적인 아이 돌봄 지원 제도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핵심은 '잘' 양육하는 것이지, '누가' 양육하느냐는 것이 아니다.   


1982년생 김지영이 스무 살이 된 때가 2002년. 그 후로 2023년까지 또 20년이 흘렀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얼마나 바뀌었을까? 2022년 통계청이 발표한 <상반기 지역별 고용조사 기혼 여성의 고용 현황>에 따르면 미취업 상태인 기혼 여성 약 302만 명 중 46.2%가 경력 단절을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경력 단절 여성 139만 7천 명을 연령계층별로 살펴보면, 30~39세가 60만 명 (43%)으로 가장 많았고, 40~49세가 58만 8천 명(42.1%)으로 그 뒤를 이었다. 경력 단절 여성이 직장(일)을 그만둔 사유는 육아가 42.8%, 결혼이 26.3%, 임신/출산 22.7%, 가족 돌봄 4.6%, 자녀교육 3.6% 순이었다. 82년생 김지영은 올해 연 나이로 41세를 맞았다. 92년생 김지영이 있다면 그녀는 지금 연 나이로 31세이고, 그녀가 저 60만 명 안에 포함되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경력 단절이 발생하지 않고, 공식 회의 석상에서 조롱을 듣지 않고, 육아 휴직을 마음 놓고 쓸 수 있는 사회는 여성에게 좋은 사회가 아니라 그냥 사람이 모여 살기에 좋은 사회다. 육아 휴직 제도가 있어도 사회구조 때문에 남성들도 그 제도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 아닌가? '좋은 여성' 프레임은 물론이고, 남성/여성의 성별 프레임, 이것저것 다 들어내고 나면 결국 그냥 '한 인간', '한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인간. 사람들. 이제 더는 억울한 죄책감과 화병 같은 건 없었으면 좋겠다. 누구에게나.   



hiphopstep.


82년생 김지영 특집호를 끝으로 '프레이밍 영화를 읽는 틀'에서의 영화분석을 마무리합니다.

8월 15일 '닫으며'를 발행합니다. 감사합니다.




참고 문헌



권영은. (2023. 07. 19). "남자도 돌봄노동하고 싶은데"...'남성다움'에 가두는 사회가 문제라고?. 한국일보. retreived from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071915540001273?did=NA

김춘경 외. (2010). 상담의 이론과 실제. 서울: 학지사. 


통계청. (2022). 2022년 상반기 지역별고용조사 기혼여성의 고용 현황. 대전: 통계청. https://kostat.go.kr/board.es?mid=a10301030300&bid=211&act=view&list_no=42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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