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필름 2023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힙합스텝 Aug 25. 2023

바비가 오펜하이머와 함께 걸을 때

바벤하이머의 실존주의 


영화 <바비>와 <오펜하이머>를 리뷰한 글입니다.
두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바비> & <오펜하이머> 영상/포토.


'바벤하이머(Barbenheimer)'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영화 <바비>와 <오펜하이머>의 제목을 합성한 단어다. 정반대의 색감과 분위기를 자아내는 두 영화가 북미에서 동시에 개봉하면서 바벤하이머라는 밈도 덩달아 유행하였다. 그런데 얼핏 보기에 완전히 다른 이 두 영화는 뜻밖에도 하나의 키워드를 관통한다. 바로 죽음이다. 어느 날 불현듯 죽음을 떠올리게 되면서 완벽했던 바비의 일상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한다. 원자폭탄을 탄생시킨 오펜하이머는 인류에게 자멸할 힘을 선사한 죽음의 아버지로 소개된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바비> 영상/포토.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14335


엄밀히 따져보자면 <바비>와 <오펜하이머>는 같은 이야기를 공유한다. <바비>에서는 그것이 실존주의(existentialism)로 언급되며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매우 구체적으로 서술된다. 실존주의란 무엇인가? 실존주의는 이 세상에서의 나의 존재에 대하여 고민하는 철학이다. 나는 굳이 이 세상에 왜 태어났는가? 어떻게 그리고 왜 살아야 하는가? 나의 존재는 이 세상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그 의미는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는가? 실존주의는 이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고민하며 답한다.


실존주의는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논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신이 부재한 상태에 대해서도 고민할 수밖에 없다. 실존주의에서 죽음이 언급되는 이유다. 구준표든 금잔디든, 문동은이든 박연진이든 그들이 신적 존재가 아닌 이상 인간이라면 언젠가 모두 죽음을 맞는다. 죽음이라는 부재의 상태는 역설적이게도 우리 존재의 종착역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결국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맞이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죽음이 없는 상태를 가리켜 그것이 바로 '삶'이라고 우리는 쉽게 착각하지만, 사실 죽음은 언제 어디에나 존재한다. 죽음이 없으면 삶도 없다. 왜냐하면 영생이 가능한 어떠한 방법이 개발되지 않는 한 삶에서 죽음을 결코 소거할 수 없고, 따라서 죽음이 없는 세상에서 우리의 삶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은 필연적이다.


바비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죽을 일이 없다. 죽을 일이 없기 때문에 죽음에 대하여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그 말은 즉슨 자신의 삶에 대하여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말과도 같다. 무슨 짓을 해도 죽지 않기에 간절하게 삶을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바비에게는 무엇이든 시도해 볼 수 있고, 무엇이든 되어볼 수 있는 시간이 무한대로 주어진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 주어진 시간은 유한하다. 대통령, 노벨상 수상자, 판사, 의사, CEO. 바비는 이 모든 것이 될 수 있지만, 인간은 한번 태어나 주어진 시간 안에 이 모든 것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으로 인한 삶의 유한함에 맞서 치열하게 자신의 존재를 고민해야 하고 무수한 인생의 경우의 수에서 단 몇 가지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오펜하이머> 영상/포토.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58260#


오펜하이머는 바비와는 달리 인간이다. 그래서 선택해야만 한다. 지도교수를 독살할 것인지, 외도를 저지를 것인지,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를 맡을 것인지, 프로젝트의 연구시설을 뉴멕시코에 지을 것인지, 공산당원들과 친분관계를 유지할 것인지, 수소폭탄 개발을 찬성할 것인지 반대할 것인지. 오펜하이머는 살아가며 이것들을 스스로 모두 선택해야 했다. 핵분열 폭탄 제작 프로젝트의 책임자로서의 오펜하이머와 프로젝트를 담당하지 않고 평범하게 물리학 교수로 살아가는 오펜하이머는 지구상에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어느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 만약 바비랜드의 바비라면? '맨해튼 프로젝트 바비'와 '평범한 교수 바비'가 동시에 존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물리학 교수이기에 미래의 결과를 수학으로 계산하여 예측한다. 정확하게 계산된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단위를 동반한 숫자는 그 크기가 가진 위력을 비교적 명확하게 보여준다. 물리학 교수는 그 공식과 숫자를 읽어낼 줄 아는 자이다. 중성자가 우라늄 원자를 때려 그 원자를 쪼갤 때 발생하는 힘으로 만든 폭탄이 얼마큼 큰 힘을 발휘할지 오펜하이머는 알고 있다. 그 폭탄이 인간의 목숨을 대규모로 앗아갈 것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다. 어쩌다 핵분열이 멈추지 않고 대기를 몽땅 태워버리는 사태가 벌어지는 날에는 인류 전체가 소멸해 버릴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원자 폭탄을 만드는 총책임자의 자리를 맡기로 선택하였고, 트리니티 실험을 성공시키는 편을 선택하였으며, 미 정부와 군에게 무시무시한 신무기를 선사하는 편을 선택하였다. 물리학적으로 시간을 과거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그래서 자신이 일단 선택한 일은 되돌릴 수가 없다는 것. 오펜하이머는 물리학 교수이기에 그 사실도 아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바비> & <오펜하이머> 영상/포토.


바비와 오펜하이머는 불안에 떤다. 그것은 실존적 불안이며, 곧 죽음에 대한 불안이다. 죽음이라는 게 없다면 느끼지 않았을 불안. 실제로 바비는 완벽한 바비랜드에서 전형적인 바비로서 죽음 없는 삶을 지속하다가 어느 날 죽음에 대해 떠올리면서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 죽음 없이 완벽했던 자신의 삶에도 어쩌면 끝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바비는 불안해진다. 바비만을 위한 집에서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완벽한 바비의 삶을 살던 그녀는 필연적인 죽음 앞에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선택하면 좋을지 몰라 갈팡질팡한다.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선택이 결국 타인의 죽음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명백한 사실에 불안해한다. 수십 만 명의 죽음 위에 세워진 오펜하이머의 명성과 영예 그리고 삶의 의미는 위태롭고 불안하다. 그는 한 방향으로 흐르는 유한한 삶의 시간선 위에서 자신의 선택을 결코 뒤집을 수 없다. 


실존주의는 인간의 삶의 의미를 '죽음에 대한 인식', '선택의 자유' 그리고 '책임'으로 설명한다. 인간은 자신이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고, 바비처럼 모든 것이 되어볼 시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며, 그로 인해 모든 것들 중 몇 가지를 선택하게 된다. 무엇을 선택할지는 개인의 자유다. 그리고 그 선택으로 인한 결과는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선택의 자유에 따르는 결과의 책임은 무겁다. 그래서 어떤 이는 아예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기도 한다. 자신이 원하는 적절한 때와 기회가 언젠가 자기 앞에 저절로 와줄 것이라는 기대에 젖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다. 때로는 타인이 대신 선택해 준 삶의 경로를 그대로 따라가는 사람도 있다. 영화 <바비>에서 켄이 지배하게 된 바비랜드에서 결국 자포자기한 바비는 그냥 가만히 앉아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로 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창조주격인 마텔(MATTEL)이 이 모든 상황을 알아서 잘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한다. 그러나 마텔은 바비에게서 선택의 자유를 박탈하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고, 이미 실존적 문제에 눈을 뜨게 된 바비는 필사적으로 그곳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자기 삶의 의미는 자신이 선택해야만 비로소 발생한다는 사실을 바비가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바비> & <오펜하이머> 영상/포토.


오펜하이머는 과거에 자신이 했던 선택과 반대되는 선택을 취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재건하고자 했다. 그렇게라도 과거의 선택에 책임을 지려고 했던 것 같다. 앞으로의 삶이 다소 피곤해지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심지어 바비는 죽음이 있는 삶을 선택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기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삶'을 새롭게 선택한다. 바비랜드의 바비들은 모두 바비라는 이름을 공유하지만 어쨌든 각각 다른 바비들이고, 마고 로비의 바비는 전형적인 바비의 삶을 사는 바비일 뿐 전형적인 바비에서는 벗어나지 못한다. 대통령 바비는 바비이지만 그녀는 마고 로비의 바비가 아니다. 공사장 인부 바비는 바비이지만 그녀가 마고 로비의 바비는 아니다. 그녀는 완벽한 곳에서 완벽한 일상이 반복되는 전형적인 바비의 삶을 더는 살지 않기로 선택했다. 그렇게 전형성에서 벗어난 마고 로비의 바비는 선택을 통해 삶의 의미를 직접 빚어내는 인간의 세계로 기꺼운 마음으로 진입한다. 그리고 켄은 '바비가 바라봐줄 때야 비로소 켄이 되는 켄'에서 벗어난다. 남성으로 존재하는 켄, 여성으로 존재하는 바비에서부터 출발한 영화 <바비>는 결국엔 모든 프레임들을 다 벗어던지고 실존적 고민을 이어가는 한 인간으로서의 켄과 바비로 이야기를 귀결하며 마무리된다.


2023년의 바비와 1930년대의 오펜하이머는 오늘날 극장에서 만나 함께 길을 걷는다. 아인슈타인과 괴델이 함께 걸었던 것처럼. 서로 다른 영역에서 거대한 상징성을 지닌 두 인물. 바비와 오펜하이머. 완벽하게 달라 보이는 두 영화가 바벤하이머(Barbenheimer)로 묘하게 융합된 모습이 왠지 의미심장하다.


hiphopstep. 



바비 (Barbie)

감독: 그레타 거윅 (Greta Gerwig)

2023년 개봉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바비> 영상/포토.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14335


오펜하이머 (Oppenheimer)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Christopher Nolan)

2023년 개봉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오펜하이머> 영상/포토.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58260#


매거진의 이전글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현실'을 보셨습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