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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힙합스텝 Sep 17. 2023

악몽에서 깨려면 먼저 잠이 들어야 한다

배우: 드림 메이커로서의 그 숙명에 대하여 

잠 (Sleep)

감독: 유재선

2023년 개봉


커버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잠>.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59622


영화 <잠>을 리뷰한 글입니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잠>.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59622

악몽에서 깨려면 먼저 잠이 들어야 한다. 꿈의 시작은 잠이다. 수면에 진입해야만 꿈도 꿀 수 있다. 잠이 들지 않으면 깨어날 꿈도 없고, 벗어날 악몽도 없다. 다만 눈꺼풀을 짓누르는 무거운 피로만이 남을 뿐이다. 수면 장애를 겪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새벽이 다 지나고 동이 트는 데도 잠을 이루지 못할 때. 그런 피로의 굴레가 며칠씩 반복될 때. 악몽을 꿔도 좋고, 가위가 눌려도 좋으니 제발 잠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하게 빌게 된다. 영화 <잠>은 표면적으로는 잠이 들면서 생기는 일련의 기묘한 사건들을 다루는 듯 하지만, 사실은 잠이 들지 못할 때 생기는 극단적인 상황을 공포의 장르로 풀어낸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영화 <잠>의 미스터리는 '수면'이 아닌 '수면 박탈'에 기인한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잠>.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59622

영화 <잠>에서 가장 흥미로운 설정은 배우 이선균이 연기한 현수의 직업이다. 현수의 직업은 다름 아닌 배우다. 그러니까 이선균은 이 영화에서 배우로서 배우를 연기한 셈이다. 배우라는 직업의 특성은 '잠이 드는 것'과 유사한 점이 많다. 배우는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자신이 연기할 인물의 행동과 감정에 진입한다. 배우는 정의로운 경찰도 되었다가, 잔혹한 살인마도 되었다가, 지나가는 행인도 되었다가, 때로는 외계인이 되기도 한다. 배우는 읽고, 연습하고, 경험하고, 체득하고, 표현하는 과정을 거치며 작품마다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관객 앞에 나타난다. 마치 우리가 잠이 들어 꿈을 꿀 때처럼. 꿈속에서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다. 배우는 연기라는 행위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자아를 입기도 하고, 자기 내면 깊은 곳의 무의식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들춰본다. 연극 무대와 촬영 현장은 마치 스르르 잠이 든 것처럼 배역에 스며든 배우의 머릿속의 꿈과 악몽이 펼쳐지는 곳이다. 배우는 드림 메이커다. 관객인 우리는 '무언가가 몸 안에 들어온' 배우의 말과 몸짓을 느끼며 환상과 비애 그리고 향수에 젖게 된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잠>.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59622

그렇다면 배우는 연기를 통해 자유로워지는 존재인가? 아니면 맡은 배역의 틀에 자신을 가둘 수밖에 없는 속박되는 존재인가? 영화 <잠>에서 현수는 렘수면 행동장애라는 진단을 받고 전에 없던 여러 규칙에 생활을 맞추게 된다. 몸을 마구 긁을 수 없도록 손에 주방 장갑을 끼는 것부터 시작해서 아파트 아래로 투신하지 않게끔 창문에는 쇠창살도 단다. 술도 마음대로 마실 수 없다. 나중에는 가족과 접촉하는 것조차 어려워진다. 현수는 말 그대로 구속된다. 자신과 타인을 잠결에 헤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질 때까지 현수는 엄격한 규칙에 구속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 "누가 들어왔어."라는 의미심장한 대사와 함께 직업 배우인 현수의 살벌한 연기가 시작된다. 부부가 사는 다정한 보금자리는 순식간에 미스터리 공포 장르를 뒤집어쓴 무대로 전환된다. 현수는 자신에게 주어진 렘수면 행동장애라는 배역에 맞게 연기하고, 그에 뒤따른 치료의 규칙도 매우 엄격하다. 


끊임없이 자신의 몸과 정신에 무언가를 깃들여야 하는 '배우'라는 직업. 배우는 모든 것이 되어볼 수 있는 자유를 누린다기보다, 어쩌면 매 순간 역할과 배역의 틀 안에 자신을 가둘 수밖에 없는 기묘한 운명을 타고난 것일지도 모른다. 관객에게 꿈과 환상을 선사하는 드림 메이커로서의 숙명이다. 현수는 배우로서,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가족에게도 어떠한 '드림'을 선사해야만 한다. 아내 수진을 연기한 정유미는 현수가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고 믿는다. 부부 둘이 함께라면 어떤 역경이든 해낼 수 있다고. 남편은 남편으로서, 아내는 아내로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맡은 바 '역할'을 충실히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잠>.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59622

잠이 들면서 시작된 이 기묘한 이야기는 잠이 박탈되면서 극단으로 치닫는다. 현수의 수면과 수진의 수면 박탈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무대와 관객 사이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된다. 제1 장, 제2 장, 제3 장. 마치 연극의 단락처럼 나뉘어 전개되는 영화 <잠>은 극 중 배우인 현수가 연기하는 하나의 장편극처럼 보인다. 이선균이 연기하는 현수가 연기하는 '그 무엇'. 매번 그 무엇인가에 빙의하며 살아가야 하는 배우들은 때로는 악몽을 꿀 때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신념과 반대되는 역할을 맡게 되었을 때.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는 연기를 해야 할 때. 혹은 극 중에서 자신이 처참하게 죽어야 할 때. 그럴 때마다 악몽 같은 감정의 소용돌이와 불안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악몽에서 깨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먼저 잠이 들어야 한다. 영화 <잠>은 배우라는 직업이 겪는 환상적인 꿈과 악몽, 드림 메이커로서의 숙명을 그리고 있다.


hiphopst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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