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 앤더슨 넷플릭스 단편 영화 4부작
넷플릭스 <웨스 앤더슨 단편 4부작>
감독: 웨스 앤더슨 (Wes Anderson)
2023년 공개
커버 이미지 출처: Netflix Tudum. https://www.netflix.com/tudum/articles/wes-anderson-shorts-cast
넷플릭스에 공개된 <웨스 앤더슨 단편 4부작> 중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에 대한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머지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는 전혀 없습니다.
수능이라는 종착역을 향해 달리는 대한민국의 학생들은 공교육의 장에서 예술 감상의 유희를 경험하지 못한다. <보기>가 주어지고 그 <보기>의 양식에 맞추어 끼워 맞추는 식으로 작품을 읽어내는 훈련을 받을 뿐이다. 물론 예술의 감상에는 어떠한 프레임이나 도구가 필요하다. 물리학자는 물리학의 이론으로, 심리학자는 심리학의 개념으로 작품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예술의 감상과 작품의 해석은 감상자의 몫이다. 감상을 위한 프레임과 도구도 감상자가 직접 찾고 개발해야 한다. 수능의 지문처럼 <보기>와 오지선다가 일상에서는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수능 국어 영역의 관점에서 본 웨스 앤더스의 작품은 당혹스럽기만 하다. 감독이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는 리뷰가 왕왕 달린다.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예술을 감상함에 있어 무언가를 '이해'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물론 중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역사적인 사건을 다룬 전기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볼 때는 그것이 어떤 경위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는지, 실존했던 인물의 배경이 어떠했는지 미리 알고 보면 더 풍부한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품을 감상할 때마다 매번 주제 의식이나 창작자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들면 무척 괴로워진다. tvN <알쓸신잡>에서 김영하 작가가 말했듯 창작자는 어떤 주제나 의도를 작품에 꼭꼭 숨겨두고 감상자로 하여금 그것을 보물찾기 하듯 찾으라 요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작품을 분석하고, 이해하고, 감상하고, 그것으로부터 어떤 감정이 촉발되고, 경외를 느끼는 것은 감상자인 자신의 몫이다. 여러분의 몫이다. 그러나 수능 국어에서는 <보기>와 오지선다가 그것을 대신해준다. <보기>에서 '일제강점기'를 논하면, 작품의 주제는 '독립운동'과 연결된다. <보기>에서 '민주주의'를 언급하면, 작가의 의도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연결된다. <보기>를 보고, 오지선다를 읽고, 그중 틀리거나 맞는 것을 하나 골라내는 작업에는 작품에 대한 감상이 몽땅 결여되어 있다. 정답 찾기 반복 훈련을 거듭한 학생의 대다수는 작품을 스스로 감상해 내는 힘을 잃는다. 심지어 책이나 영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내는 인내심이나 몰입하는 능력마저도 잃어버린다. 누가 대신 읽어주기를 바라고, 누가 대신 요약해 주기를 바란다. 작품이 조금이라도 모호하거나 관념적이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작품을 폄하하거나, 감상 자체를 포기해 버린다.
넷플릭스에서 최근 공개된 웨스 앤더슨의 단편 4부작 중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는 말 그대로 기상천외한 동화를 그대로 스크린에 담아냈다. 한 남자가 눈을 감고도 앞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우연히 연마하게 되어 거대한 부자가 된다는 동화 이야기. 그의 작품이 늘 그래왔듯 이번에도 역시 조화롭고, 아름답다. 역시 그가 만든 세계는 참 아름답구나! 나의 감상은 이것이 전부다. 예술 작품에 매료되고, 그것을 보며 아름다움을 느끼고,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일렁이는 감정을 느끼는 것.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찾아 골라내기보다는, 내가 작품으로부터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표현할 수 있는 것. 이번 웨스 앤더슨의 단편 4부작은 우리가 수능 국어 교육으로부터 함양하지 못했던 예술 감상에 대한 좋은 기회의 장이 될 것이 분명하다.
hiphopste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