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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힙합스텝 Nov 24. 2023

블립: 마블이 꼭 다뤘어야 했던 것

더 마블스 (The Marvels)

감독: 니아 다코스타 (Nia DaCosta)

2023년 개봉


커버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더 마블스>.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44068


영화 <더 마블스>와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포함하여
마블 세계관 전반의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더 마블스>.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44068

소중한 사람과 사별할 때 충분한 애도 기간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상대를 떠나보내는 과정의 그 전후로 말이다. 상실의 고통은 일상에서 장기간 지속되고 심하면 우울 장애로 발전하기도 한다. 이별 전에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이유다. 평소 전하지 못했던 마음을 표현한다거나, 마지막 말을 남긴다거나, 비밀을 털어놓음으로써 이별 뒤에 찾아올 슬픔과 회한의 충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 


<더 마블스>의 모니카 램보는 타노스의 핑거 스냅으로 가루가 되어 몇 년간 사라졌다가 헐크의 블립으로 5년 만에 현실로 복귀한 인물 중 하나다. 그녀가 사라진 곳은 암에 걸린 엄마를 간호하던 병실이었는데 5년 뒤 복귀하였을 때 이미 엄마는 돌아가신 뒤였다. 그러니까 모니카는 엄마와의 이별에 있어 충분한 애도의 기간을 갖지 못한 것이다.


인피니티 사가가 끝난 후로 마블이 내놓고 있는 대부분의 작품들이 혹평을 받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여러 가지 견해들이 오가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아쉬운 점은 핑거스냅으로 생긴 공백의 시간과 블립으로 인한 대규모 혼란을 섬세하게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한 채 순식간에 엄마를 잃어야 했던 모니카 램보의 심리 묘사는 너무도 가볍게만 느껴진다. 상상력을 한번 발휘해 보자. 눈 깜짝할 새도 없이 내 소중한 사람이 세상을 떠난다면? 떠나기 전 사랑하고 고마운 마음을 충분히 다 전하지 못한다면? 미치지 않고 버틸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93252

사실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지점을 우리는 이미 한번 겪은 적이 있다. 인피니티 워에서 핑거스냅으로 가족을 잃은 호크아이가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별안간 로닌이 되어 나타난 것. 가족을 잃고 좌절과 우울에 빠졌을 것이라고 관객이 충분히 예상할 수는 있지만, 호크아이가 그 사이에 로닌이 된 과정과 서사가 궁금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엔드게임 이후 마블은 핑거스냅 이후로 발생한 서사의 공백을 메우는 작업을 착실히 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앤트맨의 캐시 랭은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에서 갑자기 천재 과학 소녀가 되어 나타났다. 그녀가 과학 천재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성장 과정을 충분히 설명해주지 않고 관객을 설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특히 히어로의 세대교체라는 중요한 과업을 제대로 달성하기 위해서 마블은 새 캐릭터의 서사를 성의 있게 빌드업했어야 했다. 마블 프랜차이즈가 지금처럼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앤드게임까지 10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해 서사와 캐릭터를 공들여 만들어왔기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앤트맨>.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73022

핑거스냅과 블립은 전 우주적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이를 이야기로 개발하지 않는 것은 대단한 손실이다. '당신이 없는 동안 이 아이가 이만큼 성장했습니다!'하고 보여주는 것은 핑거스냅과 블립의 영향을 짧은 순간 관객에게 충격적으로 전달하는 데에 효과가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그간의 공백을 모두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호크아이는 어쩌다가 로닌이 되었을까? 캐시 랭은 아빠가 사라진 사이에 무슨 일을 겪었을까? 캐시는 선천적인 천재였을까, 교육을 통해 후천적으로 과학에 대한 재능을 일깨웠을까? 티찰라가 사라진 후 와칸다는 어떻게 되었을까? 티찰라가 없는 틈을 타 비브라늄을 노리고 와칸다를 공격한 세력은 따로 없었을까? 개발할 수 있는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디즈니 플러스의 <로키>처럼. 


마블 팬들은 엔드게임으로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을 동시에 잃었다. 상실 경험을 한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상실 경험에는 충분한 애도 기간이 필요하다. 마블이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이 쌓은 그동안의 유산을 물려받아 그대로 이어나갈 계획이었다면 관객들에게 충분히 애도할 시간을 줬어야 했다. 인피니티 스톤을 원래의 시간선에 되돌려 놓으러 떠난 캡틴 아메리카가 자신이 살아보지 못한 인생을 모두 살아 할아버지가 되어 돌아왔다면 그 수십 년의 세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여주는 소소한 시리즈를 만들었어도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단 몇 부작이었어도 말이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더 마블스>.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44068

영화 <더 마블스>의 흥행 참패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각자의 서사를 제대로 쌓아 올리지 않은 채 허술하게 세 캐릭터를 엮어버렸기 때문이다. 모니카 램보는 시리즈 <완다>에서, 카말라 칸은 시리즈 <미즈 마블>에서 영화로 옮겨 온 캐릭터다. 마블은 영화관의 관객들이 모두 디즈니 플러스를 구독해 줄 것이라 생각한 것일까? 마블의 운영 방식과 관객을 대하는 태도가 다소 오만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더 마블스>를 통해 할리우드 영화에 첫 진출한 배우 박서준의 모습이 물론 반가웠지만, 얀 왕자 캐릭터에 꼭 박서준이나 다른 한국인 배우가 캐스팅 됐어야 하는지도 의아하다.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배우 수현이 한국계 배우로는 처음으로 마블 영화에 등장하여 모두를 설레게 했지만, 그때와 지금의 마블의 위상이 달라졌을뿐더러 할리우드를 대하는 한국 관객들의 눈높이도 크게 달라졌다. 할리우드 영화에 한국인 배우가 나오거나, 한국 노래가 삽입된다고 해서 신기해하며 손뼉 칠 시기는 이미 지났다. 


이번 <더 마블스>의 쿠키 영상에서 마블은 또 한 번의 세계관의 확장을 암시했다. 우려스럽다. 지금은 가지치기를 하고 내실을 다질 때지 세계관을 확장할 때가 아니다. 안타깝지만 버릴 캐릭터는 확실히 버리고, 보완할 캐릭터는 제대로 보완해서 서사의 공백을 차곡차곡 메우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때 핑거스냅과 블립 사이의 5년간의 공백으로부터 파생될 수 있는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지금 마블 영화로부터 관객들이 느끼는 의아함과 의구심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한다. 


hiphopst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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