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톨아람 Aug 24. 2022

슈비루바

- 새 학기 첫 시간

  새 학기 아이들과 꼭 해보고 싶었던 활동이 있었다. 안희연 시인의 산문집 <단어의 집>에서 읽은 세 가지 감정의 흐름을 적어보는 일. 대학생들이 쓰는 어는점, 녹는점, 끓는점과 중학생들이 쓰는 이야기는 어떻게 비슷하고 어떻게 다를까? 처음 만나는 아이들이 들려줄 이야기가 궁금했다.



  활동지는 간단히 구성했다. 남이 지어주는 이름이 아닌, 내가 나에게 선물하는 나만의 별칭을 지어보기, 그리고 나의 어는점, 녹는점, 끓는점 소개하기. 아이들은 이름 짓기가 정말 어렵다며 한참 고민했고, 서로 지어주기도 했으며, 어떤 아이는 신나게 곧바로 이름과 의미를 적어내려가기도 했다. 한참 고심하면서 감정을 돌아보고 자기 이야기를 썼다. 다양한 감정의 흐름이 교실 안에 넘실댔다.


  첫 시간, 명랑한 소녀들의 모습 곁에는 발표를 어려워하고 자기 순서가 오는 걸 걱정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래도 못다 들은 이야기들을 모두 아이들 목소리로 직접 함께 듣고 싶었다. 자기 자리에서, 앉아서 해도 충분하다고, 목소리만 들리면 된다고 이야기했다. 발표를 시작하고, 세 명까지 이어지고 나자 아이들이 자연스레 몸을 기울여가며 친구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막상 들어보니까 재밌고 친구들 이야기가 궁금해요.”


  밝고 당찬 목소리,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 한껏 용기 낸 목소리, 더 숨죽이고 귀 기울이게 하는 목소리… 그 안에 공감되는 감정들과 생각지못한 속마음들이 담겨 있었다. 아이들은 친구의 마음이 녹는 순간을 들으며 두손을 마스크 앞쪽에 살며시 모으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토끼 같은 표정을 짓기도 했다.


  남학생들만 모인 교실은 또 분위기가 달랐다. 한 반은 눈부시게 쨍한 색감이라면 한 반은 차분하게 낮은 톤이라 해야 할까? 아이들은 발표도 전투적으로(?) 했는데 “제가 먼저 발표하면 다음 사람을 지목할 권한을 주시나요?” 라기에 그것도 재밌겠다고 했더니 신나서 발표하고 한 명씩 총알을 쏘아가며(?) 서로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떤 친구는 세 가지 이야기를 게임 참여 과정을 통해 생활밀착형 스토리로 들려주기도 했다. 승급 실패할 때 얼어붙고, 승급 성공할 때 노력을 통해 성장했다는 생각에 녹아내리고, 노력하는데 팀이 못 해낼 때 끓어오른다는 솔직한 감정의 흐름.



  엄마가 웃긴 장난을 할 때 웃기진 않지만 뭔가 웃어줘야 할 것 같아서 얼어붙는다는 남학생, 엄마가 성까지 같이 부를 때 99.9% 혼나기 때문에 얼어붙는다는 남학생의 진지한 말은 왜 이리 사랑스러운지. 발표할 때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면 얼어붙는다는 여학생의 말에, 바라보던 얼굴을 다른 방향으로 살포시 돌리던 다른 아이들의 귀여운 배려는 어쩌면 이렇게 다정한지. 아이는 얼어붙었다는데 나는 그만 녹아내리고 마는 것이었다.

이 활동은 선생님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의 산문집을 보고 만든 것이라며, 가져간 책을 보여주었다. 예쁜 서명에 “녹아요”라고 적힌 문장을 읽어주니 상큼한 목소리로 “와, 선생님 성덕이시네요!”하며 웃는다. “그거 없어지면 어떡해요? 제가 가져갈 수도 있는데!” 책도둑 예고장을 날리는 친구도 있었다. 아무래도 시인님의 활동이 아이의 마음을 훔친 것 같다. 도둑은 네가 아니라 시인님인지도 몰라.


  주말에 아이들이 쓴 글을 받아왔다. 한 장 한 장 넘기며 다시 한번 아이들의 마음을 읽는다. 화가 날 때 끓어오르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기뻐서 끓어오르거나 열정이 피어올라서 끓어오르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리고 많은 아이들이 차별이나 배제, 불합리에 대해 끓어오른다고 쓴 것도 마음에 깊이 남는다. 여러 친구들이 귀여운 것, 잘생긴 사람(!)을 볼 때 녹아내린다고 했는데, 친구가 힘들어하거나 위로해줄 때 그 감정의 고통을 잘 알기 때문에 내 마음이 함께 아파져서 함께 녹아내린다고 하는 남학생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감히 가늠해보기는 어렵지만 천천히, 찬찬히 조심스레 다가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어는 것은 왜 얼어 ‘붙고’

  끓는 것은 왜 끓어 ‘오르고’

  녹는 것은 왜 녹아 ‘내리는’ 것일까.


  목소리의 다양함만큼이나 다채로운 글씨들을 한 줄 한 줄 눈여겨 읽는다. 단어 하나하나가 한 자리에 꽁 뭉쳐지다가 보글보글 오르다가 부드럽게 번지듯 내려오면서 우리는 또 한번 새로운 페이지를 연다. 어떤 수업을 해야 할까, 우리의 1년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면 좋을까 물음표를 그리며 이제 답글을 써야지!


(2022.03.05.)


작가의 이전글 단 한 권도 읽지 않은 채 1년을 보냈다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