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라를 오로라라 부르지 못한 이야기
2025년 9월 30일 화요일
토론토는 여전히 여름날씨에 가까웠다. 토론토 아일랜드 공항은 처음이기도 하고, 다운타운이라 차가 막힐까 봐 세 시간이나 일찍 집을 나섰다. 출근 시간이 아니라 별 탈 없이 공항에 도착했다.
토론토 아일랜드 공항은 작고 예뻤다. 걱정했던 페리도 안내판이 잘 되어 있어서 무리 없이 탈 수 있었다. 체감상 페리는 1분도 안되어서 공항으로 나를 데려다주었다. 날이 좋으니 모든 게 아름다워 보이면서 여행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여행 전에 내게 수없이 물었던 “이게 맞나?”라는 질문에 답을 공항 검색대를 통과 후 비로소 얻을 수 있었다.
“그래, 이게 맞지!”
여행의 설렘 때문인지 배는 별로 고프지 않았지만, 혹시 몰라 커피랑 머핀을 하나 시켰다. 머핀을 좋아해서 시킨 건 아니고 가장 탈이 덜 날 것 같은 메뉴였다. 공항엔 도서관처럼 개인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운 좋게 한자리 차지하고 이제야 퀘벡에서 하고 싶은 것들을 노트에 적기 시작했다.
- 자전거 타기
- 레비스 페리에서 올드퀘벡 야경 보기
- 돗자리 깔고 누워있기
- 자유 러닝 후 커피 한잔 하기
- 노을 보기
- 10K 레이스 건강하게 완주한 후, 엄청 맛있는 저녁 먹기
(지금 보니 자전거 타기 빼고 다 했다)
에어비앤비에 도착해서 물과 바나나를 사겠다는 다짐도 노트에 적었다.
화장실병 때문에 항상 복도 자리에 앉는데 옆자리가 공석이었다. 신나서 옆자리인 창가석에 앉아서 이륙하는 모습을 보았다. 다운타운에 있는 공항이라 비행기가 이륙하자 CN타워와 함께 토론토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통유리로 된 높은 빌딩들은 빛을 반사하며 “이게 도시다”라고 뽐내는 것 같았다. 하늘에서 본 토론토 시내는 너무 아름다웠지만, 한편으론 조금 미운 마음이 들어 괜히 멜랑꼴리 해졌다. 그동안 그냥 토론토를 안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애증이었나 보다.
비행기에서 브런치에 연재할 글을 쓰다 보니 어느새 퀘벡 하늘 위였다. 어떻게 알았냐고?
단풍 반, 밭 반 보고 알았다.
Lyft(우버 같은 탑승 앱 서비스)를 타고 공항에서 숙소로 이동했다. 운전자는 아프리카에서 이민 온 30대 초반 청년이었다. 그는 내게 왜 혼자 왔는지, 결혼 생각은 있는지, 친구는 필요 없는지 등등 계속 물었다. 나중엔 자기 연락처를 줄 테니 라이드가 필요하면 언제든 이야기하라며 번호를 줬다.
중간에 뭔가 잘못된 걸 감지하고 내일이면 친구가 오는 척 연기를 했다. 혹시나 내가 어디에 묵는지 알아챌까 건물을 돌아서 가는 척하고 다시 숙소 문 앞으로 돌아왔다. 아직 차가 있었다. 혹시라도 내가 겁먹은 걸 들킬까 무서워서 얼른 숙소로 들어와 얼른 문을 잠갔다. 서두른 나머지 손가락이 문에 끼어 살갗이 찢어졌다. 피가 나고 쓰라렸다. 호텔을 잡을 걸 그랬나 생각이 들었다. 저 커다란 짐에 밴드는 안 가져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오후 5시, 짐 정리를 하고 나갈까 하다가 배가 고프기도 해서 친구가 추천해 준 푸틴집으로 향했다. 푸틴집은 숙소와 올드퀘벡 사이에 있는 Saint-Jean-Baptiste (생장밥티스트) 지역이었다. 내가 묵는 숙소가 있는 Saint-Roch (생록)는 더 로컬 동네에 가깝고, Saint-Jean-Baptiste (생장밥티스트) 올드퀘벡이랑 가까워 현지인과 관광객이 섞인 번화가다.
반팔을 입고 왔는데, 퀘벡은 이미 추워서 입은 옷 위에 코듀로이 셔츠와 코트를 입었다. 그날의 철없는 나는 이 정도면 거뜬할 줄 알았다.
식당까진 1.4km였다. 그래 뭐 이 정도면! 하고 시간을 보니 22분이 걸린다고 되어있었다.
달리기를 시작하고 생긴 최고의 단점은 1km 정도가 우습게 보인다는 것이다.
뛰어갈 것도 아니면서…
심지어 숙소에서 올드퀘벡으로 가는 길은 극한의 오르막이었다.
예상 못한 변수다.
여길 매일 다녀야 한다니.
코트를 입고 오르막길을 오르는데도 불구하고 추웠다. 내가 가져온 짐에서 가장 두꺼운 옷이었는데…
그렇게 뭔가 잘못되었음을 감지했지만, 애써 외면하며 자신과의 싸움을 계속했다.
그 시각, 노을이 지면서 내가 가는 모든 길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그래, 이 정도 예쁜 길이라면 2주 정도는 매일 다닐 수 있지”
라고 마음을 다잡으며 푸틴집에 도착했다.
클래식 푸틴을 기다리며 노트에 오늘 일을 기록했다. 보조배터리가 없어서 핸드폰 배터리를 최대한 아껴야 했다.
2016년도 겨울에 왔을 땐, 드라마 도깨비 방영 전이라 도깨비언덕의 존재를 몰랐다. 최근 다시 정주행 하면서 꼭 가보고 싶었다. 오늘은 그럼 도깨비 언덕 야경만 보고 와야지 생각하고 밥을 다 먹고 이동을 했다.
"언덕이니까 잔디가 있을 거고, 높겠지?"
대충 구글맵에서 보이는 도깨비호텔 건너편 높은 전망대를 찍고 걸음을 옮겼다.
가는 길은 깜깜했고 불도 거의 없었다. 그렇게 또 극한의 오르막을 15분 정도 걸어 구글맵에 찍은 목적지에 다다랐다.
“아… 이게 아닌데..”
내가 찍은 곳은 아브라함 공원에 있는 세인트로렌스 강 멋진 경치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였다. 어째 아까 한국인 여행객들이 다른 길로 가더라.
이 추위에 이렇게 힘들게 왔는데.. 그냥 집에 돌아갈 순 없었다. 네이버 블로그를 통해 주소를 찾아서 다시 구글맵에 찍었다. 힘들게 올라온 길을 다시 내려간 후, 도깨비 언덕을 또 올라야 했다.
아마 이 날 이렇게 오르막을 많이 걸어서 몸이 계속 따듯해 감기에 안 걸린 듯하다.
오후 8시쯤 드디어 도깨비 언덕에 도착했다. 8시면 해가 지고 추워서 그런지 주변에 한 커플만 벤치에 앉아 있었다. 언덕 제일 위에서 김신이 바라봤던 그 뷰를 핸드폰 카메라에 담았다.
고생해서 오기도 했고, 오랜만에 코트도 입은 김에 내 사진도 하나 남길 생각이었다. 가져온 삼각대를 꺼냈다.
하… 삼발이가 안 펴진다.
온 힘을 다해 몇 번이고 시도를 했다. 역시 안된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중년의 커플이 있었다. 아무래도 남자분이 힘이 더 세니까 도움을 요청했다. 열심히 도와주셨지만 삼발이는 펴질 생각조차 안 했다. 그러다 손을 다치실 거 같아서 괜찮다고 고장 난 건가 보다고 하며 고마운 마음에 사진을 몇 장 먼저 찍어드리겠다고 했다.
결과물들을 보고 본인들이 오늘 하루 종일 찍은 것보다 내가 찍은 게 더 좋다며 작가님이라고 하시면서 행복해하셨다. 나도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 좋아진 기분으로 벤치에 앉아서 삼각대를 고쳤다.
나는 의지의 한국인이니까!
아 어차피 안되는 거 그냥 내리쳐볼까?
어릴 적 컴퓨터가 먹통이 되면 본체를 두들기며 커왔다.
내 삼각대도 맞으니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8시 30분,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고쳐진 삼각대를 세워놓고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하… 아이폰 왜 이렇게 인위적으로 밝게 나오는 거야”
밤하늘이 자꾸 퍼렇게 밝게 나왔다.
밤인데 하늘이 까매야지, 인위적인 색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삼각대라서 포커스나 사진 밝기를 내가 조정할 수도 없었다.
나는 머리를 풀었다 묶었다 모자를 썼다 벗었다.
흰옷을 잘 보이게 열었다 닫았다.
사진 가운데 섰다 왼쪽에 섰다 오른쪽에 섰다.
밤하늘이 너무 인위적으로 나오지 않게 시도를 해보았다.
그렇게 10분을 같은자리에서 여러 장의 사진을 찍다가 포기를 했다.
어차피 15일이나 있는데, 오늘을 교훈 삼아 내일 더 잘 찍어봐야겠다며 일보후퇴.
마지막으로 풍경사진을 한번 더 찍고 8시 50분이 되어서야 도깨비 언덕에서 탈출했다.
9시가 되니 마트들은 이미 문을 많이 닫은 상태였다. 집 바로 뒤에 편의점이 하나 있어서 물을 살 겸 들렀다. 마트 상태도 너무 더럽고, 손님들도 상태가 별로였다. 도망치듯 편의점을 나왔다.
분명 숙소 근처는 퀘벡 시티의 트렌디한 로컬 동네로 카페, 서점, 브루어리, 스트리트 아트가 많고 젊은 분위기라고 했는데… 세상이 내게 몰래카메라를 하는 건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그래도 안전하게 집에 와서 씻고 우버이츠로 월마트에서 40% 할인 쿠폰을 이용해 장을 봤다. 이제 빵만 먹을 거니까 딸기잼, 물은 먹고살아야 하니까 물 두 묶음, 버터, 계란 등등 이 주간 먹고 쓸 것들을 주문했다. 시간이 늦어 배송은 내일 아침 9시 반.
자기 전 누워서 도깨비언덕에서 찍은 사진을 인스타 스토리에 올렸다.
DM이 왔다.
“그거 혹시 오로라야?”
나는 바로 답장을 보냈다.
“하, 아이폰 빛 번짐. 진짜 아이폰 하..”
그렇게 긴 하루를 마감했다.
그리고 그땐 알지 못했다, 이 모든 우연이 나를 어디로 이끌었던 건지.
15일간 퀘벡 일정 중 마지막 3박 4일은 친구부부가 함께했다.
퀘벡 13일 차쯤이었다.
고된 하루를 보내고 숙소에 돌아와 에어드롭으로 사진을 공유했다.
친구가 말했다.
“아 이사진 잘 나왔는데, 아이폰 빛 번짐이 있네”
나는 극도로 공감을 하며, 사탕을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흥분해서 첫날 도깨비 언덕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니까! 비싸게 팔아놓고 빛 번짐 오류는 수정도 안 한다니까?
이것 봐봐, 내 친구가 이거 보고 오로라냐고 묻더라니까?”
친구는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오로라인데?"
"오로라 같은데?"
"오로라 맞는데?"
"오로라잖아?"
검색을 해보니, 그날 오로라가 너무 강해서 저렇게 빛이 많은 밤에도 오로라가 잘 보인 거라고 한다.
얼떨결에 오로라 본 사람
아니, 오로라 밑에 있던 사람이 되었다.
남들 다 봐도 10년간 한 번도 못 본 오로라.
캐나다를 이대로 떠난다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았는데,
이렇게 사진과 함께 내가 오로라 밑에 있던 것이 박제가 되었다.
심지어 저 아름다운 도깨비언덕에서 본 야경과 함께!
사진을 보면 도착하자마자 찍힌 사진에는 오로라가 없다.
길을 잃고,
삼각대를 고치겠다고 끙끙거리고,
다른 분들에게 도움도 요청하고,
사진도 찍어드리고.
이 모든 사소한 것들이
나를 오로라 밑으로 이끌었다.
영영 내가 그곳에 있던 것을 모를 수도 있었는데,
친구와 잡담을 하다가 알게 되었다.
못 보게 될 확률이 많으니까
실망하기 싫어서 입 밖에 내지도 않았던 나의 버킷리스트 하나가
이렇게 얼렁뚱땅 실현되었다.
나의 여행 첫날이 마치 인생에 대한 질문과 답을 준 것 같다.
푸틴 식당 정보(Restaurant Poutineville Vieux Québec)
https://maps.app.goo.gl/eamvWEKaRYBBDfb6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