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 하루 만에 무너진 여행 식단 계획

퀘벡에서 캐나다 첫 미슐랭 식당

by Hiraeth

2025년 10월 1일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지 8시도 안 돼서 눈이 떠졌다. 어제는 준비가 하나도 안 된 여행이라 좀 고생한 것 같아 오늘은 일어나서 할 일을 좀 적어두었다.


우버이츠로 장 본 것 정리

근처 카페에서 식빵 사기(내 도시락, 내 주식!)

9월 가계부 월말 정산

주변 지도 등 근처 알아보기

숙소 사용법 보기

세탁기 작동법 확인


아침 아홉 시 반, 앞으로 내가 마실 물과 계란 등이 도착했다. 물은 박스로 사면 싼데, 나가서 사 마시려면 물 두병에 거의 24개 박스 값이랑 같다.


삼 년 가까이 가계부를 쓰고 매달 정산을 하고 있다. 물론 모든 충동 소비를 막을 순 없지만, 그래도 내 소비습관과 자산을 모으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원래 9월 마지막 날에 썼어야 했는데, 어젠 너무 피곤해서 오늘 아침에 월말정산을 마쳤다.


올드퀘벡까지 충분히 걸어 다닐 수는 있지만, 그렇게 계속 체력을 쓰다간 주말에 있는 퀘벡 마라톤에 지친 상태로 갈 것 같았다. 버스를 타고 다니는 방법을 찾아본 후 5일권을 앱을 통해 구매했다. 꼼꼼하게는 아니지만, 올드퀘벡에 갈 곳들을 구글맵에 표시도 했다. 숙소에 있는 루프탑과 체육관도 한번 가 보았다.


001-루프탑.png 루프탑에서 바라본 퀘벡시티


벌써 정오였다.


서둘러 오늘 할 일 중 가장 중요한, 앞으로의 내 주식과 도시락이 될 빵을 사기 위해 베이커리를 알아보았다. 마트에서 파는 빵은 특유의 냄새가 있어서 도무지 먹을 수가 없다. 운 좋게 숙소 바로 뒤에 평점 4.8점의 베이커리가 있었다. 걸어서 3분도 안 걸리는 거리였기에 대충 지도로 길을 본 후 밖으로 나왔다.


내가 지나야 하는 길은 도로 공사가 한창이었다. 거기서 교통정리를 하던 분이 내가 멀뚱멀뚱 서있으니까 어디로 가냐면서 길을 안내해 주었다.


그는 내게 어디서 왔냐고 질문했다.

나는 한국에서 왔다고 했다.


식빵 포장을 뜯는데 고소한 냄새가 올라왔다. 잼을 바르기 전에 한입 먹어보았다. 겉은 살짝 고소하고 바삭한데 안은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내가 캐나다에서 먹어 본 식빵 중에 정말 제일 맛있었다. 잼을 바르기가 아까워 식빵 세 조각을 그냥 먹었다. 삶아 둔 계란도 두 개 먹고 올드퀘벡을 가기 위해 3시쯤 집을 나섰다.


집 건너편 버스 정류장을 가기 위해서 아까 공사 중인 도로를 또 지나야 했다. 날 도와줬던 분이 내게 어디 가냐 묻더니 안내해 주었다.


그는 또 내게 어디서 왔냐고 질문했다.

나는 처음 대답하는 척 한국에서 왔다고 했다.


그렇게 그는 5일 내내 내게 같은 질문을 했고, 나는 처음처럼 같은 대답을 했다.

그 사람이 아시아인인 나를 구별할 수 없던 건지

아니면 내가 흑인이었던 그를 구별할 수 없어서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린 늘 처음처럼 대화했으니 서로에게 배려심이 깊었다고 생각하기로 한다.


002-공사중.JPG 공사 중이던 길


구글 지도 시간과 달리, 버스가 너무 안 왔다. 걸어서 갔으면 벌써 도착했을 시간이었다. 30분 넘게 버스를 기다리며 더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진행한 나를 탓했다. 날은 너무 좋은데 아까운 시간은 계속 가고 있었다.


드디어 도착한 낯선 언어로 도배된 버스를 타니 새롭기도 하고 여행이 실감이 났다.


003-버스.png 버스정류장, 버스 안


드디어 올드퀘벡 버스 정류장에 내렸다.

감히, 캐나다에서 가장 아름다운 버스 정류장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그림 같은 풍경이 내 앞에 나타났다.


004-버정.JPG 진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찍은 것 맞음


오늘의 목표는 하나였다.

도깨비 언덕에서 돗자리 깔아 두고 노을 지는 것 구경하기.

노을이 지려면 두 시간정도 남아서 슬슬 올드퀘벡을 한 바퀴 돌았다. 해가 지기 전이라 햇살이 강렬해서 그런지 따듯했다. 사진색감도 찍는 것마다 너무 예뻤다.


005-올드퀘벡.png 2025년 10월 1일 오후 4시경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데, 매번 구도가 비슷한 것 같아서 오늘은 이렇게 저렇게 안 찍던 구도로도 찍어보았다. 종종 가족여행을 하는 분들을 보면 사진을 찍어드리기도 했다. 오타니가 쓰레기를 주으며 행운을 모으듯 내게도 사진을 찍어줄 때마다 행운이 모인다고 생각하며 게임처럼 찍어드리니 재미도 있었다.


도깨비 애청자로서 도깨비 호텔 안에 우체통도 찍었다. 내가 찍을 땐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화장실을 다녀오니 아시아 사람들이 줄을 서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다른 손님들도 뭔지 모르면서 덩달아 일단 줄을 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006-호텔다르게찍기.png 내가 찍은 도깨비 호텔과 노부부
007-우체통.jpg 도깨비 우체통


도깨비 언덕엔 많은 사람들이 노을을 기다리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돗자리를 펴고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그 사람들을 구경했다.


어떤 외국 커플은 남자애가 이리 눕고 저리 누워가며 여자친구 사진을 연신 찍어주었다.

어떤 커플은 남자애가 여자 발까지 털어주며 신발을 신겨주었다.

내 바로 옆에 있던 친구로 보이는 한국인 두 명은 사진 때문에 서로 예민해져 있었다.

친구 한 명은 버튼만 누르면 되는데 이걸 못 찍냐며 다른 친구를 나무랐고, 다른 친구는 기가 죽어 보였다.


난 혼자 사진을 찍었다.

다행이다. 싸울 일이 없어서.


008-혼자사진.png 혼자 내 입맛대로 찍은 사진들


서서히 노을이 지면서 다시 추워졌다.


009-노을.JPG 도깨비 언덕에서 바라 본 노을지는 레비스
010-노을2.JPG 지는 해가 도깨비 호텔 한쪽만 뜨겁게 달구고 있다


노을이 지며 호텔에 불이 서서히 들어오는 것까지 보고 가려는 게 목표였다. 문제는 노을이 지고 한참 뒤에야 어둑어둑해진다는 걸 생각 안 하고 온 것이다. 춥지만 버텼다.

그날 쓴 일기를 보니 “해가 더럽게 안 지고 추웠다”라고 적혀있다.


어둑어둑해지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났다. 나도 얼른 짐을 챙겨 그곳을 떠났다.


011-밤.png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찍은 올드퀘벡 모습


5일권을 구매했으니 버스를 타기 위해 아까 내렸던 정류장 건너편으로 향했다. 이번 여행에서 깨달은 것 중 하나는 나는 엄청난 길치다. 조금 헤매다 보니 아까 오기로 한 버스는 이미 떠났고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반대방향인 버스 정류장으로 이미 걸어와서 이제 와서 집에 걸어가려면 한 시간은 가까이 걸어야 했다.


뒷골이 당기고 깊은 빡침이 올라왔다.

우버를 불러야 하나 백만 번 고민을 했다.

하지만 여행 초기부터 그렇게 멍청비용으로 돈을 날리고 싶진 않았다.

그냥 걷기로 했다.


다시 오르막길로 올라갈 힘은 없었다. 대신 버스 노선을 따라 틈틈이 버스 시간을 확인하며 걸었다.

버스를 탈 때도, 길을 찾을 때도, 사진을 찍을 때도 핸드폰이 필요한데

보조 배터리가 없으니 핸드폰을 확인 할 때마다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걷다 보니 정류장이 하나 더 보였다. 전광판 같은 게 있어서 기웃거리니 이어폰을 끼고 버스를 기다리던 남자가 말을 걸었다. 그는 토론토에서 업무 때문에 2주간 퀘벡에 온 거라고 했다. 토론토에서 왔다니 괜히 반가워 수다를 더 떨었다. 본인은 월마트에 가는 버스를 탄다며 나도 월마트에 가고 싶냐고 물었다.


지금까지 헤맨 것도 분한데, 월마트를 왜… 안 간다고 했다.


그렇게 스몰토크를 하다 보니 20분가량 흐르고 버스가 왔다. 구글에 나온 버스 시간은 실제 버스 시간과 많이 다른 걸 알게 되었다.

12시쯤 먹은 빵과 계란이 전부라 배도 고프고 추운데 길도 헤맸더니 조금 서러워졌다.


집 근처 번화가에 도착하니 8시였다. 많은 레스토랑이 이미 문을 닫았거나 만석이었다. 테이블이 비어 있는 식당들은 하나같이 미슐랭 식당임을 나타내는 빨간 마크(미쉐린 가이드 플레이트)가 있었다. 비싸다는 뜻이다.


몇 번 같은 구역을 왔다 갔다 하다가

“아, 모르겠다. 인생 뭐 있어!”

많은 미슐랭 식당 중 Le 101라는 곳으로 들어갔다.


망원동에 101호라는 작은 술집이 있었는데, 안주도 하이볼도 맛있었던 기억이 난다.

퀘벡의 101호도 왠지 느낌이 좋았다.


문을 열자 훈기가 돌았다 직원은 바로 내 코트를 걸어주었다. 운동을 한 후 술을 잘 안 먹는데, 오늘은 진짜 한잔 마셔야 할 것 같아 화이트 와인 한잔을 시켰다. 직원은 가격이 적히지 않은 메뉴판을 들고 와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다행히 코스요리 말고 단품도 시킬 수 있었다. 송아지 스테이크를 시켰다. 단품으로 시켰는데도 피스타치오 같은 게 있는 애피타이저도 나왔다.


여행을 계획하면서 제일 먼저 했던 다짐은 식비를 아끼는 것이었다.

세상 세련된 레스토랑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기다리고 있으니

괜히 스스로에게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애피타이저를 한입 먹는 순간 모든 죄책감이 사라졌다.


뭔가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는 요리였다. 이 식당에서 개발한 음식이라고 한다. 매번 내가 아는 메뉴와 비슷한 맛 조합을 먹던 나에게는 굉장히 신선한 음식이었다. 메인요리에 나온 스테이크의 소스도 재미있는 맛이었다. 송아지 스테이크야 다른 데 를 가도 잘하겠지만, 직접 만든 특제 소스는 내가 어디 가서도 먹어보지 못한 맛이었다. 그러나 뭔가 익숙한 맛도 섞여있었다. 이런 게 맛있는 요리를 찾아가는 재미인가 싶었다.


"이런 요리라면 어차피 온 거 엄청 맛있게 먹어야지!"

한입한입 천천히 정말 맛있게 먹었다.


어차피 쓰는 돈, 코스를 시킬 걸 괜히 아쉬웠다.


012-저녁.png 나의 첫 퀘벡 미슐랭 음식


맛있게 먹고 5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숙소에 도착했다. 엄마에게 오늘 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전화로 이야기를 하며 자연스레 낮에 산 식빵을 먹었다. 배가 덜 부른 건 아닌데, 식빵이 너무 맛있어서 멈출 수가 없었다.


이 식빵은 여행 기간 동안 내가 2킬로를 증량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다.


그리고 이 식빵과 오늘의 저녁은 내 여행 식단 계획을 바꿨다.


토론토는 음식은 비싼데 맛이 별로 없다. 이 가격을 주고 이렇게 먹을 바엔 안 먹고 만다라는 생각이 들어 외식을 잘 안 하게 된다. 하지만, 지금까지 퀘벡에서 먹은 것들은 토론토에 비해 너무 비싸지도 않으면서 다 맛도 있었다.


다른 빵들도, 식당도 궁금해졌다.


이 날 이후로, 나는 결심했다.

하루 한 끼는 제대로 먹자.

맛있는 식당을 찾아가서, 천천히, 정말 맛있게.


자기 전 일기장에 오늘 일을 쭉 써 내려갔다.


마지막 줄엔 이렇게 적혀있다.

“아까운 하루하루가 간다”

그리고 아까운 한 끼 한 끼도 간다.




빵집 Boulangerie Louis Marchand et Compagnie : https://maps.app.goo.gl/AGu6cSKUfPMfsXaT8

미슐랭식당 Le 101 Restaurant: https://maps.app.goo.gl/TWMwXGryyaPGsFaJ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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