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 선행은 돌아오는 거야

따뜻한 친절들이 스며든 하루

by Hiraeth

퀘벡에서 머물기 3일 차


2025년 10월 2일 목요일


요 며칠 평소보다 많은 활동을 한 탓에 피곤이 가시지 않았다. 일부러 알람도 안 맞추고 잤는데 오전 9시쯤 또 눈이 떠졌다. 보통 토론토에선 청소년 때처럼 오후 1시, 2시 가리지 않고 일어나는데…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하루가 길어져 좋다. 침대 누워서 오른쪽 왼쪽 방향을 뒤집어 가며 오늘 뭐 할지 구글 지도를 살폈다.


이번 여행은 블로그나 다른 여행기를 참고하기보단 그냥 구글 지도를 켜고 대충 하나 찍어서 이동하는 식이었다.


즉흥적인 계획들과는 조금 결은 다르지만,

성수기에 백수가 거금 내고 온 여행,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깊숙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 피곤한가 하는 생각을 하며, 오늘은 좀 자중하기로 했다.


주말에 있는 10K 대회를 잘 끝내고 싶었다. 이렇게 뭐 하나 할 게 있으면 온 신경이 그곳으로 향한다. 결국 스트레스가 되고 불안함이 밀려온다. 아직 어떻게 고쳐나가야 할지, 어떻게 달래며 살아가야 할지 좋은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냥 이럴 땐 밀려오는 생각에 두들겨 맞으며 버티고 있다. 오늘은 “이미 퀘벡의 유명한 곳은 다 봤으니 자중하자”라고 생각하며 나를 진정시켰다.


일단 저녁에 먹을 고기를 사기 위해 숙소에서 5분 거리 정육점으로 향했다. 완전 동네 정육점이라 영어를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어찌어찌 바디랭귀지를 섞어가며 프라이팬에 구워 먹을 수 있는 얇은 소고기를 구입했다. 고기를 받고 시즈닝을 고른 후 계산을 해야 하는데 어디서 해야 하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두리번두리번 거리며 최대한 온몸으로 “저는 계산을 하고 싶어요”라는 기운을 뿜어 냈다.


내 바디랭귀지가 통했는지 어떤 아주머니께서 내게 불어로 뭐라 뭐라 하셨다. 못 알아들으니 직접 나를 계산대로 안내해 주며 웃었다. 멋지게 “메르시”하고 싶었지만 쑥스러워서 “땡큐”라고 했다. 진짜 나조차도 이해가 안 가는 부끄러움이다.


오늘은 요 며칠 어두울 때마다 지나다녔던 집 뒤에 Saint-Roch(생록) 지역을 좀 둘러봐야겠다. 그곳에 식당이 많으니 한번 쭉 돌아보고 다음에 몇몇 군데를 갈 생각이었다. 어두울 때 갈 식당을 찾으려면 춥고 이상한 사람들도 가끔 있어서 결국 아무 데나 갈 것 같았다. 고르고 골라서 맛있고 좋은 곳에 가야지! 커피숍도 많으니 들러서 커피도 한잔 하며 쉬엄쉬엄 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잠깐 둘러보러 나갔는데, 또 결국 길어졌다. 집에서 나오니 날이 좋고 단풍이 좋아서 그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파란 하늘과 대비되는 알록달록한 건물들에 정신이 팔려 내가 가려던 지역과 정반대 방향으로 한참을 왔다. 결국 뒤숭숭하게 생긴 공원을 보곤 정신 차리고 원래 가려던 Saint-Roch(생록) 지역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003-가을.png 내가 따라 걷던 단풍길
002-길건물.png 색색의 건물들은 올드퀘벡과는 사뭇 다르다
001-빅토리아파크.JPG 수상해 보이는 공원(뒤숭숭하게 생긴 공원) 간판


낮에 보는 Saint-Roch(생록)은 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밤에는 고요하고 조금 무서웠던 그 거리가, 낮에는 활기와 개성으로 가득했다. 밤엔 문을 닫아 알 수 없던 상점들의 모습을 드디어 마주하게 되었다. 식당과 카페 외에도 다양한 빈티지 숍들이 즐비했다.


오늘 가장 좋았던 곳은 역시 중고서점들이다.

원래 나는 중고 서점을 구경하는 걸 좋아한다.


오늘 내가 본 곳은 두 곳이었다.


첫 번째는 숙소와 좀 가까웠다. 엄청 나이 드신 백발의 주인 할아버지가 책이 여러 권 쌓여있는 책상에서 책을 읽고 계셨다. 책상 위의 주황빛 조명, 그 옆에 오래된 라디오 그리고 할아버지의 빵모자. 고요하면서 아름다워 보였다. 뭔가 내가 그리는 부러운 은퇴자의 삶이었다. 물론, 그분은 지금도 책방에서 일을 하시는 거니까 은퇴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004-성당.png 성당인 줄 알았던 사회복지기관과 첫 번째 중고 서점


두 번째 서점은 Saint-Roch(생록) 거리 끝쪽에 위치해 있다. 아, 내 숙소를 기준으로 멀다는 뜻이다. 첫 번째 서점은 그럼 거리의 시작 쪽. 여하튼 두 번째 중고서점은 책뿐만 아니라 보드게임, 만화책, 포스터, 음악 테이프, CD, 피규어 등등 골동품 가게에 더 가까웠다. 책 사이를 걸으며 구경을 하다 보니 놀이동산에 온 기분이었다. 엄청나게 많은 물품들이 쌓여있었는데, 가까이서 보면 그 어떤 곳보다 정렬이 잘 되어 있었고 깨끗했다.


collage.png 필카로 찍은 서점들 내부
005-책방.png 두 번째 서점 외관과 입구
006-책방2.png 무질서 속 완벽한 정렬


책방을 다니며 느낀 건데, 어릴 적부터 약간 이런 공간에 대한 동경이 있었던 것 같다. 어두운 공간에 따뜻한 조명, 그리고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책들. 좋지 않은 음질로 흘러나오는 오래된 음악들. 그런 아지트 공간이 있었으면 했다. 낯선 곳에서 머무는 것은 오랜 시간 잊고 있던 내 안의 무언가를 발견하게 하기도 한다.


“잠깐만 들어가 볼까?”

하면서 결국 열 군데 넘는 상점을 구경한 것 같다.


잠깐 나올 생각으로 나와서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않았더니 서서히 배가 고파지며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오래 걸어서 그런지 허리도 좀 아파왔다. 해가지니 또다시 갑자기 추워졌다. 그래도 다행히 가까운 곳에 집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5일권이 있으니까! 집으로 가는 1번 버스를 탔다. 버스 안은 엄청 붐비지는 않았지만 적당히 사람이 많았다.


내리기 위해 스탑 버튼을 눌렀는데 버스기사가 정류장에서 앞문만 열고 뒷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미어캣처럼 고개를 빼꼼빼꼼 운전기사 쪽을 바라보았지만, 사람들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아마 그도 나를 못 봤을 것이다. 열어달라고 소리칠 수 있는 성격은 아니라서 그냥 한 정거장 더 가야겠다 하고 포기하려던 참이었다. 동시에 한정거장이 길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이 들었다.


그때 뒷문 뒤에 앉아있던 "골든"을 듣던 학생과 그 옆에 아줌마가 계속 스탑 버튼을 누르며 뒷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기사는 그제야 뒷문을 열어줬다. 나는 연신 “땡큐”라며 인사하고 급히 내렸다.


찬바람이 더 매섭게 불고 있었다. 이 추위에 한 정거장 더 걸었으면 얼어 죽을 뻔했단 생각이 들었다. 날 도와준 그분들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녹초가 되어 집에 도착했다. 버터에 고기를 후다닥 굽고, 컵라면 물을 끓였다. 쌀밥이 너무 먹고 싶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햇반을 가져올걸.


내가 추가 비용을 지불하며 가져온 저 커다란 가방엔 내가 필요한 것들 빼고 다 있었다.


저녁을 든든히 먹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니 노곤노곤해졌다.


낮에 주워온 단풍잎을 일기장에 붙이며 하루를 돌아봤다.

오늘 내게 도움을 주거나 친절했던 사람들이 생각났다.


정육점에서 계산을 도와준 아주머니,

버스에서 시크한 얼굴로 스탑버튼과 문을 연신 두들겨주었던 두 여성분,

그리고 로또 살 때 더 좋은 딜이 있다며 소개해준 점원.


어제 좋은 마음으로 가족 여행객들의 사진을 찍어준 나만의 선행이

오늘 이렇게 날 도와준 건가?


괜히 말도 안 되는 껴맞추기를 하며 여행 3일 차의 밤을 마무리했다.




* 메인 사진은 땅거미질 때 필카로 찍은 생록 거리입니다


정육점 - 그냥 그랬다: https://maps.app.goo.gl/cPV2BNZ7npN67N6x7


첫 번째 서점: https://maps.app.goo.gl/Fson2qMczzR4xAL78


두 번째 서점: https://maps.app.goo.gl/TJbD8reFD8BXud958


매거진의 이전글#03 - 하루 만에 무너진 여행 식단 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