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10K 레이스 도전
작은 도시 퀘벡에 15일이나 머무르기로 했을 때, 마음 한구석에서 불안이 고개를 들었다.
‘돈지랄일까, 시간낭비일까.’
그 마음을 단번에 날려준 건, 10K 마라톤 표를 구한 일이었다.
레이스 참가가 결정된 순간부터 내 모든 걱정이 사라지고, 그저 설렘만 남았다.
이제는 내가 마라톤을 위해 퀘벡에 온 건지,
퀘벡에 온 김에 마라톤을 하는 건지, 주객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동안 10K는 두세 번 무리 없이 뛰어봤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 아닌가?
퀘벡까지 와서 원래 할 수 있었던 10K를 완주 못하면 너무 속상할 것 같았다.
남들에겐 작을 수 있지만 내겐 큰 10K를 잘 완주하기 위해, 퀘벡에 온 첫날부터 조심조심 매일을 보냈다.
벌써 퀘벡에 머문 지 4일째, 10월 3일 금요일.
오늘은 마라톤 엑스포에서 배번호와 티셔츠를 받는 날이었다.
얼른 받고 나올 생각으로 대충 빵과 삶은 계란을 먹고 버스를 탔다. 도착한 퀘벡시티 마라톤 엑스포는 생각보다 규모가 있었다. 배번호를 받은 후 안쪽으로 들어가니, 각종 러닝용품을 세금 없이 팔고 있었다. 백수 주제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것저것 걸쳐보고, 시식 코너의 젤과 간식까지 섭렵하고 나니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참고로, 여긴 쇼핑몰 크기가 아니다. 상점 몇 개가 전부다.)
배번호, 티셔츠, 공짜로 받은 음료수와 간식, 그리고 눈이 뒤집혀 질러버린 러닝 조끼를 가방에 넣고 개미지옥을 간신히 벗어났다.
그리고 집에 가는 버스를 반대로 타서 또 한참을 걸었다. 본의 아니게 쇼핑을 했더니 에너지가 바닥이었다. 집에 오는 길에 가까운 마트에 들러 파스타, 오븐에 구운 닭다리, 샐러드를 샀다. 내일 쓸 건 아니지만 보조 배터리도 하나 샀다. 배가 많이 고팠는지, 많은 양의 저녁을 거의 다 먹었다. (샐러드 빼고 다 먹었다)
평소보다 너무 많이 먹었는지 빵빵해진 배가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일 오전에 화장실을 한 번 시원하게 간 후 뛰면 소원이 없겠다 싶었다.
크게 할 일은 없는데 마음이 계속 분주했다. 뭔가 해야 할 게 하나가 생기면 신경 쓰이고 불편하다. 사람들은 이런 마음을 다들 어떻게 다스리고 지내는걸까?
예쁜 노을이 지는 저녁, 쓰레기 소각장에 쓰레기를 버리러 잠깐 나갔다 왔다.
노을을 보며 내일 하루가 별 탈 없이 편안하게 흐르길 바랬다.
드디어 10월 4일 토요일, 대회 당일.
이상하게 마라톤 대회 전날은 잠들기가 더 쉽지 않다. 고작 5K, 10K도 그런데 하프랑 풀은 꿈도 꾸지 못하겠다. 그래도 퀘벡 마라톤 10K는 11시부터 출발하는 거라 다른 때보다는 수월했다. 아침에 힘겹게 눈을 뜨며 “이걸 괜히 했나” 후회가 밀려왔다. 씻고 옷까지 다 챙겨 입고 나니 화장실 신호가 왔다. 시간도 넉넉했고, 그토록 바라던 신호라서 너무 반가웠다. 덕분에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설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기온으로 날씨가 너무 더웠다. 기온은 20도가 넘었고, 햇살에 얼굴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풀과 하프 마라톤은 일요일인 다음 날 진행되었는데, 날이 너무 더워서 안전상의 이유로 중간에 대회를 중단했다고 한다.
일찍 도착해서 엑스포가 열리는 건물에 앉아 있었다. 마라톤 기념 티셔츠가 너무 이상해서 안 입고 왔는데, 다들 입고 있는 걸 보니 후회가 되었다. 뭔가 소속감이 떨어진달까? 다음부턴 아무리 디자인이 이상해도 꼭 제공하는 티셔츠를 입고 와야겠다.
출발 시간이 다가오고 차례대로 출발을 했다. 나는 한 시간 페이스메이커 뒤에 섰다. 내가 있는 그룹은 출발까지 20분 정도 걸렸다. 다양한 사람이 많고 붐비다 보니 조금 불편했다. 그들이 내게 뭔가 한 건 아니지만, 북적거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침에 화장실을 잘 다녀와서 그런지 생각보다 컨디션이 좋았다. 초반에 힘을 아꼈어야 했는데, 병목 현상이 심해서 피하다 보니 에너지를 많이 썼다. 보통 달리면서 물을 잘 안 마시는데, 더운 날씨 탓에 3km도 안 돼서 목이 마르기 시작했다. 달리면서 계속 급수대만 기다린 것 같다.
저 멀리 땡볕 도로 위를 뛰는 사람들이 보였다. 너무 더워 보였다. 그때 진지하게 그만둬야 하나 생각했다. 코스가 힘들고 이런 것보다는, 너무 덥고 피부가 따가웠다. 그렇게 포기해야 하나 생각이 들 때쯤 터널도 나오고 그늘도 나왔다. 응원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중간중간 밴드들이 공연을 하기도 해서 러닝 하는 길이 다채롭다고 느껴졌다.
그동안 해왔던 걸 믿고 뛰다 보니 2km 팻말이 보였다. 그만큼 남은 줄 알고 좀 속력을 내 열심히 뛰었는데, 그건 2km 어린이 달리기를 위한 안내판이었다. 3km가 남았다. 갑자기 절망감이 들었다.
그렇게 힘을 다 썼더니 9km 지점에서는 너무 힘들어서 걸을까라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그러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아서, 천천히라도 뛰었다. 페이스가 6분 20초대로 떨어졌다. 한 시간 페이스메이커는 아까 내 뒤에 있었는데 보이지 않았다. 그럼 이대로 가면 한 시간 이내에 들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조금 안일한 생각을 하며 뛰었다.
마지막 결승선.
사진이 찍히는 걸 알고 있지만, 너무 힘들어서 포즈고 뭐고 그냥 들어와서 시계를 멈췄다.
결국 사진엔 약속에 늦은 사람처럼 시계를 보는 사진 1, 2, 3만 가득했다.
할머니 봉사자가 시원하게 호스로 물을 뿌려줬다. 조금 살 것 같았다. 결승선에서 사람들을 따라 나오는 길에는 봉사자들이 각종 간식과 메달을 나눠주었다. 대회장 옆 그늘에서 물을 마시며 잠시 앉아 있으니, 다시 기운이 났다. 사진도 찍고 각종 이벤트도 구경하다 보니 한 시간이 또 훌쩍 지났다. 뛸 땐 한 시간이 그렇게 길더니, 이벤트 구경은 왜 이리 시간이 빠른지.
기록은 1시간 13초.
아쉬웠지만, 이 더위에 살아서 완주한 것만으로 감사하기로 하며 대회장을 떠났다.
버스를 또 반대로 타는 바람에 버스만 총 1시간을 기다렸다. 우버를 타고 싶은 유혹이 들었지만, 남는 게 시간인데 사치 같은 선택은 하지 않기로 했다.
대회장을 구경하고, 이동하고, 기다리는 게 체력 소모가 컸다. 씻고 나니 밥을 먹으러 나가기가 너무 귀찮았다. 배달 음식으로 햄버거와 푸틴을 먹으며 <<다 이루어질지>>를 보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토론토에서는 마라톤에 참여하고 난 후, 다시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들었다. 하지만 퀘벡 마라톤은 이벤트도 크고, 잘 준비된 행사여서 기회가 되면 또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력만 된다면 하프도 재미있을 것 같았지만, 불안도가 높은 편이라 안 될 것 같다. 마라톤 전에 너무 스트레스받을 것 같다.
그렇게 드디어,
마라톤에서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내일부턴 몸 사리지 않고 즐기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