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만 가면 만나는 지름신
2025년 10월 6일 월요일, 퀘벡시티 7일 차.
어젠 새벽 5시까지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 어렵게 잠이 들었다. 화장실 때문에 계속 잠에서 깨다가 결국 11시 반쯤 항복하고 눈을 떴다.
식탁을 정리하고 쓰레기를 버린 후 계란을 삶아 먹었다. 주말에 이어 오늘도 한여름처럼 뜨거운 날씨였다. 뭘 할지 딱히 정하진 않았지만, 일단 올드퀘벡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달리는 버스 창가에 앉아 자전거 투어나 렌탈을 알아보고 토론토에서부터 가고 싶었던 러닝용품을 파는 커피숍에 가야겠다고 계획을 세웠다. 올드퀘벡에 다다르자 길이 조금 막히기 시작했다. 혼자 자전거 렌탈을 해서 탈 생각을 하니 조금 겁이 났다. 투어만 알아보기로 계획 변경.
매일 봐도 질리지 않는 올드퀘벡 버스정류장에서 내렸다. 정류장 바로 옆에 있는 자전거 샵에 가서 자전거 투어를 문의했다. 화, 수에는 비 예보가 있어 목요일 투어를 물어봤다. 혼자서는 투어가 진행이 안되니, 수요일에 전화를 주면 목요일에 예약팀이 있는지 알려준다며 명함을 줬다. 혹시 몰라 대여비도 알아보니 전기 자전거의 경우 9시부터 5시 하루권은 90불이나 했다. 섣부르게 결정하고 싶지 않았고, 시간도 많으니 일단 밖으로 나와 러닝용품을 파는 커피숍으로 향했다.
커피숍 내부는 편집샵에 더 가까웠다.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한잔 주문하고 상품들을 구경했다. 유튜브에서만 보던 러닝계의 에르메스 세티스파이부터 토끼로고의 브랜드까지 결코 만만치 않은 가격의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러던 중 내가 전부터 눈여겨보던 norda라는 브랜드의 신발을 보게 되었다.
그때부턴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한번 신어나보자 하고 신었던 001A라는 모델. 마침 점원이 똑같은 신발을 착용하고 있었다. 볼 땐 그냥 그랬는데 막상 신어보니 너무 귀여웠다. norda라는 브랜드는 캐나다 브랜드인데 편하고 수명이 긴 신발로 잘 알려져 있다.
그분이 오셨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내 안의 지름신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 안의 지름신과 사투를 벌이는 사이 몇몇 손님들이 와서 해당 브랜드의 신발이 있다며 서로 극찬을 하기 시작했다. 영어도 못하면서 이런 건 왜 이렇게 귀에 쏙쏙 들어오는지..
“아 모르겠다. 토론토 돌아가서 거지같이 살자”
신발은 자전거 투어에 비해 훨씬 비싼 가격이었지만, 새신과 자전거투어를 바꾸기로 했다. 하루라도 더 신어서 뽕을 빼자는 생각에 바로 새 신을 신고 신었던 신발은 가방에 넣고 나왔다. 바로 앞에 레비스로 가는 페리 선착장이 보였다. 앞에 페리가 대기하고 있길래 홀린 듯이 바로 왕복표를 구매하고 페리에 탔다.
2025년 가을 기준, 저녁 6시 반 전에는 30분 간격으로 운행하고 그 이후엔 1시간 간격이었다.
새 신을 사서 기분도 좋고, 페리도 내가 타자마자 오분도 안되어서 출발을 했다. 뭔가 타이밍이 딱딱 맞는 게 술술 풀리는 기분이었다. 괜히 기분이 좋아 옆에 아줌마에게도 말을 걸었다. 아, 영어를 아예 못하시는 레비스 주민이신가 보다. 결국 서로 하나도 알아듣지 못한 채 미소만 띠다 내렸다.
오후 3시가 좀 넘자 기온은 26도를 육박했다.
막상 내리니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고,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다. 약간 후회가 밀려왔지만 페리에서부터 보였던 빨간 계단을 올라가 봐야겠다 생각했다. 계단 끝엔 집들도 있으니 커피숍 하나는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계단으로 가기 위해 일단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되었다. 신호를 기다리는데 중년부부가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신나게 여행하고 계셨다. 갑자기 존경심이 들면서 힘이 조금 났다.
“그래, 뭐 저 정도 계단이야 금방이지”
날이 덥고 그늘이 없다 보니 달리기를 할 때만큼 땀이 났다. 시원한 아이스아메리카노 한잔을 애타게 갈망했다. 계단 끝에서 나를 기다리는 건 그저 주택가였다. 서둘러 커피숍을 검색하니 10분 거리에 평점 5점의 커피숍이 있었다. 이름과 평점만 보고 구글지도에 목적지로 설정한 후 출발했다. 알록달록한 나무들이 중간중간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퀘벡시티보다 단풍은 훨씬 예뻐서 조금씩 마음이 풀렸다. 커다란 단풍나무들과 호텔이 훤히 보이는 집들을 지나가며, 이곳엔 누가 살까, 집은 얼마일까 궁금해졌다. 그렇게 오르막길을 걷다 보니 드디어 커피숍이 나타났다.
월요일 휴무였다. 하… 구글지도를 보니, 거기에서 휴무라고 적혀있었다. 자책할 힘도 없어서 얼른 제일 가까운 커피숍을 찾았다. 다행히 코너만 돌면 평점 4점이 넘는 커피숍이 하나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커피숍은 내가 생각한 곳이 아니었다. 그냥 건물 옆에 있는 휴게공간 같은 느낌? 그래도 다른 선택지가 없으니 안으로 들어갔다. 대체로 나이 드신 손님이 많았는데, 뭔가.. 잘못되었다 싶었다.
레비스에 온 가장 큰 이유는 “페리에서 바라보는 노을 지는 올드퀘벡”때문이다. 두 시간 남짓은 이곳에서 어쨌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목도 너무 마르고 더웠다. 그리고 화장실도 가야 할 것 같았다. 뭐 아이스아메리카노가 다 똑같지라는 생각으로 하나 주문하고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5달러나 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내가 먹어 본 최악이었다. 뜨거운 커피에 얼음을 두세 개 넣어줬는데, 시원하지조차 않았다. 무엇보다 이걸 다 마시면 탈이 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실내라 덥지는 않았다. 대충 그렇게 땀을 식히면서 근처에 갈만한 곳을 찾아봤다. 10분 남짓한 곳에 Terrasse du Chevalier-de-Lévis라는 공원이 있었다. 전망도 좋아 보이고, 페리 선착장으로 가는 길이기도 했다. 거기서 좀 머무르다가 안되면 그냥 선착장에서 해가 질 때까지 시간을 보내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도착해 보니 간이 화장실도 있고, 더위가 한풀 꺾여 선선한 바람도 불었다. 한국 살 땐 간이 화장실 가느니 참고 만다 주의였는데, 화장실 문제가 생긴 이후론 엉덩이만 가려준다면 눈 딱 감고 사용할 수 있다. 다행히 이곳 간이 화장실은 굉장히 깨끗하고 넓었다. 이 정도면 여기서 노을 지는 걸 보고, 페리를 타고 돌아가도 되겠다 싶을 만큼 전망도 좋았다.
이제 보조배터리도 있겠다 이어폰을 끼고 벤치에 앉아 폴킴의 <찬란한 계절>을 재생했다. 살랑살랑 바람이 코에 닿을 때마다 이제야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유튜브가 이끄는 알고리즘에 따라 두세 곡쯤 들었을까? 자전거를 타고 온 마른 체형의 백인 할아버지가 벤치에 앉아도 되냐고 묻더니 계속 말을 걸기 시작했다. ‘나는 이어폰을 끼고 있어요’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 아이팟을 꼈다 뺏다 하며 대답을 했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질문을 해댔다. 혼자 신나게 내 시간을 즐기고 싶었는데.. 살짝 짜증이 올라왔다. 30분쯤 지났을까? 더 이상 안될 것 같아 화장실 핑계를 대며 좋은 시간 보내라고 말하고 짐을 챙겨 일어났다.
화장실에 다녀오니 그 벤치엔 할머니들이 앉아 있었다. 다행이었다. 할머니들 옆에 앉아 챙겨 온 삼각대를 꺼내 타입랩스를 찍기 시작했다. 10분이면 질 줄 알았던 해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 동안 시시각각 하늘색을 바꾸며 지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음악을 들으며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벤치 근처엔 혼자 온듯한 백인 여자분 한 분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아까 그 할아버지가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기 시작했다. 내 옆에 할머니들이 나를 지켜주는 것 같아 왠지 든든하면서 한편으론 그녀에게 안쓰런 마음이 들었다.
해가 거의 지고 하늘이 푸른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할아버지는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러 가고 내 옆엔 아까 그 백인 여자분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와 친구로 보이는 다른 할아버지도 근처에서 서성거렸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아까 그 할아버지가 나에 대해 이야기했다며 이미 내가 토론토에서 온 것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한 달 동안 레비스에서 지내보려고 왔다고 한다. 요즘 이상한 사람이 많다며 조심하자고 서로 덕담을 나눴다.
오늘따라 노을은 정말 아름다웠다.
아름답다는 말이 이걸 표현하기 위해 생긴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적당한 구름.
층층이 겹쳐, 핑크이기도 오렌지이기도, 또 보라이기도 한 하늘.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그 장면을 영영 볼 수 없을 것처럼, 하늘을 수놓은 색들은 쉴 새 없이 바뀌어 갔다.
나의 변변찮은 표현력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찬사는 “미쳤다”뿐이었다.
타임랩스를 멈추고 사진을 찍을까 말까 고민을 했다.
동영상은 잘 보지도 않는데 괜히 찍은 것 같다. 그냥 사진이나 더 많이 찍을걸.
그래도 잊히지 않는 풍경을 눈에 많이 담을 수 있었다.
어느새 하늘은 많이 어둑어둑해졌다.
어느새 그 할아버지는 또 근처를 서성거리며 말을 걸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짜증을 넘어 이제 살짝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선착장까지 차로 태워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뛰어갈 수 있다며 서둘러 공원을 떠났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사람일은 모르는 거니까.
풍경을 등지고 선착장으로 향하던 시간은 6시 50분 정도였다. 그제야 7시 페리를 타지 못하면 한 시간이나 더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 생각이 났다. 서둘러 뛰었다. 타닥타닥 타닥 어깨에 멘 가방이 위아래로 흔들리며 소리를 냈다. 갑자기 화장실도 가고 싶어졌다. 6시 55분. 헉헉대며 선착장에 도착해서 직원에게 물어 화장실을 다녀왔다. 급한 마음에 허둥지둥 대는 나를 보며 직원은 자신이 가장 마지막에 페리에 타는 사람이라고 걱정 말라고 했다. 그 한마디가 왜 그리도 따듯하게 들렸는지 모르겠다.
페리에서 보는 올드퀘벡의 하늘은 순간순간 색이 빠르게 짙어졌다.
나름의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오늘은 버리는 시간이 없이 완벽한 타이밍에 완벽한 경치를 만났다.
페리에서 내리니 허기짐이 몰려왔다. 생각해 보니 오늘 먹은 거라곤 계란 두 개가 전부였다. 오늘은 마트에서 전기구이 치킨을 사서 먹을 생각이었다. 운 좋게 버스를 바로 타고 집 근처로 도착했지만, 이미 마트 문은 닫혀있었다.
엊그제 지나가다 본 화덕피자 집에 가서 피자를 먹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화덕피자집은 메인 거리를 살짝 벗어나 조금 더 어두운 골목에 있었다. 피자집 안에 주황색 조명들이 창문을 비집고 나와 그 어두운 골목길을 조금이나마 비췄다. 얼마 전 그 길을 지나가면서 동화 성냥팔이 소녀가 생각이 났다. 어두운 골목과는 대비되게 따듯해 보여서 한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마르게리타 피자와 잉글랜드 맥주를 시켰다. 사실 피자를 남길 줄 알았는데, 애매하게 남아서 그냥 다 먹어버렸더니 배가 터질 것만 같았다. 막 나온 화덕피자는 맛없기가 어려웠고, 맥주는 긴 하루를 달래주기 충분했다.
내일과 모레는 비가 온다고 한다. 너무나도 감사하게 퀘벡시티에서의 모든 날이 화창했다. 비를 원래 좋아하기도 해서 괜스레 비 오는 내일과 모레가 기다려졌다.
매일매일 두세 장 분량의 일기를 썼다.
계획된 것은 하나도 없지만, 나는 뭔가를 계속하고 있다.
하루하루가 꽉 차고 길다.
목표도 없고, 목적지도 없는.
순간순간에 충실한 이번 여행이 너무 행복하다.
러닝용품 편집샵 겸 커피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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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스로 가는 페리 선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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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스 전망 좋은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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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덕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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